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6화 (6/120)

Chapter 6

소희는 그냥 기절한 척했다.

가상 세계인데도 왜 이렇게 수치심이 몰려오는 건지.

심지어 넘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스쳤던 켈리의 커다래진 눈은, 놀람과 더불어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지’ 하는 눈빛을 담고 있었다.

일순 그녀의 위로 황후의 비웃음이 짧게 들려왔다.

독자님들, 저 여주 되긴 글러 먹은 것 같습니다. 아리아드는 포기하세요.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나지막이 들려오는 조슈아의 목소리를 듣고도, 치욕스러움에 묻혀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차가운 바닥에 누워만 있었다.

그래, 가라 가. 내가 짜 둔 스토리인데 누굴 원망하겠니. 둘이 지지고 볶고 다 해라.

포기하고 눈을 꽉 감고 있는데.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허리에 와 닿자 소희는 놀라서 몸을 살짝 떨었다. 조슈아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뭐야, 저희가 너랑 나였어?

“어머, 조슈아. 그대로 가려고? 켈리 양 에스코트는 어쩌고.”

아니,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저 망할 황후는 에스코트 타령을 하고 있네.

소희가 짜증이 일어 부들부들 떨었다. 그 위로 단호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정원은 두 분이 가세요. 아리아드는 제가 보살펴 줄 테니.”

소희는 콧구멍을 간질이는 시원한 민트 향을 맡으며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조슈아의 기다란 다리가 유유히 정원을 빠져나와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금빛 문양이 수놓아진 커다란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비단결 같은 이불을 몸 위로 꼼꼼히 올려 주는 손길이 참으로 상냥했다.

“깨어 있는 거 다 알아.”

“헉. 어떻게.”

놀라서 눈을 반짝 뜨자 한심하게 바라보는 변함없는 눈빛이 닿았다.

그의 하얀 셔츠는 소희의 얼굴에 묻혀 있던 스테이크 소스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건 신경도 쓰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부터 닦아 주었다.

쳐다보는 눈초리와 상반되는 그 손길은 또 어찌나 섬세한지 소희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왜 그러는 거야 진짜.”

그는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그냥 켈리랑 가지, 왜 나랑 왔어?”

애초부터 정해진 여주와 남주를 아는 소희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아리아드를 좋아하지도 않고, 이렇게 한심하게 쳐다보면서, 대체 왜?

그에 조슈아의 붉은 눈동자가 무어라 할 말이 많은 느낌으로 일렁댔다.

하지만 금방 그 기세를 가라앉히고는 한마디만 남긴 채 자리를 떴다.

“쉬어.”

뭐야, 저 눈빛은.

소희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임에도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그 속마음을 곰곰이 고민하다가 그냥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에라이, 몰라.

좀 많이 쪽팔리긴 했어도, 모로 가나 기어가나 둘이 같이 있는 상황만 막았으면 됐지.

“붕대 갈아 드리겠습니다.”

시녀가 와서 소스가 묻은 이마의 붕대를 풀었다.

소희는 가만 누워 이제 다음에 해야 될 일을 그렸다.

아, 피임약. 데온의 아이를 갖지 않기 위해서는 사후피임약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이 세계에 피임약이 있나? 난 그런 설정은 넣은 적 없는데.

풀린 붕대 사이로 소희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시녀를 올려다봤다.

“혹시, 여기 피임약도 있나?”

“피임약이요?”

“사후피임약 같은 거.”

“찾아보겠습니다.”

오, 없는 건 아닌가 보네.

소희는 한결 마음이 편해져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 * *

가을 낮의 햇빛 한줄기가 집무실 창을 넘어 조슈아가 쥔 종이 위로 스몄다.

그는 들고 있는 서류들을 차례로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평소와는 다르게 글자들이 잘 읽히지 않아, 읽었던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결국 그 끝에 아리아드의 얼굴이 그려지자,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왜 이렇게 화가 나지.”

약혼 첫 만남의 날, 그 독보적인 화려한 외모에 시선을 뗄 수 없던 것은 인정한다.

정략결혼 이후에도 아리아드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새처럼 옆에 있음에도 가질 수 없는 존재였다.

사교계 속 그의 평판은 그녀로 인해 밑바닥을 찍었다.

아내 하나도 간수 못 하면서 국정을 어찌 돌보냐느니, 밤일을 더럽게 못 하니 아내가 몸을 막 굴리고 다닌다느니, 감히 황태자 앞에선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소문들이 무성하게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평탄하던 제 인생에서 유일한 오점인 그녀를 향한 분노가 들끓었지만 금방 다시 본래의 여유로움을 되찾았다. 심지어는 처음 보는 남자가 좀 잘생겼다 싶으면 몸을 섞는 그녀에게조차 관대해졌다.

그 와중에 마음이 완전히 떠났다.

남은 것이라고는, 혐오감. 왜 저런 여자가 내 옆자리를 차지해서는 일궈 온 명예에 흙을 뿌려 대는 것인지 그저 그것에 대한 감정뿐이었다.

그래,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 데온의 침대에 누워 있는 아리아드를 마주하자 초반에 느꼈던 화기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 속에서 부글부글 들끓었다. 그 후 계속된 알 수 없는 행동은 그 불에 기름을 부었다.

아침에 자신의 입술을 집어삼켰던 그 새빨갛고 선정적인 입술이 떠오르자, 조슈아는 서류를 내팽개치고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그 쓰레기 같은 여자한테 제대로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젠장.”

먹구름이 드리운 그의 집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시녀는 들어와 조슈아에게 보고했다.

“아리아드 님께서 사후피임약을 찾으셨습니다.”

“하.”

허탈함을 뱉은 조슈아가 책상을 쾅 내려쳤다. 온순한 황태자가 처음으로 매서운 기세를 보이자 시녀가 고개를 숙인 채로 몸을 떨었다.

그는 일어나 집무실 문을 나섰다.

그저 들끓는 이 화기를 표출하고 싶은 마음뿐이니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 * *

소희는 이제 현생으로 돌아갈 방법을 궁리 중이었다.

치밀한 조슈아는 화려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철창살을 창문에 달아 그녀가 뛰어내리지 못하게 막았다. 물론 여긴 2층이라 뛰어내려도 골로 가긴 글렀다.

“날카로운 물건도 없고.”

주변을 둘러보니 날카로운 물건만 없다 뿐이겠는가. 그냥 기본적인 가구들만 있을 뿐, 그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이 하나 없었다.

근데 뛰어내리면 뛰어내렸지. 차마 내 손으로 목을 달거나 칼로 찌르긴 힘들 것이다.

“어우, 소름 끼쳐.”

고통이랄 게 현실 세계와 다를 게 없었다.

꿈만 꿔도 소설이 연재된다며 좋아했는데 막상 지금 와서 보니 그냥 막노동이잖아.

“속았네, 속았어.”

중얼거리는 소희의 위로 난데없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사후피임약을 찾았다지.”

“뭐야!”

놀라 벌떡 일어났다가 척추가 아파 와 인상을 찌푸리고 허리를 쿵쿵 쳤다.

아니, 이 망할 시녀. 찾아보겠다더니 그걸 고새 일러바쳐?

“피임약이 뭐 나쁜 건 아니잖아.”

당황스러움에도 도리어 당당히 외치니 조슈아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네가 그걸 왜 먹어야 되는지 생각해 보면 그리 당당히 말할 것도 아니지.”

순한 백설기 같은 얼굴이 흉흉해졌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근데 애초에 마음도 없으면서 왜 저래?

“너 왜 화내? 내가 남자들이랑 관계 맺은 게 뭐 한두 번이야? 피임약 갖고 왜 그러는 거야.”

본질적인 의문에 남자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조슈아도 몰랐다. 여태 괜찮다가도 어제오늘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그 어두운 분위기를 살피다가 소희가 제 목적을 깨닫고 아차, 싶었다.

맞아, 나 얘랑 로맨스 해야 되지. 여주 자리를 아직 꿰찰 수 있는 기회가 있잖아!

“아니, 알겠다. 네가 왜 그러는지.”

“뭐?”

“너 그거 나 좋아해서 그러는 거네.”

소희가 단순히 로맨스 소설에 걸맞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아무렇게나 던진 말에, 조슈아의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헛소리 집어치워. 네가 내 눈앞에서 사지가 찢겨 죽는다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테니까.”

그 험한 말을 뱉은 후에야 마음이 평화로워진 조슈아는 차분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에 아리아드의 흉내를 내는 소희가 낮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거치고는 키스를 너무 찐하게 하던데.”

매혹적으로 접힌 눈가에 시선을 두던 그가, 그 말에 반사적으로 새빨간 입술을 눈에 담았다. 거부할 수 없었던 말랑하고 촉촉한 감촉이 생각나자 조슈아가 제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그저 남자가 여자를 향해 갖는 너저분한 감정이라 여겼다.

그는 더 이상 휘둘리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다정히 웃어 보였다.

“그거 알아? 그거 내 첫 키스야.”

“뭐어?”

사실 여자 경험 아예 없는 남주로 내가 설정해 놨으니 놀랄 일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그 키스가 처음 하는 자의 실력이라니. 역시 내가 쓴 소설 속 등장인물은 다르구먼.

자화자찬하며 뿌듯해하는 소희의 앞으로 잘생긴 용안이 불쑥 다가왔다.

“…뭐야.”

갑작스러운 얼굴 공격에 당황해 뒤로 주춤 물러나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그녀의 뒤통수를 커다란 손이 감쌌다.

왜 이래, 친구야. 화가 나서 이마에 박치기라도 할 셈이니.

두려움에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앞으로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날 자극한 벌이야.”

일순 빠르게 다가온 얼굴에 놀라 소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마 박치기는 무슨.

그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이내 놀라 벌어진 입안으로 혀가 부드럽게 침입했다. 그것은 여린 부위를 섬세하게 쓸고 지나가 머리를 백지장처럼 하얗게 만들었다.

그의 팔뚝은 핏줄이 잔뜩 선 채, 소희의 머리를 꽉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조슈아에게 홀린 듯 얇은 팔로 그 커다란 등을 감싸 안았다.

서로 뒤엉켜 있던 입술이 질척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너 솔직히 말해. 나 싫어하는 거 아니지.”

처음에는 로맨스를 위해 던진 말이었지만, 지금 뱉은 이 말은 소희가 진정 궁금해서 묻는 것이었다.

그에 화답하듯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유려하게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래, 솔직하게 말해 줄게.”

그 핏기 없는 손이 그녀의 입술을 스치듯 쓸고 지나갔다. 스친 부분에서 달듯이 뜨거운 기운이 일었다.

“너에 대한 마음이 성욕만 남았다면?”

소희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게 단순히 그와 한 스킨십 때문인지, 아니면 저 말 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무언지 모를 감정의 파도가 크게 밀려왔다.

커다래진 보랏빛 동공을 조슈아가 찬찬히 훑다가, 이내 거칠게 몰아쉬는 숨결이 다시 아리아드의 하얀 피부 위로 닿았다.

“나랑도 해 줄 거야?”

“…아니, 무슨.”

“왜. 다른 남자들이랑은 잘만 섞으면서 샌님 같은 나랑은 닿기도 싫어?”

이 남자 뒤끝 있는 설정이었던가.

샌님이라는 단어는, 첫 만남 호감을 가진 조슈아에게 아리아드가 들이부은 말이었다.

‘난 너같이 재미없고 고루한 샌님은 싫어. 그러니 결혼을 했더라도 간섭하지 마. 어차피 서로 원해서 한 결혼도 아니잖아.’

그 후 정말 그녀의 말을 따르기라도 하듯, 조슈아는 같은 건물에 살고 있음에도 그 앞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마주한 남자는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짜 놨던 설정과는 너무 다른 방향이잖아.

길게 이어진 침묵 끝에, 그는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아찔한 촉감에 소희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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