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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4화 (14/120)

Chapter 14

“조슈아 님이 불쌍해요. 제발 이혼해 주세요.”

켈리 유레시아는 정부의 딸로 태어나 천대받으며 자란 캐릭터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왔다. 상냥하고 온순한 태도 속에 꽁꽁 숨겨져 있는 작은 불씨가 있었다.

한마디로, 완벽한 외유내강의 표본이다.

그러니 본래 기가 강한 아리아드의 앞에서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여자였다.

“아리아드 님은 조슈아 님을 사랑하지 않잖아요.”

“켈리 양이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애초에 정략결혼인 건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아리아드 님은 다른 남자들에게 더 관심이 많잖아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파란 눈동자를 보며 소희는 느꼈다.

역시 이 여자주인공, 아주 강적이다.

“안 좋은 소문들을 들으면서까지 이 관계를 왜 유지하고 계신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그냥 이혼해 주세요.”

소희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했다.

여기서 고분고분하게 물러선다면 분명 또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고, 그건 본인이 힘들게 차지한 여주인공이라는 자리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좀 세게 나갈 필요가 있겠어.

“켈리 양, 혹시 이거 조슈아에게 주려고 갖고 온 건가요?”

소희가 협탁 위에 올라와 있는 커다란 상자를 들어 올렸다. 얼마나 마음을 한가득 담아 넣었으면 이리 묵직한지. 아리아드에게 건넨 소소한 상자가 굉장히 초라해 보이는 무게였다.

“선 넘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신랄한 어투에 켈리가 제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내가 다른 남자한테 더 관심이 있든 말든.”

또박또박 씹어 뱉은 말이 선명히 귓가에 꽂힌다.

“안 좋은 소문이 들리든 말든, 내가 왜 켈리 양한테 이런 말을 들어야 되는 건지?”

설핏 떨리던 켈리의 눈시울이 다시 본래 상태를 되찾고는 조금 전과는 달리 더욱 매서운 기세를 내뿜었다.

“제가 조슈아 님을 좋아하니까요. 아리아드 님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많이요.”

흠, 이 정도로는 물러서지 않겠다 이거지.

소희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예쁜 여자에게 유독 약한 것도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만든 여주인공이니 애정이 가는 건 당연했다. 쓴소리를 하려니 내가 키운 자식에게 못된 짓을 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내가 먹고사는 일이 더 중한 법이다.

소희는 들고 있던 커다란 상자 위에 단단히 매듭지어져 있는 금빛 리본을 풀어헤쳤다.

“…뭐 하시는 거예요.”

그에 꼿꼿하던 켈리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 왔다.

“말로 해선 못 알아듣는 거 같아서.”

그리고 상자를 열어 종이봉투에 하나하나 곱게 담겨 있는 쿠키들을 침대 위로 와르르 쏟았다.

“그 사랑 참 대단하네. 정성스럽게도 포장했네요.”

“다시 담아 주세요.”

“왜, 본인이 만든 거 건드니까 기분 더럽나요?”

“…다시 담아 주세요.”

소희가 무릎 위에 널브러진 쿠키를 오른손으로 한 뭉텅이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켈리 양, 저도 켈리 양이 제 거 건들 생각하니까 기분 더러워요.”

그대로 그것들을 빈 공간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고운 형태의 쿠키들이 엉망진창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

“조슈아는 내 거야. 감히 내 거 탐내지 마.”

보랏빛 안광이 매섭게 번득이자 켈리가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리고 허무하게 으스러진 쿠키들을 내려 봤다.

저렇게 아련하게 쳐다보니 누가 봐도 이 상황에서는 아리아드가 악녀였다.

이런, 역시 너무 강했나? 음식은 죄가 없는데 말이지.

같이 아련하게 그 쿠키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대화에 너무 집중하느라 의식하지 못했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예상치도 못한 인간이 문에 제 몸을 삐딱하게 기대고는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뭐야, 쟤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또렷이 저를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에 소희의 동공 지진이 시작됐다. 했던 말을 주워 담고 싶은 순간이었다.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리고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까만 구두는 널브러진 쿠키들을 무심하게 자근자근 밟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에 켈리도 그의 존재를 알아채고 눈이 커졌다. 사파이어 빛깔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손님이 있었네.”

켈리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 위로 까만 그림자가 졌다.

그녀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조슈아가 삐딱하게 섰다.

“이혼해 달라고.”

낮게 잠긴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그에 켈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온몸이 불타오르듯 벌건 색상을 그렸다. 특히 얼굴은 더 심하게 달아올랐다.

“왜 이혼 얘기를 아리아드한테 하지?”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건 아니고 황당해서.”

싸늘한 어투였지만 그 입매는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담고 있었다.

“이혼을 못 하게 붙잡고 있는 건 내 쪽인데.”

“….”

“다음부터 그런 말은 저한테 찾아와서 해 주세요.”

여전히 고개만 숙이고 있는 켈리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조슈아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그리고 할 말 다 하셨으면 나가 보시고.”

“…네. 죄송합니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살짝 고개를 들자, 그 얼굴 위로 눈물 몇 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조슈아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켈리가 차지하고 있던 원목 의자에 그저 가볍게 앉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아래쪽 시야에서 상황을 다 지켜보던 소희는 너무도 선명하게 켈리의 얼굴을 보았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꽉 물고는 서럽게도 울고 있었다.

그녀가 뛰듯이 걸으며 숨 막히는 공간을 벗어나자 그 널찍한 방 안에 정적만이 남았다.

“…불쌍하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

“어머, 내가 또 밖으로 말했어?”

혼잣말을 많이 하면 이게 참 문제야.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조슈아가 실소를 터트렸다. 아연하게 저만 바라보는 남자를 제쳐 두고 소희는 계속해서 켈리가 나간 방문만 응시하고 있었다.

조슈아를 사랑하게끔 설정을 짜 두고는 결국 자신이 그 옆자리를 차지해 버리다니.

울고 있던 장면이 선명히 그려지자, 방금 전 상황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 * *

오랜만에 만든 쿠키가 다행히도 잘 구워졌다. 모양도 어여뻤다.

만들면서도 만족스러움에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침이었다.

입궁하는 날이라 새벽부터 일어나 주방을 서성였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어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온 유레시아 진상들에게 걸려 괴롭힘을 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포장을 하면서도 그 상상 끝에 존재하는 반듯한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몇 년 전, 꿈같던 조슈아와의 첫 만남을 켈리는 항상 마음 한편에 간직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의 생일 파티에 초대되어 처음 연회장에 발을 들였던 날.

“어머, 켈리. 너도 왔니? 정부의 딸한테도 초대장이 가나 보지?”

“그러게. 나 같으면 쪽팔려서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텐데. 자기도 꼴에 여자라고 차려입고 나온 것 봐.”

부채로 입을 가린 채 키득거리는 언니들에게 둘러싸여 어김없이 괴롭힘을 당하던 날이었다.

매번 겪는 익숙한 상황이어서 눈물도 고이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 구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머나, 실수.”

로잘린은 들고 있던 레드 와인을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에 시원하게 들이부었다. 입매에는 가식적인 미소와 함께 내려 보는 눈초리가 싸늘했다.

그녀는 품에서 꺼내 든 손수건으로 곱게 화장을 한 켈리의 얼굴을 닦아 냈다. 그 손길이 매우 난폭했다.

여린 살갗이 아프게 쓸리자 켈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녀를 밀어냈다. 그제야 로잘린은 만족스러움에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린 채 손을 뗐다.

“좋은 시간 보내렴, 켈리.”

향수를 잔뜩 뿌린 두 여자가 자리를 뜨자 어지러웠던 속이 맑아졌다.

펼쳐진 시야에서 뚜렷이 보이는 건, 천장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 조명들과 그 아래에서 저들끼리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귀족들.

그리고 다 닦아 내지 못한 물기를 뚝뚝 흘리는 자신에게 닿는 시선. 숙덕거리는 이야기들이 온통 저를 향하는 것 같은 순간.

괴롭힘이야 익숙해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만 예상치 못한 것은, 갑작스럽게 닿는 많은 이들의 시선이었다.

눈과 귀가 좋은 것이 이쯤 되니 저주받은 것이라 여겨졌다. 눈시울이 붉어지려 하는 것을 이를 꽉 물고 참았다.

여길 나가면 어디로 가지.

그저 눈만 끔뻑이며 암담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을 때.

“저기.”

뒤에서 들려오는 고운 미성이 심장을 울렸다.

고개를 돌려 남자를 마주 보는 그 순간이 느릿하게 뇌리에 새겨졌다.

주황색 조명 밑에 아름답게 반짝이는 칠흑빛 머리카락, 잔잔한 분위기를 풍기는 적빛 눈동자와 단정하게 차려입은 회색 정복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어깨를 움츠러트린 자신과는 다르게 고귀한 자태였다.

“이걸로 닦으세요.”

매킨리 가문의 문양이 수놓아진 손수건을 건네는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

그 모든 장면이 하나하나 잊혀지지 않게끔 선명히 와 닿았다.

마주한 시선이 얽혀들어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손수건을 받지 않고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남자의 눈매가 어여쁘게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 고운 손이 켈리의 머리카락 위로 닿았다.

“받지를 않으시니 실례 좀 하겠습니다.”

손수건을 든 손이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직접적으로 닿는 것은 없었지만 그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치 않는 것처럼 켈리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섬세한 손길. 감사하면서도,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너무도 창피한.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질투가 나면 꼭 유치한 짓을 하더라고요.”

선율이 흐르는 듯 곱디고운 목소리가 또다시 귓가를 간질인다.

“영애가 너무 예뻐서 그러는 거 같아요.”

이내 머리카락에 닿아 있던 손길이 멀어졌다. 위에 있던 남자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옷까지는 직접 못 닦아 주니 가져가세요.”

속눈썹에 맺혀 있던 물기를 그 기다란 손가락이 가볍게 닦아 냈다. 켈리가 눈을 살짝 감았다가 느껴지는 감촉에 몸을 떨었다.

남자는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트레이 위에 놓인 쿠키를 입에 물었다.

“단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쿠키는 담백해서 맛있더라고요. 다 닦고 한번 드셔 보세요.”

매너가 온몸에 배어 있는 남자.

손수건만 놓고 가면 물기를 닦을 동안 홀로 민망할 수도 있으니 남자는 계속 옆자리를 지키며 쿠키를 먹었다.

이 남자에게는 어쩌면 가볍고 쉬운 친절. 하지만 켈리는 처음 받아 보는 따뜻한 호의.

목 끝이 턱 막히며 괜히 울컥댔다.

물기를 다 닦은 켈리가 옆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우물거렸다.

“손수건은 빨아서 나중에 돌려 드리고 싶은데….”

“손수건은 필요 없습니다.”

“아….”

“연회장에서 나가서 복도 오른쪽으로 쭉 걸어가면 방이 하나 있어요. 거기에 드레스가 몇 벌 마련되어 있으니 꺼내 입으세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조슈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켈리는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에게는 이것이 그저 가벼운 친절이었던 것처럼, 또 그렇게 가볍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켈리는 오랜 시간 그 자리에 홀로 앉아 있었다. 남자가 사라진 공간에서도 시원한 향기가 계속해서 감돌았다.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 같은 건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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