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9화 (9/120)

Chapter 9

“설마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야?”

데온은 자신이 품고 있는 여자를 아무 곳에도 보내기 싫다는 듯, 아주 꽉 끌어안았다. 이내 그를 자극하는 꽃 무리의 향이 몰려드는 곳으로 코를 묻었다.

보랏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있자니, 그토록 그리던 라벤더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아리, 나 지금 너무 감동이야.”

흐뭇한 미소를 띠우며 행복해하는 밑으로 끙,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삼십 센티나 차이 나는 키 덕에 데온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놔.”

“뭐라고? 뭐라고, 아리?”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의 얼굴과 가까이하려 고개를 푹 숙이자.

“놔! 아파 죽겠어!”

고막을 찢을 거 같은 고함에 화들짝 놀란 데온이 그제야 근육으로 무장한 팔을 풀었다.

“악!”

일순 지지대를 잃어 제 기능을 못 하는 다리가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으려 하자, 데온이 급하게 안아 들었다.

그는 그제야 아리아드를 살피고 깨달았다.

몸이 성치 않았지 참.

“하,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드니.”

진짜 원고료 백 배로 줘라, 안 그러면 나 그냥 현생에서 죽어 버릴 거야.

데온이 꽉 끌어안아 찢어질 거 같은 왼팔과 이젠 아무 감각도 없이 그저 팅팅 부은 두 다리에 소희는 진정 눈물이 맺혔다.

“미안해.”

그가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깜빡했다. 몸 아픈 거.”

“됐어.”

후. 한숨을 쉬자, 그가 소희를 안아 들고 산만 한 덩치에는 정말 작아 보이는 싱글 침대에 그녀를 내려놨다.

그리고 이내 착각은 계속됐다.

“어떻게 그렇게 아픈 몸으로 날 보러 와 줄 생각을 했어.”

고통에 미간을 구기고 있던 소희가 당황스러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 감동이야.”

“아니….”

저렇게 눈이 반짝반짝해서 쳐다보는데, 여기서 대체 그 안경잡이 의원이 어디 있냐는 걸 어떻게 물어봐?

그의 커다란 손이 아리아드의 볼을 부드럽게 쓸었다.

“내가 걱정됐구나.”

진짜 돌아 버리겠네.

이내 소희는 곰곰이 고민을 하다가 대충 둘러댔다.

“널 보러 온 건 맞지.”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같은 대화 하고 있는 거 맞지? 소희는 일순 현기증이 일어 이마에 제 하나 남은 멀쩡한 오른손을 갖다 댔다.

“내가 물어볼 것도 있고. 그래서 왔어.”

결국 뱉은 솔직한 물음에, 데온은 뭐든 물어보라는 듯 그 맹수 같은 사나운 눈매를 접어 웃었다.

“…저번에 너희 저택에 왔던 의원 어디 살아?”

근데 조심스럽게 던져진 질문이 너무 기대 밖이었다. 데온은 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일그러뜨렸다.

“뭐?”

“아니, 그, 저번에 내 정신 아프다고 네가 데리고 왔던.”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공기의 흐름이 다시 사나워졌다.

데온의 머릿속에 있던 아름다운 꽃밭은 한 번에 시들었다.

“맞아. 아니, 근데 너를 보면서 겸사겸사!”

“….”

“그래, 겸사겸사 물어보려고 했던 거지. 내가 뭐 그거만 묻기 위해서 왔겠니? 날 진짜 뭐로 보고! 나도 너 너무 보고 싶었지. 얼굴이라도 보려고, 어? 의원이 널린 게 의원인데. 그냥 아무나 보면 되지.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잖아.”

그 굳어 가는 표정에, 사후피임약을 얻어야 된다는 사명감으로 소희는 랩을 하듯 속사포로 말을 뱉었다. 간추리지 못하고 터져 나온 당황 어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데온은 굉장히 단순한 남자다.

그 속사포 변명에 그는 다시 표정이 풀려 웃었다.

“난 또. 날 이용하고 버리는 줄 알았어.”

“아이고, 무슨 그런 서운한 소리를!”

당황해서 오른팔을 절레절레 저어 보이며 땀을 삐질 흘렸다.

그래, 사실 아리아드만 살리고 너는 죽어도 상관없겠다, 생각하고 있었어. 날 용서해라.

“그런데 그 의원은 왜 찾아?”

드디어 제대로 된 대화의 창구가 열려 소희는 그저 마음 편히 입을 열었다.

“피임약 좀 얻으려고.”

“…피임약?”

근데 웬걸, 분위기는 더 험악해졌다. 희번덕이며 돌아가는 저 잿빛 눈동자를 보며 소희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리, 너 또 누구랑 자게.”

“엥?”

“피임약을 왜 찾아. 대체 왜.”

“아니, 사후피임약을 말한 거야.”

엉켜가는 대화 속에 제대로 폭탄을 투하했다.

“어떤 새끼랑 했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는 이미 분노로 잠식되어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다 타 버려 재가 되어 버린 것 같은 그의 눈망울은, 이내 아리아드의 목에 와 닿았다.

“아니, 너랑….”

너랑 했다고, 너랑. 잇지 못한 말은 그렇게 삼켜졌다.

왜냐하면 매섭게 침대에 올라선 데온이, 그녀의 두 팔을 잡아 올려 벽으로 밀쳤기 때문이다.

“아!”

다친 왼손이 그의 커다란 손에 험악하게 잡혔다. 아파서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힘을 풀 생각이 없었다.

아리아드의 새하얀 목을 타고 내려 가 있는 벌건 키스 마크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야, 데온. 나 진짜 너무 아파. 제발 놔줘.”

고통 어린 목소리에도 잿빛 눈동자는 이미 광기가 서려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또 어떤 새끼야, 이건.”

소희는 그냥 빨리 이 매서운 손길을 벗어나고 싶어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남편, 남편이야!”

“남편? 조슈아?”

“그래, 남편이랑 한 게 뭐가 문제야. 이 자식아, 놔라!”

하지만 그건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잿빛 눈동자는 질투에 잠식되어 이글이글 타올랐다.

타인에게 관심이라고는 쥐똥만큼도 없고 제멋에 취해 사는 데온은, 누군가를 질투한다거나 미워하는 감정도 가져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조슈아 매킨리를 봤었던 청소년기 때부터 그는 변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맑게 웃고 있지만 뒤돌아서면 실상은 그렇지 않은 남자, 그래서 무진장 재수 없음에도 주어진 일을 너무 깔끔하게 처리해 사람들의 입에서 칭찬이 끊이질 않는 남자.

그런 남자와 같은 또래이고 매일 비교 선상에 선다는 건 그 자체로 스트레스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제일 화나는 건, 조슈아의 결혼 상대가 자신이 어릴 때부터 짝사랑해 온 아리아드라는 것.

그게 데온을 제일 미치게 만들었다.

“하, 너 그 새끼랑 잤어?”

자신을 이대로 찢어 죽일 것 같은 눈빛에, 소희는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대충 에둘러 거짓말을 했다.

“아니, 자긴 뭘 자. 사이도 안 좋은데! 걔가 나 괴롭힌다고 그냥 그러고 말았어. 제발 이 손 좀 놔줘! 아파 죽을 것 같아!”

하긴. 그가 아는 한 아리아드와 조슈아는 굉장히 사이가 안 좋았다. 그래서 데온이 최근에 아리아드에게 접근한 것도 있었다. 나도 혹시 그녀의 옆에 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내 그녀를 갖게 된 첫날 밤. 달콤하게 이어진 분위기에 확신했다.

내 손에 아리아드를 쥘 수 있겠구나.

“그래도 이건 마음에 안 들어.”

그의 고개가 빠르게 숙여 빨갛게 수놓아진 흔적 위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는 거칠게 짓이겼다.

“야! 미친놈아!”

그 감촉은 뜨거움을 넘어서 쓰라렸다.

데온은 진정 맹수처럼 탐스러운 살결에 자신의 이를 박아 넣고 더 큰 흔적을 남겼다. 조슈아의 것을 모두 없애려는 듯이.

그의 거대한 몸에 깔려 발버둥 치던 소희가, 절대 벗어날 수 없음을 인지하고 그냥 해탈해 버렸다.

몸에 힘을 풀고 눈을 감았다. 계속해서 지분거리는 느낌에 피부가 너무 아파 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소희가 이 순간 제일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시놉시스에 데온의 캐릭터 설정을 ‘아리아드에게 집착 오지게 하는 남자’라고 적은 것이다.

내가 아리아드로 빙의할 줄 알았으면 그래도 ‘오지는’이라는 단어는 좀 빼는 건데.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뭐 하겠냐만. 그래, 이런 스토리를 기획한 내 잘못이요.

“넌 내 꺼야. 아무도 못 건드려.”

소유욕이 진득하게 묻은 말과 함께 계속된 고통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잠잠해졌다.

데온은 자신이 수놓은 흔적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띠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새하얗게 뻗은 목은 빨간 걸 넘어 푸르뎅뎅하게 멍이 질 듯 상처가 올라와 있었다.

아파서 눈물이 살짝 맺혀 있는 소희의 눈가를 데온이 부드럽게 쓸었다. 그리고 그 사납게 찢어진 눈매를 곱게 접었다.

“아리, 나랑 도망가자.”

“…정신 차려. 또 무슨 헛소리야.”

“나 제정신이야. 너도 나 좋아하는 거 맞잖아. 나랑 도망가자.”

그는 그냥 자기가 좋을 대로 결론을 내렸다. 얼마 전 그녀와의 첫날밤은 서로를 갖기 위해 모두가 한마음으로 매달렸으니까.

그니까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겠지. 그게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야.

“하아.”

소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난 너의 아리도 아니고, 여기 사람도 아니고, 너는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도 아니고, 내가 무슨 수로 너랑 도망을 가니.

“조슈아 때문에 무서워서 그래? 걱정 마. 내가 죽여 버릴 거니까.”

“네가 무슨 수로 걔를 죽여….”

데온, 네가 죽겠지.

밖으로 뱉지 못하는 말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냥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댔다. 등 뒤로 땀이 흘러 드레스 뒤편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나마 차가운 돌에 닿자 그 열기가 가라앉았다.

그 얼굴 위에서 데온의 손가락이 뽀얀 살결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이내 그 손길이 밑을 향하자 소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그만해라.”

성낼 힘도 없어 기운 빠진 낮은 목소리에도 그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조슈아고, 데온이고. 이 새끼들은 하나같이 욕정에 젖어 아리아드의 몸 상태가 어떤지는 전혀 신경도 안 쓴다.

전에 다친 다리는 이미 회생하기 글러 먹었고, 데온이 세게 잡아 더 부어오른 왼팔도 아픈 걸 넘어서 제 몸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래도 조슈아는 그 손길이 그나마 부드럽고 계속해서 소희의 반응을 확인하고 움직이는 편이라면, 데온은 회색빛 머리카락에 걸맞게 정말 늑대처럼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했다.

제 기분에 솔직하고,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무조건 가져야 성이 풀리는 단순한 남자.

밑에서 거친 숨소리가 이어졌다.

“아리, 그럼 나랑 한 게 마지막이야?”

“…그래.”

그 대충 둘러댄 거짓말에, 하반신까지 내려가 있던 데온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럼 사후피임약도 나랑 한 것 때문에 찾은 거야?”

이놈이 이제 내 말을 알아먹네.

하지만 그제야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아이 낳자.”

“뭐?”

“내가 잘해 줄게. 내가 잘 보살필게.”

그 잿빛 눈동자가 애절해졌다.

“아리, 나랑 살자. 저기 지방 근교에 저택도 지어 놨어. 너를 위해서.”

“엥?”

그런 설정은 없었는데?

하긴. 어차피 곧 죽을 캐릭터라 생각하고 설정을 대충 짜 둔 것도 있었다.

데온은 그 안에서 제멋대로 움직였다.

“공작 지위, 지금 하고 있는 사업, 날 따르는 사람들, 다 버릴 수 있어.”

“….”

“나랑 떠나자.”

그는 정말 아리아드라는 여자에게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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