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나랑 떠나자.”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하는 데온의 목소리가 어찌나 절절한지, 차마 거기다가 대고 재를 뿌리기 미안했다. 그래서 그냥 침묵을 택했다.
그저 꾹 다물린 아리아드의 입술은 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 대답은 필요 없어.”
“…어?”
“널 납치해서라도 데려갈 거니까.”
이채가 도는 잿빛 눈동자가 체리를 머금은 듯 탐스럽게 빛나는 아리아드의 입술로 닿았다.
데온은 그대로 그것을 삼켰다.
그 안에서 담배의 씁쓸한 향과 데온의 체취가 뒤섞였다. 뜨겁게 휘몰아치는 고양감은 내려앉을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거칠게 몰아붙이는 커다란 남자 덕에 소희가 벽에 꽉 눌렸다. 등 뒤에 놓인 회갈색 벽돌로부터 느껴졌던 선선함도 곧이어 뜨겁게 달아올랐다.
소희는 제 몸이 아파서 느껴지는 열기인지, 아니면 이 남자 때문에 생기는 열기인지 이제는 그것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서로의 몸이 엉켜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
쾅.
거친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둘 다 놀라서 입술을 떼고 시선을 둔 곳에는, 조슈아가 아리아드의 몸에 올라타 있는 데온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망했다, 소희는 조용히 읊조렸다.
여주가 되어야 한다면서 이딴 모습이나 보이고, 제대로 망했다.
핏빛 눈동자는 굉장히 차분했다. 그 눈망울은 아무런 떨림도 없이 고요하게 그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희는 저 눈빛을 너무 잘 안다.
조슈아라는 남자는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나면 오히려 저렇게 급속도로 차분해졌다. 그리고 무서우리만큼 집요하게 머리를 굴린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그 빨간 눈동자가 그녀와 눈을 맞추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의 발자국 소리에 맞춰 소희의 심장도 쿵, 쿵, 쿵 비슷한 박자로 뛰어 댔다.
“왔어? 그럼 다시 나가. 우린 바빠서 말이지.”
데온은 그런 그를 돌아보고 비아냥거리다가 다시 소희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보란 듯 또다시 맹렬한 입맞춤을 지속했다. 전보다 더 거칠어진 움직임 덕에 섞여진 혀 안에서 피 맛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 행위는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했다.
“악!”
조슈아가 그대로 앞에 다가서, 데온의 잿빛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 올렸기 때문이다. 데온이 머리카락이 잡힌 채로 벌떡 일어났다.
“이 시X 새끼가! 안 놔?”
그가 험악한 욕설을 뱉으며 앞에 놓인 조슈아의 얼굴을 내려쳤다.
조슈아는 입술에 피가 맺힌 채 몸을 휘청거리다 곧바로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데온의 머리카락을 놓고 나지막이 말했다.
“애 몸 상태 좀 봐 가면서 행동해. 발정 난 개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조슈아의 두 눈이 아리아드를 담았다.
팅팅 부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그녀의 하반신은 드레스가 한껏 말려 올라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침이 진득하게 묻어 번들거리는 새하얀 목은 퍼렇게 멍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이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조슈아는 다시 데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데온은 마주한 붉은 눈동자에서 읽고 싶지 않은 기운을 느꼈다. 분명 그녀에 대한 증오심만 담고 있던 눈동자가 다른 느낌으로 일렁댔다.
‘그래, 눈 높은 자신에게도 이렇게 벅찰 정도로 아름다운 여잔데 조슈아 저 새끼라고 눈깔이 다르겠어?’
데온은 조슈아가 느끼는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사랑과 다를 바 없을 테니까.
그 질투로 침착된 얼굴 앞에서 조슈아는 폭탄을 내려놨다.
“오늘 아침에 나랑 너무 많이 해서 피곤할 거야. 건들지 마.”
“뭐?”
데온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제 옆에 놓인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그리고 벽에 기대 있는 소희를 내려 봤다.
그 눈동자가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라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래, 미안하다. 말했으면 더 심하게 괴롭혔을 거잖아.
소희가 조용히 눈을 피했다.
“하, 뭐 어쩌라고 개새끼야. 너만 많이 했냐? 나도 얼마 전에 스무 번 넘게 했어, 시X 놈아.”
데온이 한껏 과장을 하며 흉흉한 기세를 보였다.
거침없이 들려오는 말에 소희가 부끄러움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그게 이제 네 인생에서 마지막 경험이 될 거야. 앞으로 아리아드는 내 옆에만 있을 거니까.”
“지랄하네.”
“지랄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응, 개새끼야. 여기서 나가면 내 손으로 너부터 손볼 거니까 그런 줄 알아.”
거칠게 멱살을 쥐어 잡는 데온 덕에 조슈아가 그와 딱 붙어 섰다. 그럼에도 남자의 핏빛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여유로움이 데온을 내려 보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기대할게. 근데 여기가 굉장히 마음에 드나 봐. 나를 또 이렇게 때린 걸 보면.”
“하. 또 뭐 유치하게 황족 폭행 어쩌고 하면서 잡아 두게? 별 거지 같은 게.”
“자기 기분 하나 주체 못 하고 주먹이나 먼저 날리는 사람이 유치한 거 아니겠니.”
“이 시X 놈아. 너 말 다 했어?”
“왜 또 치게? 쳐 봐 어디 한번.”
날카로운 분위기에 둘의 언쟁은 계속됐다. 그에 소희는 어지러운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소 새끼, 말 새끼, 개새끼를 찾으며 욕을 이어 나가는 데온의 언성과 차분하고 조용하게 팩폭을 조곤조곤 내리꽂는 조슈아의 언성이 여기저기서 윙윙 울렸다.
이내 앞이 조금씩 뿌옇게 변해 가는 것도 같았다. 끝까지 내몰린 아리아드의 몸은 한계에 다다랐다.
“…닥쳐.”
소희가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그 둘의 싸움에 금방 묻혀 버렸다.
이내 그녀가 마지막 하나 남은 기운을 몽땅 쏟아부으며 침대 옆에 놓인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제야 그 둘의 눈동자가 소희를 향했다.
“다 닥쳐!!!!!!!”
그 장렬한 마지막으로 제 임무를 다한 아리아드의 몸이 오른편으로 기울어졌다.
남자들의 움직임은 갑작스레 부산스러워졌다. 데온의 손은 기울어진 아리아드의 머리를 받쳤고, 조슈아의 손은 그녀의 어깨를 받쳤다.
둘 다 쓰러진 아리아드를 놀라서 지켜보다가 다시 그 몸에 손을 붙이고 있는 서로에게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손 떼.”
“너나 떼, 개새끼야. 아리아드는 나랑 같이 있었어.”
그에 영리한 남자는 더 이상 말싸움을 지속하지 않고, 이미 자신이 그녀의 상반신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들어 올렸다. 데온은 손에 닿아 있던 머리카락을 움켜잡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아리아드를 빼앗겼다.
“멍청한 데온, 네가 여기 갇혀서 아리아드를 위해 뭘 할 수 있니.”
조슈아는 드디어 원하던 것을 품에 안고는 아무것도 없던 만면에 표정을 담았다. 그 얼굴에 픽, 웃음이 그려졌다.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떠는 데온을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유려하게 입가를 올렸다.
“치고 싶으면 또 쳐도 돼.”
이내 그 구릿빛 주먹에 제 뺨을 들이밀었다. 위에서 데온이 들끓는 분노를 삼키려 이를 아드득 갈고 있었다.
“이 방에 영원히 갇혀 있고 싶다 하면 내 친우를 위해서 기꺼이 얼굴을 내줄게.”
“여기서 나가면 진짜 네 새끼부터 죽여 버릴 줄 알아.”
그에 조슈아는 정말로 즐거워 웃었다. 하하하, 그 커다란 웃음소리가 조그마한 창에서 몰려오는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저런, 데온. 넌 나한테 닿기도 전에 죽을 거야.”
그대로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뒤돌았다. 그저 제 품에 있는 작은 여자를 꽉 안은 채로.
그 뒤편에서 데온의 고함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 * *
마차는 황궁을 향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평소 존재치 않았던 라벤더 향이 주변을 에워쌌다.
조슈아는 자신이 안고 있는 여자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아름답게 물결치는 보랏빛 머리카락 아래, 보기 좋게 올라와 있는 이마 라인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그걸 조심히 닦아 주었다. 그리고 그 손길은 점차 내려가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쓸었다.
크지만 날카롭게 빛나는 연보랏빛 눈동자를 담은 눈매, 그 아래 적당한 크기로 오뚝하게 자리 잡은 코, 그 밑에 촉촉하게 젖은 새빨간 입술까지.
그리고 또다시 그녀의 감긴 눈가로 손을 갖다 댔다.
조슈아는 며칠 전부터 아리아드를 마주하고선 항상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는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 보인다고 믿었다. 그 온순하게 내려앉은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너무 다른 사람 같아.”
조용히 중얼거리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내 허를 찔렀다.
“몸 안에 다른 사람이 빙의한 것처럼.”
똑똑한 남자는 스토리 밖의 이야기를 꿰뚫었다.
하지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어이없는 망상이라며.
그리고 데온이 남긴 흔적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퍼렇게 멍이 올라온 살결이 꽤나 크게 이어져 있었다.
이에 대해 분노가 느껴져 고개를 묻고 그 위를 다시 제 흔적으로 덮고 싶다가도, 이상하게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다는 감정이 물결쳤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고는.
“…왜.”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괴로워하는 게 좋다. 일그러진 얼굴이 마음에 든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던 사고의 오류였다.
머리가 좋은 남자는 계속해서 분석해 나갔다. 왜 이런 감정이 느껴지는지.
그리고 다시 아리아드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그 얼굴이 아파서 고통에 일그러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손가락으로 인해 흥분감에 젖은 모양새가 좋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하.”
조슈아가 제 생각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뱉었다.
이내 그 선정적으로 빛나는 앵두 빛 입술을 바라보다가 더 시선을 내려 봉긋하게 꽉 찬 가슴을 내려 봤다.
“…짐승 새끼도 아니고.”
자기 비하가 계속된 끝에.
“나, 진짜 너에 대한 마음이 성욕만 남았나 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이상한 쪽으로 치달았다.
심장이 저릿하고 울렁거리는 감정은, 그렇게 똑똑한 머릿속에서 ‘성욕’으로 도출되었다.
만지고 싶은 풍만한 가슴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성을 되찾고 마차에 나 있는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광활히 펼쳐진 푸르른 풍경이 달아오르는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다.
하지만 시야를 돌려도 수목의 맑은 공기 속에 뒤섞인 아찔한 향기는 여전히 코끝을 자극했다.
그것을 견디려고 입술을 꽉 물었다.
난생처음 짝사랑을 경험하는 조슈아는 정체 모를 제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결국 그녀의 전부가 고혹적인 몸뚱이뿐이어서 그렇다며 되뇌기까지 했다.
계속해서 상대를 부정적으로 그려 내는 건, 아마도 훗날 그녀에게 내쳐져서 느낄 굴욕감을 피하기 위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