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3화 (13/120)

Chapter 13

잠이 들긴 했다. 해가 다 떠서.

그렇게 밤잠을 설치다가 겨우 잠들었는데, 망할 놈의 꿈자리도 흉흉하다.

꿈에서 소희가 써놨던 소설 속 회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수많은 관중들이 처형대가 마련된 단상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그 처형대 위에 오를 주인공은 데온 필트모어를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했던 가문들이었다.

단지 조슈아는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아리아드와 데온이 괘씸했을 뿐이었다.

반델리가 붙여 놓은 사람으로 인해 역모를 꾸몄다는 허위 사실을 부풀릴 수 있었고, 그것으로 반델리와 사업적으로 긴밀한 사이인 데온을 엮어 죽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필트모어 가문을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했던 인물들은 황태자 자리를 위협하는 자신의 형인 다니엘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조슈아는 쉽게 생각했다.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다 묶어서 한꺼번에 없애 버리기로.

“진행하세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오면, 단두대의 칼날이 찬란히 반짝이며 서서히 위로 향한다.

첫 번째 희생양은 데온. 핏발 선 눈으로 조슈아를 노려보던 매서운 기세는 이내 날카로운 칼날에 꺾였다.

철컹. 서늘한 소리와 함께 잿빛 머리가 데굴데굴 단상 위를 굴렀다.

“아악!”

피가 여기저기로 튀었다. 순식간에 분리되어 버린 데온의 몸을 보고 아리아드는 소리를 질렀다. 그걸 바라보고 선 조슈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끔찍한 새끼.”

그를 보며 중얼거리는 아리아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관리하지 못한 머리카락이 말라 비틀려 빗자루 같았고, 깨끗했던 눈동자도 그 주변으로 핏줄이 잔뜩 올라와 혼탁했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뼈만 남은 몸집에 아이를 담은 배만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제 위에서 키들거리며 웃고 있는 남자에게 계속해서 욕을 뱉었다.

“이래서 애초부터 너를 상종도 안 했던 거야. 앞에서는 기품 있는 신사인 척 연기해 대는 역겨운 새끼.”

그에 붉은 눈동자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매번 나를 천박하다는 듯이 내려 보는 저 재수 없는 눈깔을 파 버렸어야 됐는데. 너는 사람들이 다 네 밑에 있는 것 같고 쉽지? 그러니 이렇게 사람을 장난감 다루듯 필요 없으면 폐기해 버리지.”

“아니, 아리아드. 넌 지금 필요에 의해서 죽는 게 아니야.”

“…뭐?”

“조용히 살면 될걸. 눈앞에서 자꾸 심기를 건드리니 죽는 거야.”

조슈아의 입매가 유려하게 곡선을 그렸다. 그 앞에서 아리아드는 묶여 있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을 버둥거리며 괴성을 질렀다.

“개새끼야! 너도 곱게는 못 죽을 거야!!”

아리아드는 조슈아의 수족들에게 끌려 처형대에 올랐다. 그녀의 목 위로 칼날이 번득였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가 곧 치러질 막의 피날레를 천천히 음미하며 입술을 뗐다.

“아리아드, 남 탓할 필요 없어.”

철컹. 칼날이 또 매서운 소리를 뱉었다.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데온이 죽은 것도, 곧 네 부모가 죽을 것도.”

“조슈아!!!”

공기를 찢을 듯 날카롭게 울리는 고함 앞으로 스산하게 깔린 눈빛이 다가섰다.

“그리고 네 아이가 죽는 것까지. 모두 다 네 탓이야, 아리아드 피어슨.”

칼날이 떨어졌다. 어룽거리던 시야가 이내 까맣게 암전되었다.

긴 어둠 끝에서 소희가 목을 붙잡고 벌떡 일어났다.

“와아아악! 내 목! 사람 살려!”

식은땀을 흘리며 헉헉거리다가, 이내 커다란 침대 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와, 내가 쓰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조슈아 이거 완전 정신병자잖아.”

무서운 자식. 조용히 중얼거리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방 안에 혼자 있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런 생생한 꿈을 꾸고 나서 조슈아를 마주했다가는 분명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이씨, 안 그래도 겨우 잠들었는데.”

그녀가 한참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 조슈아는 얄밉게도 정말 잘 자는 것 같았다. 그는 잠을 자는 내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그녀를 안고 있었다.

소희는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앉은 눈을 비비며 끔찍한 꿈을 잊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절대! 네버! 이렇게 돼서는 안 돼!”

모든 것을 통째로 다 바꾸겠다는 다짐과 함께 소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얼마 뒤 시녀가 아침 식사를 들고 들어왔다.

“몸이 안 좋으시니 가볍게 묽은 죽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녀는 은쟁반을 내려놓고는 식사를 도와줬다. 조용히 받아먹고 있다가 다시 섬뜩한 꿈이 생각나 입을 뗐다.

“저기, 그래서 사후피임약이 진짜 없어?”

꿈처럼 되지 않기 위해선 피임약이 정말 간절한데. 왜 다들 나한테 그걸 주지 않는 거니.

솔직히 아이만 가지지 않는다면 조슈아와의 로맨스는 이대로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 문제였다. 이에 대한 마음이 편해지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그와의 관계도 한결 쉬워질 테고.

그러나 앞에 있는 여자의 표정은 냉담하기만 하다.

“있긴 합니다. 근데 왜 찾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드셔도 소용없을 겁니다.”

“엥? 그게 무슨 말이야.”

“사후피임약은 백 프로 피임을 도와주지도 않을뿐더러, 관계를 갖고 72시간 내에 복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와, 당신 이렇게 말을 잘 하는 줄 오늘 또 처음 알았네.”

술술 말을 이어 가는 시녀를 째려보니 그녀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72시간이라 하면 날짜를 계산해 볼 필요도 없었다. 데온과 관계를 가지고 눈을 떴을 때가 3일이 이미 지나 있었으니, 그냥 임신 확정이다.

“망했네. 이럴 때만 시놉시스가 제대로 굴러가지. 이럴 때만.”

낙담하며 중얼거리는 앞으로 다시 얄미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부터 외출은 힘드실 거 같습니다.”

“알아. 몸이 이런데 외출은 무슨.”

“그게 아니라, 문에 잠금장치를 설치해 놔서 몸이 다 나으셔도 외출은 힘드실 겁니다.”

“엥?”

눈이 커다래진 소희를 보며 시녀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저하께서 명하셨습니다.”

“헐.”

이 정신 나간 남주를 어떻게 하지.

어쩐지, 어제 별말 없이 다정하더라니. 이미 가둬 둘 계획이었으니 자애로웠던 거였다.

제 할 일을 다 끝내고 시녀는 방 밖을 나섰다. 그리고 저 너머로 열심히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나 참. 진짜 어이가 없어서.”

어차피 움직일 수도 없어 침대에 쭉 갇혀 있는 신세였지만, 어째 감금을 당한다니 공기가 더 탁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일단 아리아드는 이미 조슈아의 마음을 얻어 죽는 길을 피했다면, 두 번째로 해야 될 건 데온을 살리는 일이었다.

임신이야 차후에 배가 진짜 불러 오면 생각해 볼 문제였다. 지금 와서 뭐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신에게 물 떠 놓고 기도를 올릴 수밖에.

“이제 데온을 어떻게 살리지.”

몸만 멀쩡했으면 다 해결될 일이었다. 조슈아가 조작한 서류만 없애 버리면 끝날 일이었으니 말이다.

근데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아니야. 난 할 수 있어.”

독자님들이 남겼던 댓글이 생각나자, 소희가 멀쩡한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허공을 향해 들어 보였다.

“데온은맛있어 독자님! 데온팬티벗겨 독자님! 저만 믿어 주십쇼! 제가 야무지게 데온을 살려 보겠습니다!”

그리고 당차게 소리를 질렀다.

때마침 문 여닫이가 끼익, 쇳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반짝이는 금발을 가진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 파란 눈동자를 담은 눈매가 당황스러움에 커져 있었다.

“…네?”

켈리였다.

* * *

켈리는 협탁에 자신이 들고 온 상자 두 개를 내려놨다. 금빛 리본으로 화려하게 포장된 상자는 꽤 크기가 컸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작았다.

침대 옆에 놓인 원목 의자에 앉은 그녀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고 분홍빛 입술만 오물거렸다.

침묵 속에서 소희가 먼저 다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켈리 양, 제가 외로움을 타서 혼잣말을 많이 해요. 방금 말했던 팬티 벗겨 이런 거는 사람 이름인데. 아, 사람 이름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제 고향에는 가끔 그런 이름을 가지신 분들이 계세요. 그니까, 제가 변태다 뭐 이런 건 아니고. 아무튼 저는 정상입니다.”

“아, 네….”

더 이상하게 쳐다보는 거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말을 하면 할수록 더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니 이쯤 해야겠다 싶어 본론을 꺼내 놓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그게, 제가 쿠키를 좀 만들었는데 드리고 싶어서요.”

“…나한테 굳이?”

어머,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걸 그만.

소희가 놀라서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몸이 많이 안 좋다고 들어서요. 달달한 걸 먹으면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갖고 왔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협탁 위에 놓아 뒀던 작은 상자 한 개를 건넸다. 그에 자연스레 소희의 오른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저 커다란 상자를 가질 주인공은 누구일까.

“아, 감사해요. 안 그래도 달달한 게 먹고 싶었는데.”

“아닙니다.”

켈리의 용무는 여기서 끝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쉬이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눈을 맞추지 않은 채로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어 아름답게 빛나는 속눈썹 밑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리고 무릎에 벗어 둔 너른 챙의 모자 끝을 두 손으로 계속 만지작거렸다. 무언가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

소희는 그런 그녀를 찬찬히 훑었다. 켈리의 한쪽 목에는 아리아드와 같이 새파란 멍이 올라와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매우 다를 테지만.

짜 놓은 설정상, 저 멍은 가족들에게 얻어맞아 생긴 자국일 것이다. 정확히는 피가 반만 섞인 언니들에게.

어째 직접 보니 마음이 더 불편하다.

“저기, 아리아드 님.”

상처를 보며 상념에 빠져 있던 소희가 시선을 올렸다. 켈리의 푸른 눈이 곧게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문에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걸 봤어요.”

“아, 그건….”

뭐라 말해야 되니.

“…조슈아가 저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뭐 일종의 사랑? 그런 이유로 설치된 거라고 볼 수 있죠.”

어느 미친놈이 사랑한다고 문에 잠금장치를 설치해서 감금을 하겠냐만.

자기가 뱉어 놓고도 도통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싶어 말을 더 덧붙였다.

“아, 이해하기 힘들 거라는 건 아는데….”

“아니요.”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툭 끼어들었다.

“이해해요.”

“엉?”

“조슈아 님이 왜 그러시는지 알 것 같아요.”

안절부절못하던 눈빛이 갑작스레 바뀌며 당황스러울 정도로 또렷이 응시했다.

“조슈아 님이 불쌍하네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지…?”

“얼마나 엉망으로 구셨으면 그렇게 착하신 분이 이렇게까지 하겠어요.”

소희는 헛웃음을 뱉고 싶은 걸 삼켰다.

착하다라, 할 말은 많지만 참을 수밖에.

“아리아드 님을 정말 많이 좋아하시는 거라면 그분이 너무 불쌍하네요.”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다.

조슈아를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이 아리아드를 향하고 있는 것 같으니 질투는 나고, 하지만 아리아드를 보면 조슈아에게 정작 큰 관심이 없고 딴 남자를 만나러 다니니 쓴소리는 하고 싶고.

평소 온순하게 내려앉아 있던 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치켜떠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아리아드 님 소문이 어떻게 도는지 아시나요?”

“뭐, 남자들과 몸을 막 섞는 요부다?”

덤덤히 아리아드 캐릭터를 설명해 주자 켈리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또 있어요. 아리아드 님이 매킨리 황실을 망하게 할 여자라는 소문이요.”

“오우.”

그런 설정은 처음인걸.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소희의 앞으로 냉랭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슈아 님이 불쌍해요. 제발 이혼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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