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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2화 (12/120)

Chapter 12

“마음은 됐고, 몸만 달라고.”

어둠뿐인 공간에서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어쩐지 더 선득한 느낌을 주었다. 주변을 메우는 서늘함에 소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무슨 말이 그래? 몸만 달라니.”

당황해서인지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그니까 지금 몸만 섞자, 뭐 그런 거야?”

얼굴이 벌게져서 애써 말을 잇는 앞으로 조슈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한참을 홍조가 올라온 그녀의 뺨만 찬찬히 쓸었다.

이어진 부드러운 스킨십에 소희는 도망가고 싶었다. 심장 부근이 울렁거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이 자식아!

죄 없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자, 조슈아가 한쪽 팔을 괴고는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게 맞네. 너도 나랑 한 게 꽤 마음에 든 모양이고, 나도 마음에 들고. 근데 서로 마음은 없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민망한 말을 잘도 뱉는다.

“그러니 그게 정확하네. 몸만 섞자는 거.”

“허.”

탄식을 흘리는 소희 앞으로 고운 얼굴이 그저 맑게 웃고 있었다.

“아니야. 지금 단단히 착각하는데, 너의 마음은 그게 아니야.”

소희도 이런 말을 꺼내면 굉장히 웃겨 보인다는 걸 알았다.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도 아니고, 꽤 황당할 테지만.

“넌 날 사랑하는 거야. 우리 뜨거웠잖아. 난 분명 느꼈어!”

우스워 보여도 뭐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이 남자는 끝까지 제 감정을 비틀어 생각할 텐데.

비웃음을 살 거라는 생각이 딱 맞아떨어졌다.

조슈아의 입매가 비소를 담고 있었다.

“넌 네가 몸을 섞었던 남자들을 다 사랑해?”

“아, 아니. 그거랑 다른 경우인데 이건….”

소심하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그의 웃음이 뚝 끊겼다. 조각 같은 얼굴이 정색하니 심히 스산하다.

“대체 뭐가 달라.”

억울해. 왜 아리아드에 빙의해서는 이런 수모를.

“네가 진정 몸의 관계에서 사랑을 느꼈다면 그렇게 많은 남자들을 만나지도 않았겠지.”

“그, 사랑이라는 게, 뭐 여러 가지가 있는 거니까. 이런 사랑도 있고, 저런 사랑도 있고….”

소희도 사랑이라는 걸 잘 모르지만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유교걸인 내가 왜 아리아드를 위해 대신 변명을 해 주고 있는 건가, 자괴감에 빠진 채로.

그 와중에 냉한 어투가 말허리를 뚝 끊었다.

“아니, 아리아드. 넌 수많은 남자들을 만나면서 단 한 순간도 진심이었던 적이 없어.”

“…그걸 네가 어떻게 단언하는데.”

“내가 그렇게 느끼니까.”

“뭐?”

“나한테 단 한 순간도 진심이지 않잖아.”

소희가 입술만 오물거렸다. 뭐라 덧붙일 말을 고민하다가 저를 차분히 내려 보는 눈빛에 일순 말을 잃었다.

“아, 물론 지금 데온에게는 꽤 관심이 있어 보이던데. 그 마음도 오래 가지 않을 거라 믿어.”

“진짜 오해야. 데온은 다른 일 때문에 찾아간 거야.”

조용히 속삭이는 말 뒤에 정적이 찾아왔다. 간혹 창 너머로 나뭇가지의 흔들림이 들릴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한참 뒤 조슈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다른 일 때문에 찾아갔다가, 키스를 하고 있어?”

“그건….”

분명 웃음소리는 들렸지만 마주한 눈매는 웃고 있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에 소희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저 말이 사실이니 할 말이 없는 것도 있었다.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무덤을 파고 있는 느낌이다.

“넌 모든 게 다 쉽지.”

괜히 화가 안 나냐고 물어봐서는. 잠이나 처잘걸.

낮게 잠긴 목소리를 들으며 소희는 후회했다.

“네가 나랑 몸을 섞었다고 날 사랑하는 게 아니듯, 나도 널 사랑하는 게 아니야.”

새벽, 고요한 공기의 흐름 속에 조슈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또박또박 꽂혔다.

언쟁을 이쯤 끝내고 싶어 소희가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랑을 또 세뇌시킬 수 있는 기회야 얼마든 널렸으니, 잠이나 자자 이제.

그런데 조슈아의 반듯한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잡고 고정시켜 다시 시선을 얽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부정확한 감정들은 싫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거.”

“….”

“내가 좋아하는 건.”

옆에 누워 소희를 내려 보던 조슈아가 일순 두 손을 다 내려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탔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니, 너 또 무슨 짓을 하려….”

그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뭉개졌다.

조슈아는 소희의 예민한 부분을 정확히 짚고 깨물었다. 자연스레 교성이 터지자, 벌려진 틈으로 그가 거칠게 들어왔다. 엉켜드는 촉감에 손끝이 구부러지고 발끝에서 전기가 찌릿 흘렀다.

그의 혀는 전보다 더 매섭게 움직였다. 하지만 맞닿은 모든 구간이 달콤한 향을 남겼다.

엉켜 있는 혀도, 방향을 바꿀 때마다 가볍게 부딪히는 곧은 콧등도, 부드럽게 자신의 뺨을 쥐고 있는 커다란 손도, 얇은 실크 슬립 위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가슴도.

모든 곳에서 풍기는 그 체취는 자석에 이끌리듯 거친 행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다. 또 끊임없이 더 깊은 촉감을 갈구하게 만들었다. 도무지 밀어낼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소희는 점차 온몸에서 올라오는 선명한 열감을 느꼈다. 눈을 질끈 감은 속눈썹의 끝부분이 바르르 떨려 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축축한 소리를 내며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숨을 헐떡이는 소희와는 다르게, 남자는 단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몽롱하게 풀려 있는 눈을 보며 조슈아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는 살짝 떨리고 있는 턱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난 이런 게 좋아. 이렇게 눈에 정확히 보이는 거.”

“….”

“하나의 예로, 흐트러진 네 표정 같은.”

짓궂게 웃고 있는 걸 보며 소희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와, 이 남자 제대로 삐뚤어졌구나.

어디서부터 손봐야 될지 막막했다. 사랑을 깨닫기까지 한참 먼 길을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본래 짜 놨던 시놉시스에서도 켈리에게 느끼는 사랑을 계속해서 부정하는 캐릭터였다. 제 감정은 억누르고 스무 해 넘는 인생을 일만 해 왔으니 그런 설정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렇게 야한 짓을 하는 건 변수인데. 다들 아리아드 캐릭터에 물드는 거니?

“그래. 일단, 일단 내가 다 미안하고.”

현재 아리아드는 몸이 확실히 안 좋았다. 전처럼 격하게 몸을 섞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으니 우선 냅다 사과부터 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또 달려들 것 같은 맹수 같은 눈빛이 앞에 놓여 있었다.

“…이제 내려오지 않겠니?”

제 몸 위에 올라타 있는 남자에게 간곡히 빌었다.

그 간절한 어투에 조슈아는 그저 픽 웃었다.

애절하게 쳐다보는 게 전혀 먹혀들지 않았는지 그는 더 가까워졌다. 널찍한 가슴이 저를 내리누를 듯 다가서자 소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망했다. 오늘 밤도 아주 길겠구먼.

아랫입술을 짓누르며 해탈하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섰던 열기가 멀어졌다.

그 위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슬쩍 눈을 뜨자, 조슈아의 눈가에 어여쁜 애교 살이 자리하고 있었다.

“눈은 왜 감아. 기대하는 것처럼.”

“아니, 아니! 누가 기대를 했다고!”

“뭔가 바라는 눈치였는데.”

“야, 너 진짜 어이없다. 먼저 그렇게 불쑥 다가와 놓고는.”

저를 실컷 놀리는 남자를 흘기며 투덜거리자 조슈아가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그 커다란 손에는 조그마한 숟가락과 물약을 담은 병이 들려 있었다.

“이거 가져오려고 그런 건데.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나 싶네.”

기다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침대 바로 옆에 놓인 협탁이 보였다. 그에 소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왜, 아쉬우면 지금이라도 더 할까?”

“이씨! 그만 놀려!”

붕대를 돌돌 감아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만 아니었으면, 저 짓궂게 웃고 있는 남자를 뻥 차 주는 건데.

소희가 씩씩거렸다.

조슈아가 피식거리며 웃다가 약병을 열어 은색 숟가락 위에 물약을 담았다. 그리고 대뜸 그녀의 입 앞으로 들이밀었다.

“이게 뭔데.”

“해열제. 너 열나.”

그제야 아리아드의 몸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느껴졌다. 어쩐지 이불을 덮지 않은 부분이 유독 차게 느껴지는 것도 그 이유였다. 그저 이 남자 때문에 더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빤히 약을 쳐다보기만 하자 조슈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왜. 먹기 싫어?”

“아니.”

입을 벌리자 그 손길이 부드럽게 움직여 약을 넣어 주었다.

달콤씁쓸한 맛이 입안에 퍼져 나갔다.

“싫다 하면 내 입에 넣고 직접 먹여 주려 했지.”

난데없는 말에 소희가 약을 뿜으려다 급히 오른손으로 틀어막았다.

“…미친놈.”

겨우 삼켜 내고, 곱게 미소 짓고 있는 미친 사람을 보며 소희가 중얼거렸다.

그에 조슈아는 아무런 대꾸 없이 탁자 위에 있는 컵을 집어 건넸다. 친절히 물까지 먹이고서야 그는 옆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원래의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몸 위로 이불을 단단히 덮어 주고는 두 팔이 다시 소희를 꽉 안았다.

“이제 자자.”

다정스런 말투에 아까의 길었던 언쟁이 잊혀졌다. 소희는 다시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걸 느꼈다.

심장아, 제발 나대지 마.

“빨리 자고, 빨리 낫자.”

“…응.”

“그래야 빨리 하지.”

“이게 진짜 끝까지 놀리지!”

위에서 키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쌌다. 닿아 있는 손가락들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자 또 심장 부근이 간질거렸다.

“놀리는 거 아니고, 이건 진심.”

“허.”

“너랑 하는 거 좋다고 했잖아. 진심으로.”

“…그만해. 자라며.”

“응, 빨리 자.”

민망스러운 말들은 다 뱉어 놓고 빨리 자란다. 이렇게 짓궂을 수가.

소희는 불타는 고구마가 된 채로 앞에 놓인 몸을 가볍게 꼬집었다. 단단한 몸은 아무런 타격도 없는지 더 이상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자신을 안고 있는 머리 위에서 더운 숨결이 느껴졌다. 차분하게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과 다르게 그에 맞닿아 있는 소희는 번뇌에 빠져 있었다.

계속해서 입을 맞췄던 순간이 반복 재생됐다. 그것을 애써 떨쳐 내기 위해 도리질 치고는 머리를 비우려 노력했다.

코앞에서 풍기는 체취도 어찌나 아찔한지. 뭐 하나 마음 편히 잠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소희야, 정신 차려. 너 이렇게 밝히는 애였니.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눈을 질끈 감은 채였다.

숨 막히는 기나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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