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1화 (11/120)

Chapter 11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다.

조슈아는 쓰러져 있는 아리아드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고 그 위에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자리를 떴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그렸다.

집무실에 도착해서 테이블 위에 놓인 양초에 불을 붙이자 주황빛 하나만 어둠 속에서 일렁였다. 그 몸 뒤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바스락. 창가 너머에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냥 바람일 뿐일 리가 없지.

“반델리 후작이 보낸 사람인가.”

그러자 쿵, 엄청난 굉음과 함께 누군가 나무 위에서 떨어졌다.

“…아야.”

남자가 모래 바닥에 뒹굴었다. 조슈아가 창틀에 얼굴을 괸 채 그런 남자를 내려 봤다.

반델리는 여전히 멍청했다. 황실의 돈을 횡령한 사실을 눈감아 줬건만 그것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또 이렇게 사람을 붙여 놓았다.

조슈아에게 필요한 것을 바로 준비해서 아부를 떨기 위함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제일 큰 목적은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는 조슈아의 행보를 파악하기 위함이었고.

안타깝게도 조슈아는 오래전부터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멍청함을 이용하기에 좋은 시기였다.

“할 말이 있으니까 올라와요.”

“…네, 네!”

복면을 쓴 남자가 아픈 몸을 보살필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다시 나무를 탔다. 그리고 금세 창문을 넘어 조슈아의 건너편에 섰다.

조슈아가 가죽 의자에 앉고는 테이블 위에 있는 펜대를 손으로 한 번 돌렸다.

주황빛이 일렁이는 속에 흐르는 서늘한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남자가 먼저 입을 뗐다.

“…저 후작님께서 나쁜 뜻으로 시키신 일은 아니고….”

“압니다.”

조슈아의 단호한 언성으로 인해 말이 뚝 끊겼다.

그가 남자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잠시 스쳤던 붉은 눈동자는 하나 켜둔 촛불을 담고 더 형형히 빛났다. 남자는 그 위압감에 도저히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렇게 급하게 할 건 아니었는데.”

“…네?”

“그냥 빨리 처리해 버리고 싶어.”

나지막이 읊조리는 알 수 없는 말 뒤에, 그가 테이블 옆에 세워져 있는 진검을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자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아악!”

선혈이 이곳저곳으로 튀어 나갔고 바닥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었다.

남자의 몸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잠잠해졌다. 그제야 조슈아는 칼을 빼냈다. 차게 식어 버린 몸이 바닥에 쿵 떨어졌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남자가 차고 있는 단검을 빼 들었다. 단검에는 반델리 후작의 포티어스 가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내 그걸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옆구리에 쑤셔 넣었다.

다시 뽑아 들 때, 격심한 통증으로 살짝 인상이 찌푸려지긴 했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 무감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의 하얀 셔츠가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조슈아가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을 흔들자 시녀가 들어왔다.

“메이컨 좀 불러오세요.”

그녀가 벌겋게 물든 풍경에 눈이 커졌다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뒤 메이컨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저하.”

피비린내가 자욱이 깔려 있음에도 그는 그저 허리만 굽히고 있었다. 그 위로 스산한 목소리가 울렸다.

“포티어스 가문의 첩자가 저를 찔러 죽이려고 했습니다.”

“재판부에 일러 조사를 진행하라 이르겠습니다.”

“아니, 이번 건 우리가 조사하겠다고 전하세요. 그리고 내일 점심때 필트모어 저택을 수색할 겁니다.”

“데온 공작님 저택 말씀이십니까?”

“네. 사람 몇 명을 추려서 준비해 놓으세요.”

“알겠습니다.”

그 대답과 함께 메이컨은 죽어 있는 시체와 만들어진 증거인 단검을 들고 집무실을 나갔다. 이내 다시 들어온 시녀는 피가 흥건한 바닥을 닦고 조슈아의 찢어진 살을 꿰맨 뒤 붕대를 감았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집무실은 다시 깨끗해졌다.

조슈아가 소파에 앉아 뒤로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 어둠 속에서 낮부터 계속 제 눈가에 아른거리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데온이 아리아드의 몸 위에 올라타 입을 맞추고 있던 장면.

“…네까짓 게 감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을씨년스러웠다.

조슈아는 애써 그 장면을 각색했다. 자신이 아리아드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로.

* * *

소희가 눈을 떴을 땐. 대한민국 서울, 자신의 방 안이었다.

“허, 돌아왔다.”

고통스럽던 아리아드의 몸에서 벗어나자 날아갈 것 같은 행복감에 침대에서 일어나 빙그르르 돌았다.

“이거지! 이거지!!”

이내 다시 금방 울상이 됐다.

“소설 속으로 가기 싫어. 너무 힘들엉.”

머릿속에서 매섭게 싸우던 두 남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행했던 부끄러운 행위들도 생각났다.

물론, 주변에 절대 없는 미친 비주얼들이지만.

근데 얼굴만 그렇게 조각상처럼 생기면 뭐 해. 완전 또라이들인데.

소희가 의자에 앉아 두 손 위에 얼굴을 묻었다.

“댓글 확인하기도 무섭네.”

한참을 마우스 쥔 손을 헤매다가 플랫폼에 들어가 소설을 확인했다.

놀라운 일이 있었다. 소설은 무려 세 편이나 풀려 있었다.

그녀는 배고프지도 않은 배를 내려 봤다.

“뭐야, 꿈이 아니야?”

잠을 자면 꿈을 꾸는 게 아니라, 그냥 공간을 이동하는 거였다.

“놀랍네, 진짜.”

중얼거리다가 소설을 눌러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켈리의 내용은 저번에 비해 극도로 적어졌다. 아리아드의 지분율이 8이라면 켈리가 2 정도.

“조슈아의 마음을 얻으면 분량이 많아지는 게 맞구먼.”

켈리의 장면은, 점심 식사 후에 조슈아와 정원을 같이 갈 생각에 들떠 있다가 그가 아리아드를 안고 가 버리자 실망한 내용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마지막 문장이 좀 심상치 않았다.

[켈리는 멀어져 가는 두 남녀를 지켜보다가 주먹을 쥐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 마이 갓. 여주야, 미안하다. 내가 더 좋은 남자 소개시켜 줄게.”

정성껏 여주인공을 만들어 놨던 작가는 진정으로 마음이 쓰였다.

켈리는 공주님 대우를 받으며 예쁘게 자란 캐릭터가 아니다. 피폐물답게 온갖 고초란 고초는 다 겪으며 꿋꿋이 이 장면까지 걸어왔다.

그런데 남아 있는 건 짝사랑이라니.

“너무 미안하네. 내가 진짜 기깔 나는 남자로 하나 붙여 준다. 오히려 좋아! 조슈아는 완전 또라이란 말이야. 이번 기회에 더 좋은 남자를 만나라고.”

소희는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댓글 내용은 보기 두려워 그냥 다음 회차 내용부터 확인해 나갔다.

조슈아와의 19금 신과 데온과의 19금 신이 주를 이루자, 다시 그 생생한 장면이 생각나 눈을 가렸다.

“어후, 진짜 민망해. 너무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 거 아녀?”

단어 하나하나가 어쩜 그리 외설적인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래도 내용이 좀 궁금해져 다시 검지와 중지를 벌리고는 그 틈으로 슬쩍슬쩍 읽어 내렸다.

“야, 이거 내용이 너무 세서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겠는데.”

그리고 마지막 단락으로 가니, 아리아드를 안고 가면서 제 감정을 파악해 가는 조슈아의 심리 묘사가 나와 있었다.

[난생처음 짝사랑을 경험하는 조슈아는, 정체 모를 제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그 내용을 다 읽고는 소희가 소리를 질렀다.

“와! 아리아드가 여주다! 이거 완전 확정이잖아!”

감격스러움에 박수를 짝짝 쳤다. 그리고 후련한 마음에 댓글 창을 눌러 여론을 확인했다.

반응은 역시나 매우 긍정적이었다.

[끼야양아앙 작가님 제가 뭘 본거죠? 너무 좋은데요. 침 흘리면서 보는 중.]

[하, 조슈아 너무 섹시해. 데온도 섹시하긴 한데 조슈아가 더 좋음.]

“어후, 자주 해 줄게 얘들아. 딱 기다려.”

소희는 자기가 당했던 것도 잊고 뿌듯함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댓글은 두 분류로 나눠져 있었다. 조슈아를 미는 파랑, 데온을 미는 파로. 물론 조슈아가 압도적으로 높긴 했지만 데온을 원하는 독자들도 적지 않았다.

[데온은맛있어] 독자님과 [데온팬티벗겨] 독자님이 비슷한 내용의 댓글로 거의 도배를 해 놨다.

[데온 이대로 죽는 거 아니죠? 19금씬 그렇게 풀어놓고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는 거 아니죠? 작가님? 제 주식 살려주세요.]

[데온 살려줘요. 조슈아한테 지지마.]

[데온 분량 좀 늘려주세요.]

그 댓글들을 살피다가 소희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물론 살릴 수야 있었다. 조슈아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 어디서 어떻게 그를 죽이는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일을 막다가 조슈아한테 미움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아니지. 내가 이미 여주인공이잖아.”

분량 확보는 확실하고, 조슈아는 이미 아리아드를 짝사랑하고 있고.

“그냥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는데?”

소희가 고개를 숙이고 캭캭 웃었다.

“좋아. 제대로 놀아 보자.”

그녀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웅변을 하듯 두 팔을 펼쳤다.

“독자님들! 여러분들이 원하는 거 다 보여 드리겠습니다! 저만 믿고 따라오십쇼!”

* * *

진한 민트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눈을 뜨지 않고도 여기가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조슈아의 품 안이었다.

아니, 일어나자마자 이럴 필요는 없는데.

당황스러움에 뒤척이자, 위에서 따뜻한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같은 침대에 누워 조슈아는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새벽이라 방은 어둠이 내려앉아 분위기가 더 묘했다.

에라이, 모르겠다.

소희는 그냥 조슈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시원한 향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입술을 너무 비비지는 마.”

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열기에 젖어 더욱 깔려 있었다.

“힘들어.”

“크흡.”

소희는 너무 놀라서 콜록거렸다. 물론 그 목소리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꽉 끌어안겨 있는 하반신 쪽에서 그의 커다란 물건이 엄청 부풀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너 아픈 거 알아서 참고 있으니까 자극하지 마.”

아니, 진짜 어이없네. 자기가 꽉 끌어안고 있고는 왜 본인이 흥분해서 난리야.

소희는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숨을 흡 참았다. 하반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붙어 있어서 거리를 좀 벌리려고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이 너무 아팠다.

“더 자.”

조슈아가 그녀를 내려 보다가 커다란 손으로 떠져 있는 눈을 감겨 주었다. 목소리가 어찌나 다정한지 소희는 몸이 녹아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왜 데온과 있던 것에 대해 화를 안 내지? 왜 언급조차 안 하는 거야?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다정할 상황이 아닌데 오히려 이렇게 나오니 더 불안했다.

“…너 화 안 나?”

소희가 그렇게 물으니 조슈아가 살짝 떨어져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말을 잇는 그 목소리가 여전히 차분하다.

“화나. 화나는데. 화를 내면 넌 더 도망갈 거잖아.”

“아니….”

“네가 그 아픈 몸으로 데온을 보러 간 이유는 알겠어. 그만큼 관심이 있는 거겠지.”

“엥?”

아닌데. 뭐라는 거야.

의문을 제기하는 감탄사에도 조슈아는 제 생각을 꿋꿋이 이어 갔다.

“데온을 좋아해도 상관없어.”

“…엉?”

“나를 좋아하는 마음은 필요 없으니까 내 옆에 있어.”

어둠이 드리운 공간 속에 핏빛 눈동자가 무섭게 번득였다.

“마음은 됐고, 몸만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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