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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5화 (15/120)

Chapter 15

켈리는 여전히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혼을 못 하게 붙잡고 있는 건 내 쪽인데.’

‘다음부터 그런 말은 저한테 찾아와서 해 주세요.’

냉한 목소리가 선연히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가 느끼는 감정을 너무도 잘 알았다. 내가 그를 상상하며 키워 온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끼어들 틈도 없는 그 커다란 감정의 실체를 직접 마주하자 비참함이 몰려왔다.

그럼에도 끊임없는 열망이 들끓었다. 그 남자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초라한 인생에 내린 한 줄기 빛이었다.

첫 만남 때, 손수건을 건네며 미소 짓던 조슈아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것은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을 안내해 주는 이정표와도 같았다.

“…다정히 웃어 주지나 말지.”

하지만 현재, 갈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망하기만 하다.

쾌청한 날씨였다. 그 안에서 켈리의 처지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나뭇잎들이 선선한 바람결에 휘날리며 웃어 댔다.

* * *

소희는 한참을 그렇게 켈리가 사라진 문 너머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슈아가 그녀의 턱을 잡아 돌려세웠다.

“뭘 그렇게 아련하게 쳐다보는데.”

불쑥 들이민 빛나는 용안에 그녀가 또 두 눈을 꽉 감았다.

아, 제발. 내 눈 좀 생각해 달라고.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자 소희가 힐끔 한쪽 눈을 열었다. 붉은 눈동자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왜 맨날 내 눈을 피해?”

“그거야… 거울을 좀 봐.”

침착하게 대꾸하며 그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밀어냈지만 꽉 틀어 잡힌 턱은 여전했다. 어째 그 커다란 손에 점점 더 힘이 실린다.

“무슨 의미야 그게.”

“제발 내 눈 좀 생각해서 천천히 다가와 줘. 눈이 멀 것 같다고.”

그 품에서 벗어나려고 바르작대자 그제야 그가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리고 만면에 깊은 고민이 깔렸다. 소희가 한 말에 의미를 알지 못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저런 얼굴을 갖고 자기가 잘생긴 걸 모르지. 참 신기한 캐릭터야.

숨통이 트인 소희가 찬찬히 그 빛나는 용안을 뜯어 보다가, 두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재킷 주머니에서 납작하고 작은 은색 통을 꺼냈다.

심장이 좀 정상적으로 뛰나 했더니 이 남자가 또 불쑥 다가온다. 전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 숨결에 소희의 눈시울이 설핏 떨렸다.

“뭐, 뭐야.”

“연고. 이마 흉터에 바르는 거.”

“아니, 시녀들한테 시키면 되는 걸 왜 네가 하는데?”

“내가 하고 싶으니까.”

그냥 그런 말을 툭 던져 놓고는 이마에 감겨 있던 붕대를 찬찬히 풀었다. 소희가 눈을 반복적으로 깜빡이다가 입을 뗐다.

“조슈아, 이런 친절을 뭐라고 하는지 알아?”

“뭐라고 하는데.”

“사랑.”

이마에 닿아 있던 손이 멈칫 세워졌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귀찮은 일이지만 내가 하고 싶고, 연고를 발라 주면서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고.”

“…조용히 해.”

“그런 게 바로 사랑이라고. 엉? 사랑을 모르는 이 답답한 남자….”

그의 왼손이 황급히 소희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찌나 다급하게 막았으면 그 커다란 손이 코까지 내리눌렀다.

“읍! 읍!”

숨이 쉬어지지 않아 버둥거리자 조슈아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손을 뗐다.

“입에 테이프를 감기 전에 조용히 해.”

“와, 문에 잠금장치를 설치하더니 이젠 입에 테이프까지.”

“잠금장치는 너를 위한 일이야.”

“그게 어떻게 나를 위한 일이야.”

“쓸데없이 돌아다니다가 상처를 더 덧나게 할까 봐 그러지.”

“다 나아도 못 나가게 한다며!”

“그래.”

담백하고도 단호한 어투였다. 그에 소희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뱉었다.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그 이후 소유욕이 짙게 드리운 광기 어린 말이 이어졌다.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갈 허튼 생각은 하지 마. 어딜 가든 찾아서 끌고 올 테니 무의미한 짓이야.”

“이거 인권 침해인 건 알아? 날 이렇게 가둬 둘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이 자식아!”

“아내의 외도를 막는 건 남편의 정당한 권리지.”

말은 참 더럽게 잘해서 입을 꾹 다물게 만든다.

“앞으로 성적 취향은 나로 굳히도록 해. 여기 갇혀서 나랑만 하게 될 테니까.”

덤덤하게 이어진 말에 소희가 사레들려 심하게 콜록거렸다.

이 대낮에 저런 야시시한 문장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 것도 능력이었다.

놀라서 한참 기침을 하자 커다란 그의 손이 소희의 등에 닿아 천천히 토닥여 준다. 이거 뭐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감금이라니. 사랑하는 여자한테 정말 못 할 짓인걸.”

조용히 읊조린 말에 붉은 눈동자가 매섭게 그녀를 노려봤다. 등을 토닥이던 부드러운 손길이 멎었다.

그래, 오늘의 세뇌는 여기까지 하자.

더 하다간 진짜 입까지 봉쇄되겠다 싶어 소희가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오랜 침묵 끝에 조슈아의 움직임이 다시 시작됐다. 연고를 검지에 묻히고는 하얀 이마에 사선으로 그려진 상처 위에 찬찬히 발랐다.

그 거리가 매우 가까워서 이마 위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그녀의 시야에 차분히 오르내리는 너른 가슴이 와 닿았다.

근심을 담아 길게 몰아 내쉬는 숨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흉터 남겠는데.”

“괜찮아.”

조슈아가 허리를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뭐가 괜찮아.”

“네 눈에만 예뻐 보이면 됐지.”

갑작스레 이를 씩 드러내며 웃어 보이자 마주한 붉은 눈동자의 초점이 조금 흐려졌다. 멍한 눈길이 잠시 닿았다가 도리어 그가 빠르게 시선을 피했다.

조슈아는 아무 대꾸 없이 연고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그 순간 소희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단추가 풀려 있는 진회색 재킷 사이로 하얀 셔츠에 묻어 있는 짙은 색이 눈에 띄었다. 오른쪽 복부에 길게 자리한 붉은 색상이었다.

뭔가 알 거 같은 익숙한 느낌과 더불어 불길한 기분이 자리했다.

소희는 저도 모르게 빨간 색상이 스민 자리를 더듬었다.

“아.”

위에서 고통이 묻은 나지막한 신음이 들려오더니, 조슈아가 소희의 오른손을 황급히 낚아채 올렸다.

“…이게 뭐야.”

“별거 아니야.”

손가락에 묻은 축축한 감촉의 정체가 명확해졌다.

피였다.

“별거 아니긴. 셔츠가 이렇게 젖어 있는데?”

그리고 소희는 왜 이런지조차 알 것 같았다. 불길한 기운이 주변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더 크게 요동쳤다.

“왜. 걱정돼?”

“어…. 응.”

시원찮은 대답에 까만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지자 소희가 더 강한 긍정을 담아 대꾸했다.

“정말 걱정돼. 왜 이렇게 된 거야?”

이런 상처가 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그것도 제국의 황태자가.

자신이 짜 놨던 스토리에 의하면 딱 하나밖에 없었다. 아리아드와 데온을 매장시켜 버리기 위해 제 몸에 직접 칼을 꽂아 넣는 장면.

불안감에 콧구멍이 조금 커졌다.

상처를 더듬었던 소희의 작은 손을 조슈아가 꼼지락거리며 만졌다.

“괴한이 칼로 찔렀어.”

이어지는 말이 처연하다.

와, 무서운 놈. 네 스스로 찔렀잖아, 이 자식아!

그의 눈망울이 반짝이며 소희를 가만히 응시했다. 위에 놓인 짙은 눈썹이 쳐졌다.

“어때. 나도 불쌍하지.”

“…엉?”

“많이 다쳤어. 피가 이렇게 날 정도로.”

“어, 어, 그렇구나.”

“난 안 불쌍해?”

뻔뻔하기는.

소희가 튀어나오는 말을 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불쌍하네. 불쌍해. 안쓰럽네, 아주 그냥.”

그제야 만족스러운지 남자의 눈이 매끄럽게 곡선을 그린다.

그저 맑게 웃고 있는 조슈아를 보며 소희는 소름 돋아 몸을 떨었다.

바닥을 뒹구는 데온의 머리통을 바라보며 키들거리며 웃고 있던 모습이 그 위로 겹쳐졌다.

이런 놈을 적으로 돌리면 그 인생은 그냥 박살 나는 거여.

“열이 다시 오를 수도 있으니까 오늘은 씻지 마. 내가 내일 씻겨 줄게.”

조슈아의 커다란 두 손이 그녀의 뺨을 지그시 눌렀다.

볼이 눌린 채로 소희는 고민했다.

시놉시스의 사건이 생각보다 한참 앞당겨져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데온을 살릴 구멍이 너무 좁아진다.

특히 이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말 듣고 있어?”

불쑥 다가온 조슈아의 얼굴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어어, 듣고 있지. 세수랑 양치만 할래.”

“그래. 그러자.”

재킷을 벗고 자신을 안아 들어 올리는 남자를 찬찬히 훑었다.

평소대로라면 정갈하게 내려가 있던 까만 머리카락들은 포마드 왁스로 올라가 있었고, 진회색 정복이 전보다 더 차려입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소희를 왼팔로 끌어안고는 오른손으로 제 뒤 목을 잠시 두드리는 모습에서 반짝이는 은색 커프스단추도 보였다.

“…어디 가?”

불안감이 또 똬리를 튼다.

“세수하러 가지.”

“아니, 세수하는 거 끝나고. 너 어디 가?”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조슈아는 질문을 무시했다.

기다란 다리는 그저 조용히 욕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한 고의적인 침묵에 소희는 제 불안감이 백 프로 적중하리라고 믿었다.

조슈아는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데온의 저택을 털어 서류를 갖고 올 것이다. 그리고 모아둔 것들로 조작을 해 반역의 증거로 삼을 터였다.

그게 오늘이라고? 대체 왜?

그녀가 자신의 몸 상태를 내려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 잠깐 앉아 있어.”

조슈아가 세면대 옆에 놓인 대리석 테이블 위에 그녀를 내려놨다. 그리고 물을 틀어 놓고는 한참 동안 온도를 체크했다.

그런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며 소희는 고뇌에 빠졌다.

움직일 수도 없는 다리도 흘러가는 전개를 막을 수 있는 법. 과연 그런 기가 막힌 방법이 있을까.

그의 단단한 팔이 다시 그녀를 감싸 안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소희의 얼굴 위에 꼼꼼히 물을 묻혀 주었다.

“이마에 약은 다시 발라야겠네. 일단 약 바르고 저녁에 오면 다리랑 팔에 얼음 찜질 해 줄게.”

나지막이 조곤조곤 이어지는 음성과 함께 얼굴이 촉촉하게 젖어 갔다. 그 성격답게 참 부드럽고 꼼꼼히도 닦아 냈다. 비누칠까지 열심히 해서는 차분히 얼굴을 씻겨 주었다.

미온수에 제 피부가 젖어 가는 걸 느끼며 소희는 깨달았다.

데온의 머리통이 땅에 구르지 않을 방법은 이로써 하나뿐이다.

다리가 다 나을 때까지 조슈아를 잡고 있는 것.

“다 했다. 수건 좀 가져올게.”

다시 그녀를 테이블 위에 앉혀 놓고는 뒤돌아서려는 걸 소희가 대뜸 잡아 세웠다.

얼마나 힘껏 잡았으면 팔소매에 달려 있던 커프스단추가 뚝 떨어져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소희는 그 단추가 데온의 머리통으로 겹쳐 보이자 그 손길이 더 간절해졌다.

“왜 그래?”

조슈아가 놀라서 소희를 가만히 내려 봤다. 그리고 얽혀 든 시선 끝에 그녀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다.

앞에 있는 남자의 목을 두 팔로 빠르게 감싸 안았다.

“조슈아.”

이내 아리아드의 붉은 입술 사이로 툭 튀어나온 말은 기상천외했다.

“나랑 하자.”

“…뭐?”

들려오는 대답이 흐릿하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머릿속으로 번역을 돌리고 있을 터였다.

“나랑 지금 하자. 하고 싶어.”

얼굴에 흐르는 물기만큼이나 젖어 있는 목소리가 조슈아의 귓가에 가득히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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