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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8화 (8/120)

Chapter 8

조슈아는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

그의 상냥한 몸가짐과 말투를 처음 본 이들은, 저 사람이 다스릴 제국의 미래를 아름답게 그리며 찬탄했다.

하지만 그 친절함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머리가 굉장히 좋고 영악했다.

모든 이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바라보는 이는 태도가 여유로울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성격을 그저 온화함이라고 칭했다.

“아리아드 님이 몸이 안 좋다고 들어서 과일을 좀 싸 들고 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소희가 누워 있는 침실에 와서 등을 굽실거리는 이 남자.

반델리 후작은 조슈아의 영악함에 크게 데인 사람 중 하나였다.

약점이 잡힌 반델리는 사람을 붙여 그의 동태를 매일 같이 살폈고, 필요한 걸 갖다 바쳤다. 그리고 그는 조슈아가 아리아드를 보살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는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제가 과일을 깎아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등을 구십 도로 굽히며 과도를 드는 반델리를 보고 소희가 부담스러움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아뇨 아뇨. 필요 없고요.”

“그럼 무엇이 필요하신지….”

하늘의 별을 따 달라 그러면 우주라도 갈 기세였다.

반델리는 아리아드의 옆에 앉은 조슈아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이내 눈이 마주치자 무서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

“반델리.”

“네네!”

어둠이 드리운 나지막한 조슈아의 목소리에 반델리가 허둥지둥 대답했다.

“필요한 게 있긴 하죠.”

“뭔가요? 제가 지금 당장….”

“나가세요.”

“…예?”

“아침부터 소란 피우지 말고 나가시라고.”

무심한 적안이 얼굴에 와 닿자 반델리가 땀을 흘렸다. 그리고 대답도 마저 못하고 허리가 굽은 채로 뒷걸음질 쳐 방을 빠져나갔다.

조슈아가 탁자에 놓인 과일을 깎아 그녀의 입에 넣어 주자, 소희가 그걸 우물우물 씹으며 물었다.

“왜 아침부터 그렇게 화가 났어.”

“너랑 둘이 있고 싶은데 시끄럽잖아.”

뭐야, 이 정도면 나 여주 된 거 아니니? 역시 몸을 섞은 건 최고의 선택이었어.

소희가 속으로 감격했다.

하지만 이내 붉은 눈동자와 마주하자 불안감이 일었다.

저거 그냥 인형을 갖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소유욕 같기도 하고.

그 눈이 탁하니 영 껄끄러웠다.

눈을 빤히 보고 있자 조슈아가 붉은 입술을 뗐다.

“그렇게 보지 마.”

“엉?”

“하고 싶잖아.”

“뭐, 뭘.”

일순 들려오는 이상한 말에 소희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어제 그 흥분 어린 공기처럼 주변이 갑작스레 후끈 달아올랐다.

귀까지 타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너 진짜 변태 같아.”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

폭탄을 던져 놓고 저 혼자 담담한 어투에 성이 나 소희가 씩씩거렸다.

“짐승이 아니고 인간이면 좀 참아!”

아리아드를 향해 성욕만 남았다고 어쩌고저쩌고할 때부터 알아봤다.

짐승 같은 놈.

“인간이 아닌 그냥 짐승이라고 하면.”

“예?”

“오늘도 해 줄 건가.”

돌아 버리겠네. 뭐 사실 나쁘지 않긴 하지.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다가 소희가 제 생각에 놀라 오른손으로 볼 따귀를 짝 내렸다.

정신 차려. 뭘 나쁘지 않아.

“뭐 해.”

갑작스러운 행동에 조슈아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리고 그 손이 부어오른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아리아드, 네 몸 좀 함부로 대하지 마.”

일그러진 얼굴이 좋다, 옆에 묶어 두고 망가뜨리겠다고 했던 발언은 잊었는지 그 말투가 굉장히 상냥하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남자.

이내 소희가 아무 대답 없이 그저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조슈아는 눈을 맞추고 맑게 웃다가 다시 과일을 깎았다.

그녀는 그 고운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저리 아이같이 순수하게 웃고 있어도 설정 상 이 남자는 그냥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방금 제 앞에서 굽실거리던 반델리는, 황실에서 선박 사업을 위해 지원받은 돈을 제 뒷주머니에 빼돌리고 있었다.

그걸 조슈아가 귀신같이 눈치채고 언급했다.

그러자 멍청한 반델리는 그저 순수하게 비위를 맞추려고 그에게 사람을 붙여 놓는다. 하지만 그것을 조슈아가 모를 리 없었다.

그걸 따로 언급하지 않고 붙어 있는 사람을 한동안 내버려 둔 채, 조슈아는 자신이 필요한 상황에 써먹는다.

그렇게, 반델리의 아둔함이 황태자를 암살 시도 하려 했다는 반역으로 몰아 스스로 그의 목을 자를 예정이었다.

반델리를 죽이기 위해 이런 일을 꾸미냐고?

아니, 그는 그저 장기말일 뿐이다.

데온과 아리아드를 죽여 버리기 위한.

“무서운 자식.”

내가 만든 캐릭터임에도 직접 마주하고 있자니 그 설정은 영 껄끄러웠다.

현실이었다면 아주 멀리 하고 싶은 인간이다. 그냥 여주인 켈리한테만 친절한 소시오패스니깐.

여주가 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만 아니었다면 눈에 안 띄게 피해 다녔을 것이다.

조슈아의 손이 다시 입가에 와 닿아 과일을 넣어 줬다.

“아리아드.”

낮게 깔린 목소리가 어째 불안하다.

“그만 쳐다보는 게 좋을 거야.”

“내 눈도 마음대로 못 두나, 참나.”

투덜거림에 조슈아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내 그 커다란 몸이 침대를 짚고 올라오는 기세를 보였다.

“그래, 그럼 계속 쳐다봐.”

“…뭐? 야, 어딜 올라와!”

그는 어느새 소희를 밑에 두고 내려 보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게끔 그 두꺼운 팔이 그녀의 양옆을 견고히 막았다.

“하고 싶다는 걸로 이해할게.”

조슈아의 고개가 아리아드의 탐스러운 입술을 향해 빠르게 숙여졌다.

* * *

점심 업무 때문에 조슈아는 드디어 자리를 비웠다.

혼자 남겨진 소희는 온몸이 저려 오른손으로 몸을 열심히 주물렀다.

“와, 몸이 소모품이었으면 벌써 다 닳아 없어졌겠네.”

작품 한 개 더 썼다가는 몸이 갈려 나가겠다고 생각하며.

소희는 그래도 나름 괜찮은 스토리를 만들어 갔다고 자부했다. 현재, 본래 여주였던 켈리 유레시아가 들어올 틈 따위는 없어 보였다.

“독자님들, 저 진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현실로 돌아갔는데 또 욕만 하시면 저 진짜 웁니다.”

중얼거리며 제일 중요한 일을 생각해 냈다.

저 또라이 같은 남주가 지금은 욕정에 젖어 계속해서 들이대지만, 언제 또 모습을 달리할지 모를 일이다.

특히 이미 짜 둔 설정처럼 약을 너무 늦게 먹어서 데온의 아이를 갖게 된다면.

“워, 끔찍해.”

미래는 어두웠다.

소희는 온몸이 붕대로 둘러져 있어도 어쩔 수 없이 아리아드를 살리려고 일을 진행해 나가야 했다.

다리에 고정된 붕대를 풀었다. 여기저기 긁혀 상처가 크게 나 있었고, 발목은 팅팅 부어 있었지만 침대에서 벗어나서 일어나려 노력했다.

“으악.”

처음 발을 내디딜 때 찌릿하며 고통이 와도 좀 익숙해지니 나름 걸어 다닐 만했다.

“하, 진짜 개고생이야.”

일어서 있는 소희의 앞으로 시녀가 놀라 눈이 동그래져 쳐다봤다.

“그 몸으로 어디 가시게요.”

“어… 산책?”

“안 됩니다.”

말투가 민망하리만큼 매우 단호했다.

“목발도 있으니 걱정 마. 요 앞에 정원만 돌고 올게. 방에만 있으려니 답답해 죽을 것 같아.”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저런, 그건 안 되는데. 보아하니 이 시녀는 조슈아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스파이다.

어떻게 떼어 내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요즘 너무 우울해서.”

아리아드의 날카로운 눈매가 일순 아련하게 내려갔다.

그 앞에서 시녀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안절부절못했다.

그에 소희는 쐐기를 박았다.

“지금 너무 죽고 싶어. 혼자 조용히 산책하고 오면 마음이 좀 안정될 것 같아.”

극단적인 말에 앞에 있는 여자가 울상이 되더니 결국 길을 비켜 주었다.

“고마워. 조심히 다녀올게.”

그래그래. 조심히 데온을 보고 올게.

* * *

조슈아가 데온의 위치를 말해 주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를 직접 짠 소희는 그가 갇혀 있을 곳을 대충 지레짐작했다.

반역죄로 몰아갈 때 가둬 두는 황성의 서쪽 탑.

근데 그녀가 머물던 황궁에서 매우 멀어 거의 한 시간을 걸어왔다.

“미치겠네, 여기 없으면 그냥 바로 죽으러 간다.”

절뚝거리며 걷다 보니 다리의 감각은 이미 없었다.

탑 입구 앞에는 그곳을 지키는 다수의 기사들이 있었다.

“저기, 데온 필트모어를 보러 왔는데.”

아리아드의 말에 기사 한 명이 놀라서 쳐다보다가 왜 온 건지 알 것 같다는 눈빛을 보냈다.

‘난잡하기로 유명한 아리아드잖아. 뭐 온 거야 또 뻔하지.’

그리 대충 짐작하고는 길을 비켜 주려 했다. 그리고 육감적으로 빠진 그녀의 몸매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언젠가 그녀와 몸을 섞고 싶다는 음흉한 생각을 하면서.

그 더러운 눈길에 소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려 뭐라 말하려다 인내했다.

뭐 어차피 한소희가 받는 시선도 아닌데.

“저 근데, 데온은 뭐 때문에 잡혀 온 거야?”

설마 조슈아가 이미 반역죄로 몰아서 가둬 놨나? 그렇다면 데온을 살릴 길은 없었다.

“황족 폭행죄로 보름 동안 갇혀 계십니다.”

아, 다행이다. 소희는 그 대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슈아는 분명 데온을 이렇게 가둬놓고 시간을 끌어 반역자 명단에 올릴 것이다. 그래도 증거를 조작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 나쁘지 않았다.

“고마워. 들어가 볼게.”

입구에 들어선 소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괜히 이름이 탑이겠냐고. 가파른 계단이 저 위로 끝없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까 낮보다 더 심히 부어있는 다리를 내려 보았다.

“답도 없네. 이 정도면 지금 작품 출간해서 버는 돈보다 몇 배는 더 받아야 돼.”

이를 꽉 물고 욕을 읊조리고는 날카롭게 뻗어 있는 계단을 빙글빙글 올라갔다.

물론 돌로 된 벽에 몸을 거의 기댄 채로.

“…사람 살려.”

찌르는 것 같은 매서운 고통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이내 기사가 쥐여 준 열쇠 꾸러미로, 나무로 된 문을 열었다.

끼익.

녹슨 여닫이가 날카로운 소리를 뱉자,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벽 한 편에 붙어 있는 기다란 테이블 위에는 그가 피다 버린 담배의 흔적들이 쌓여 있었다.

침대에 기대앉아 고개를 숙이고 여전히 담배를 옹송그려 물고 있던 남자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내 그 잿빛 동공이 커다래졌다.

그가 바닥에 담배를 던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아리!”

백구십 센티는 되어 보이는 장신의 남자가 달려와 그녀를 힘껏 안으니, 몸이 밀려 다리가 비틀거렸다.

“으윽.”

고통에 짧게 앓는 소리를 냈지만 기쁨에 젖은 데온은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온 거야?”

“그게 잠시만, 나 지금 너무 아픈….”

환희에 물든 눈동자가 여전히 제 흥에 취해 있었다.

“설마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야?”

크나큰 착각에 빠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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