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5화 (5/120)

Chapter 5

소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진짜 바위에 머리를 박은 것처럼 아려 오는 뒤통수를 더듬었다.

“와, 무슨 이렇게 현실감 있게 아파? 진짜 개고생이네, 이 짓도.”

역시 쉽게 돈 버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래도 소희는 이번 꿈이 꽤나 마음에 들었기에 싱글벙글 소설 플랫폼을 확인했다.

아니, 근데 이게 무슨 일?

새로 풀린 회차는 있긴 한데 내용이 아리아드 위주가 아니었다. 소설의 절반을 켈리 유레시아, 원래 여주로 설정해 놨던 캐릭터가 차지하고 있었다.

뛰어난 자수 능력을 가진 여주는 황후의 눈에 들어오게 되고, 황후의 자수 선생님으로서 계속해서 황궁으로 들락날락하게 되는데.

짜 놨던 그 부분의 이야기와 가족들에게 구박을 받는 켈리의 심리 묘사가 장황하게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졌네. 댓글 여론 조졌다.”

소희가 마우스에 손을 올려놓고 차마 댓글 창을 누르지 못하다가, 이를 꽉 물고 겨우 클릭했다.

역시는 역시.

[무슨 내용을 쓰고 싶은 건지 모르겠음. 갑자기 흐름 뚝뚝 끊기게 켈리는 왜 집어넣음? 그냥 아리아드 하나로 충분히 재밌게 이야기 풀어 갈 수 있는데 작가가 이상한 욕심 내는 듯.]

[노잼. 하차함 수고요.]

[작가가 감 잃었네. 피폐물 잘 써서 따라왔더니 나도 하차함.]

“아니, 얘들아. 나도 이렇게 쓰고 싶지 않았어.”

소희가 욕으로 뒤덮인 댓글 창을 보며 울먹거렸다.

그 와중에 [데온내꺼하악하악] 님이 쓴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데온 살려…. 데온 남주로 해 줘…. 끌려가지 마….]

“이 댓글을 다 반영하면… 내 소설은 산으로 가려나 바다로 가려나….”

해탈한 듯 조용히 중얼거리는 머릿속에 ‘하차함 수고요’가 둥둥 떠다녔다.

스크롤을 내리니 또 하차한데, 또!

“조용히 하차해 이것들아! 내 마음에 상처 주지 말고!”

소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앞으로 메시지 내용이 모니터 하단에서 올라왔다.

[작가님!^^ 독자가 너무 많이 이탈해서 여주 확실히 바꾸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뒤에 내용 많이 써 두신 거 알아서 마음이 아프지만 수정 진지하게 고려해 주세요^^]

“네, 저도 수정하려고 했거든요.”

얼마나 이번 화 기깔 나게 만들었다면서 좋아했는데. 다들 내가 머리에 피가 철철 흐르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소설을 만들어 나가는 걸 알면 이렇게 쉽게 말 못 할 거야.

소희는 답답함에 병나발을 불었다.

“어떻게 해야 아리아드가 여주가 될 수 있는 건데?”

모니터 앞에 놓인 소설 내용을 찬찬히 읽으면서 고민했다.

켈리가 혼자 불쑥 튀어나와 소설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 기이한 현상을 뭐라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소설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제멋대로!

소희는 다음 편 내용을 대충 예상했다.

켈리 유레시아는 황궁에 왔다가 조슈아를 만날 것이고, 둘의 사랑이 싹트는 계기가 거기서 만들어진다.

“일단 막아야 될 거는.”

둘이 만나면 안 되지!

* * *

“아주 가지가지 하네.”

눈을 떴을 때 조슈아가 냉담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희가 있는 곳은 금빛 문양으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커다란 침대 위였다.

“그렇게 한심하게 쳐다보지 말아 줄래. 나 안 그래도 지금 심신 미약이거든?”

쿠크다스인 멘탈은 갈리고 갈려 남아나질 않는데, 조각상같이 잘생긴 남정네가 하찮다는 듯 쳐다보니 심장 부근이 더 저릿저릿했다.

“심신 미약인 건 말 안 해도 충분히 알겠고. 너 당분간 여기 건물 밖으로 못 나갈 줄 알아.”

“안 돼! 난 해야 할 일이 있어!”

일방적인 통보에 경악하며 소리를 내질러도 조슈아는 여전히 무심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 또 죽으려고 하겠지.”

“그런 게 아니야.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나의 생계가 걸린!”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 옆에 놓인 음식이나 먹어.”

조슈아는 그대로 뒤돌아 나가려고 했다.

그를 붙잡으려고 일어나려 했다가,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고통에 신음을 뱉었다.

“아악!”

제대로 제 꼴을 살펴보니 두 발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고, 한쪽 팔도 칭칭 감겨 있고, 이마 위에도 칭칭.

소설 속에서 나가려고 한두 번 더 시도했다가는, 피라미드에 있는 미라 뺨치는 모습이 될 것 같았다.

그 고통 어린 비명에 조슈아가 다시 뒤돌았다. 그리고 잔잔하던 얼굴이 설핏 구겨졌다.

“왜 그래.”

새하얀 백설기 같은 얼굴을 마주 보며 고민했다.

내가 이 중환자 같은 몰골로 어떻게 하면 너와 켈리 유레시아의 만남을 막을 수 있겠니.

그래, 일단 당장은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있자.

“조슈아, 진짜 염치없는 부탁인 거 아는데. 음식 좀 먹여 주면 안 돼?”

“진짜 염치없네.”

“그래, 나도 안다고. 근데 내가 왼손잡이인데 왼손에 붕대가 감겨 있네? 밥을 어떻게 먹지?”

“너 오른손잡이인 거 다 알아.”

“와, 나한테 생각보다 관심이 많았구나! 근데 방금 든 생각인데 굶어서 죽는 방법이 있었네! 그런 기발한 방법이!”

“하.”

조슈아가 어이없어하며 칠흑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침대 옆에 놓인 원목 의자에 거칠게 앉았다. 이내 숟가락을 들고 정말 수프를 먹여 줄 것처럼 다가왔다.

소희는 로맨스 소설에 걸맞는 장면이 만들어진 것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입을 벌렸다.

근데 웬걸.

“저하, 황후마마께서 지금 점심 식사를 같이하자고 청하셨습니다.”

일순 소희는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갑작스레 들이닥친 시녀를 노려봤다.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분이 있다고 꼭 나와 달라 하셨습니다.”

그녀는 그 주인공이 누군지 알 것 같아 불안감에 콧구멍을 벌렁댔다.

황후는 매일 밤 남자들을 갈아 치우며 몸을 섞는 아리아드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곱고 참한 켈리 유레시아와 재혼하길 바랐다.

그러니 그녀의 예상대로라면 그 주인공은.

“안 돼.”

난데없는 단호한 어투에 조슈아와 시녀가 동시에 그녀를 돌아봤다.

“갈 거면 같이 가. 같이 갈지, 가지 말지, 선택지는 그거 두 개뿐이야.”

하나 남은 멀쩡한 오른팔로 조슈아의 두꺼운 팔목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그가 정말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어제 만났을 때부터 마치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이 여자는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조슈아가 너무 바르기만 해서 재미없다며 대화도 하기 싫다던 여자가, 갑작스레 관심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면 착각인가?

또 원래의 아리아드였다면 겉모습은 한껏 우아함으로 변장하여 고고한 척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제 앞에 놓인 여자는.

“조슈아, 왜 대답이 없어! 빨리 나만 두고 가지 않겠다고 말해!”

우아함과는 거리가 매우 멀어 보였다.

* * *

“아리아드, 어쩌다가 그렇게 됐니.”

“아, 계단에서 굴렀어요.”

황후의 물음에 대충 둘러대는 아리아드를 보며, 진실을 아는 조슈아는 더 첨언하지 않고 혀만 쯧 찼다.

그는 결국 소희의 바짓가랑이 잡기 스킬에 당해 그녀를 안고 오찬에 나왔다.

온몸에 붕대가 둘러져 있는 꼴을 보며 황후가 입을 뗐다.

“그런 몰골로 나올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

그녀의 등장을 반갑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네, 저도 이런 몸으로 나오고 싶진 않았어요. 다음 달 월세 내려면 전업 작가는 일해야 되거든요? 먹고살기 위해 그런 거니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지 말아 주세요.

소희가 뱉고 싶은 말을 꾹 눌러 담고 조슈아와 켈리의 분위기를 살폈다. 황후가 살벌한 눈빛을 보내는 와중에도 로맨스가 꽃폈다.

“이거 거리가 멀어 보여서. 덜어 드릴게요.”

수줍게 웃으며 켈리가 조슈아의 앞 접시에 양고기를 잘라 올려 주었다. 그에 심각해진 소희가 제 옆에 있는 남자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조슈아는 그냥 그 자상한 설정에 맞게 상냥히 웃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만인에게 친절한 조슈아가, 냉담하게 독설을 퍼붓는 경우는 오로지 아리아드와 데온을 마주할 때뿐이다. 그러니 친절한 저 모습이 아직까지 켈리에게 마음이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

“켈리 유레시아 영애, 저도 멀어요.”

“…네?”

핑크빛 기류가 흐르려는 틈에 불쑥 튀어나온 소희의 목소리가 재를 뿌렸다.

“저도 양고기 먹고 싶어요.”

칭얼거리는 말투에 켈리가 당황해 허둥거리며 양고기를 잘라 건네주었다.

그래, 너희 둘의 로맨스가 꽃 피지 못하게 집요하게 끼어들어 주겠어.

황후가 소희의 얼굴을 흘기다가, 다시 방긋 웃으며 켈리의 칭찬을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켈리는 던마크 제국의 언어도 할 수 있다지? 어쩜 그렇게 유식한지.”

“혼자 그냥 책을 보고 배운 거라 사람들 앞에서 말을 꺼내기도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어머, 겸손하기까지.”

황후는 켈리의 찐팬이었다. 고운 언사와 흐트러짐 없는 몸짓에 감격하며 박수를 쳤다.

“누가 좀 보고 배웠으면 좋겠네.”

저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소희가 입술을 삐죽거리다 양고기를 우걱우걱 씹었다.

그리고 앞에 앉은 켈리의 외양을 살폈다.

뽀얀 피부 위로 어여쁘게 홍조가 진 발그스레한 뺨, 순하게 생긴 동그란 눈, 그 안에 청량감 느껴지는 사파이어 보석 같은 눈동자와 햇살에 신비하게 반짝이는 금발 머리까지.

와씨, 내가 여주라고 너무 힘 빡 주고 청순하게 설정해 놨잖아.

쭉쭉빵빵하고 섹시한 분위기인 아리아드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리아드를 혐오하는 조슈아는 그래서 순한 외양의 켈리에게 끌리게 된다.

“아, 전부터 가 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는데. 여기보다 조금 더 큰 정원이 있다고 들었어요. 밥 먹고 구경해 볼 수 있을까요?”

해사하게 웃으며 사근사근히 말을 건네는 켈리를 보고 소희는 혼절할 것 같았다.

야, 내가 봐도 반할 것 같은데. 아리아드가 어떻게 여주가 되냐? 망했다, 망했어.

“어머, 그럼 당연하지.”

켈리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동의해 줄 것 같은 황후가 바로 말을 이었다가, 식사를 다 하고 앉아 있는 제 아들을 쓱 훑었다.

어째 좀 불안하다.

“조슈아, 네가 안내해 주지 않겠니?”

“저도 같이 가고 싶은데요.”

소희가 불쑥 끼어들자 황후가 단호히 내쳤다.

“아니, 너는 식사를 다 하지도 않았고 몸이 불편하잖아. 내가 보살펴 줄 테니 얌전히 밥이나 먹으렴.”

와씨, 조졌다. 이대로 이렇게 여주가 확정이 되는 거니?

조슈아가 아무 대답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켈리가 설레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안 돼!”

소희가 절규를 하며 같이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상 입은 두 발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비틀거리며 급히 테이블 모서리를 움켜잡으려 했으나, 미끄러진 손은 접시를 잡고 말았다.

그에 접시 위에 놓여 있던 스테이크가 허공에서 비행을 했다.

쿵.

그녀가 기다란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고 뒤로 철퍼덕 넘어졌다. 푹신하게 깔린 잔디 덕에 큰 고통은 면했으나, 쾌청한 푸른 하늘이 시야 안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공중 부양 하던 스테이크는 아리아드의 얼굴 위로 얌전히 착지했다. 달콤한 스테이크 소스가 얼굴을 뒤덮었다.

“어머.”

그 감탄사 이후, 모두 말을 잇지 못하고 대자로 뻗은 소희를 내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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