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렇게 쉽게 이혼하기 싫어졌어.”
갑자기 등장한 조슈아의 앞으로 데온이 그를 한 대 칠 것처럼 다가섰다. 붉은 눈동자와 회색 눈동자가 서로를 찢어 죽일 듯 마주했다.
“찌질하게 굴지 말고 꺼져. 아리는 내 거야.”
“그 찌질한 소유욕을 가진 게 누군데. 풀어놓고는 옆에 둘 수 없을 거 같으니 묶어 두는 모양새가 추잡하고 형편없어.”
“하, 너는 뭐 아리와 진정한 사랑을 한 것처럼 말한다? 결혼했어도 삼 년 동안 아이도 없는 주제에.”
“그건 내가 아리아드한테 그리 큰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였고.”
날카로운 대화를 나누다가 끊긴 틈에, 조슈아의 적안이 소희를 내려 봤다.
“어제부로 관심이 생겼어. 난 이 여자를 옆에 두고 밑바닥까지 끌어 내려야겠거든.”
애증에서 사랑은 빠지고 증오만 남은 눈빛이었다. 웃고 있음에도 붉은 눈동자가 불타는 듯 활활 타올랐다.
그래, 아리아드가 워낙 여기저기 몸을 굴리고 다니는 쓰레기 같은 설정이라 황태자인 조슈아의 평판도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증오할 만하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소희의 위로 조슈아가 칼을 빼 들었다.
“뭐 하는 거야, 이 새끼가!”
위협적으로 다가서는 데온을 쳐다보지도 않고 조슈아는 제 할 일을 했다. 그는 쇠사슬을 칼로 끊어 버렸다. 그리고 다리를 다쳐 못 움직이는 그녀를 안아 올리려고 했다.
퍽.
일순 커다란 타격음과 함께, 조슈아의 몸이 비틀거렸다.
데온이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린 것이다. 조슈아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 내며 픽 웃었다.
“짐승 같기는. 데온, 너는 정말 아둔해. 황족 몸에 상처를 입힌 건 내 조만간 벌하지.”
“하! 너무 무서워서 몸이 바들바들 떨리네요, 황태자님!”
데온이 천장을 꿰뚫을 듯 흉흉한 기세로 빈정거렸다.
그 난장판 속 중간에 앉아 있는 소희는 혼자 만족스러움에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좋아 좋아, 이렇게 자극적으로 가자고!
“아리아드의 남편은 나야. 아리아드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
“이혼 서류까지 던져 준 마당에 남편? 지랄하고 있네.”
“말했잖아. 마음이 바뀌었다고.”
서로 첨예하게 눈을 맞추고 있던 가운데, 조슈아가 고개를 돌려 소희를 응시했다. 적안을 담은 눈가가 불안하리만큼 어여쁘게 접혔다.
“난 아리아드를 묶어 놓고 옆에 둘 거야.”
“엥?”
가만히 듣고 있던 소희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불쑥 끼어들었다.
“묶어 두지는 말지? 자유는 굉장히 소중하고 중대한 인간의 기본 권리라고!”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그의 고개가 다시 데온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처참히 짓밟아 줄 거야.”
“정신 나간 새끼. 나보고는 묶어 두는 모양새가 추잡하고 형편없다고 지랄할 때는 언제고.”
데온이 그 발밑으로 침을 퉤 뱉었다. 조슈아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그에 맞섰다.
“너처럼 사랑 구걸하겠다는 게 아니야. 난 가둬 두고 말라 비틀려 죽을 때까지 갖고 있을 거야.”
소희는 그 날카로운 기세에 헛웃음이 나왔다. 어째, 이 소설 남주랑 로맨스는 가능한 건지 불안해졌다.
데온은 조슈아를 무시했다. 절대 보내 줄 수 없다는 제 단호한 의지를 보여 주듯,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쇠사슬로 다시 소희를 묶으려고 했다.
“아니, 잠시만!!!”
난데없이 꽥 지르는 소리에 그제야 그 둘의 시선이 소희를 향했다.
“묶어 두진 말자. 부탁이야.”
재밌는 스토리를 만들어 가려면 묶여 있으면 안 된단 말이야.
그러나 그 말에 대한 대꾸는 없었다. 조슈아도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노끈을 들고 데온을 거세게 밀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비키는 게 좋을 거야.”
“너야말로 비켜, 이 샌님 새끼야.”
“그렇게 험악하게 나오면 나도 무력을 쓸 수밖에 없어.”
“아이고, 뭐 얼마나 대단한 무력인지 궁금하네요.”
사나운 대화 속에 소희 혼자 외롭게 소리쳤다.
“저기, 얘들아! 재밌고 다 좋은데 묶지는 말자니까?”
멀대같이 큰 키 사이로 밤톨만 한 그녀가 고독한 싸움을 이어 갔다.
“얘들아! 내 말 안 들리니? 혹시 나 투명인간 됐니? 얘들아?”
와, 끝까지 아무도 대꾸를 안 한다. 너무하네, 진짜.
“들어와.”
그 와중에 조슈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황실 직계 기사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하. 그 대단한 무력이 이거였어요, 황태자님?”
빈정거리는 데온의 말투에 대꾸하지 않고 조슈아가 여유롭게 입을 뗐다.
“데온 필트모어를 재판부로 압송해.”
데온은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 기사들에게 둘러싸여서 매섭게 주먹질을 하다가 결국 붙잡혀 끌려 나갔다.
그래도 하룻밤 뜨겁게 보냈는데 저렇게 보내 주자니 좀 아쉽긴 한 조연이라 소희가 안타까움에 젖은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뭐, 어차피 죽이려고 하긴 했지만.
쩝. 입맛을 다시던 소희가 의식의 흐름을 따라 든 생각에 일순 눈이 커다래졌다.
헉, 맞아. 아리아드는 데온과 하룻밤을 보내서 아이를 갖게 되는 설정이었잖아!
놀라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소희의 앞으로 조슈아는 가까워졌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의 팔에 노끈을 단단히 묶었다. 그걸 신경 쓸 여력도 없이 소희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만약, 설정상 그대로 데온의 아이를 갖게 되면 아리아드는 결코 조슈아와 로맨스라는 걸 할 수 없다.
조슈아를 피해 도망친다고 하면 그저 조연으로 남거나, 조슈아의 옆에 남는다면 목이 썰려 성 앞에 장식되거나. 결과야 뻔했다.
하지만 독자님들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잖아!
“이럼 안 돼! 나는 여주가 되어야 한다고!”
또다시 혼잣말을 하는 그녀를 보며 조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가 제정신 아니라는 걸 들어서 알아. 어제 뛰어내리는 걸 보니 그 뻔뻔한 아리아드가 멀쩡하지 않다는 건 알겠더군.”
“아니야, 난 멀쩡해.”
이 소설 속 남자들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는 스킬이 패시브로 있는 것 같았다. 조슈아는 소희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 다리도, 네 정신도 멀쩡해질 때까지 내가 보살펴 줄게.”
뭐지, 이 달콤한 멘트는. 설마 나 주연으로 승격된 거니?
소희가 내심 기대하며 눈망울을 말똥말똥 빛냈다.
조슈아는 그런 그녀를 안아 올렸다. 이어지는 말은 그 기대를 저 지하로 뚝 떨어트릴 만큼 차가웠다.
“그리고 멀쩡해진 널 내가 다시 고장 낼 거야. 아무것도 온전치 못하게.”
그가 아리아드를 사랑하는 일 따위는 없어 보였다.
* * *
덜컹덜컹.
마차는 황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희는 여전히 조슈아의 품에 안긴 채였다. 또다시 자살 시도를 할 것 같아서 안고 가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그의 몸에서 풍기는 민트 향이 계속 소희를 자극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시원한 체취는 소설 속에 제대로 반영되어 취향을 저격했다.
“아리아드. 제발 변태 같은 짓 좀 그만둬.”
킁카킁카. 열심히 향을 맡던 소희가 그제야 뻘쭘해 하며 고개를 들었다.
너무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있었나 보다.
“쩝. 아쉬워라.”
“뭐?”
“아닙니다.”
소희가 민망함에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녀를 조슈아가 벌레 보듯 쳐다봤다.
“근데 굳이 이렇게 안겨서 갈 필요가 있을까? 그냥 자리에 앉혀 주면 되잖아.”
그에 조슈아의 입가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달콤히 대꾸했다.
“아리아드, 허튼수작 부리지 마.”
역시, 로맨스 따윈 없다.
팔도 이렇게 묶어 두고 다리는 다쳐서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다고!
뚱한 표정으로 있던 소희는 앞으로 전개해 나가야 할 스토리에 머리가 복잡했다.
첫 번째, 일단은 아리아드가 여주가 되려면 요놈과의 로맨스가 있어야 했고. 두 번째, 현실로 돌아가려면 또 나는 죽을 정도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앞서 조슈아와 데온이 격렬하게 싸웠으니까 이쯤 현실로 돌아가면 딱 재밌는 한 편이 완성될 거 같은데.
마차에서 뛰어내릴까.
힘차게 달리고 있어 굵은 나무 기둥들이 빠르게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제 허리를 꽉 잡고 있는 핏줄이 올라온 조슈아의 팔을 내려 봤다.
“어떻게 하지.”
중얼거리는 그녀에게로 조슈아의 적안이 옮겨 왔다. 그 무심한 눈동자와 마주하자 소희는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씩 웃었다.
아리아드의 섹시한 캐릭터를 이용하는 거야. 그러면 로맨스도 잡고, 현실로도 돌아가고.
“조슈아.”
갑작스러운 찐득한 목소리에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새까만 머리카락을 아리아드의 얇고 기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쓸었다.
“뭐 하자는 거야.”
“나한테 이런 마음이 있는 줄 몰랐어. 이렇게 해서라도 갖고 싶었던 거지? 사실은 날 좋아하잖아.”
그 고혹적인 눈매가 유혹하듯 천천히 깜빡이자, 조슈아는 얼굴을 잔뜩 구기며 화를 냈다.
“똑똑히 들어, 아리아드.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다른 남자들은 네 발밑에서 굴렀나 본데. 내가 너에게 남은 건 혐오감밖에 없어.”
오우, 생각보다 기세가 너무 매서운걸. 여기서 로맨스를 어떻게 끌어내지.
소희가 아리아드의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며 고민하다가 가까운 곳에 놓인 조슈아의 입술에서 시선을 멈췄다.
아, 몰라. 그냥 키스 갈겨!
“뭐, 뭐 하는.”
불쑥 얼굴을 들이민 탓에 조슈아가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뒤는 벽이요, 앞은 아리아드의 입술이로다.
소희는 체리를 머금은 듯 예쁘게 자리 잡은 입술만 바라보며 돌진했다. 그리고 고민 않고 그 입술을 집어삼켰다.
당황한 남자의 눈시울이 설핏 떨리며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아귀 힘이 서서히 약해졌다.
달콤한 입술이 닿자 험한 말을 내뱉던 입이 자동적으로 열리고 뜨거운 혀가 서로를 향해 뒤엉켰다. 그리고 그렇게 진득하게 마주하고 있던 입술은 달달한 향만 남긴 채 얼마 안 가 떨어져 나갔다.
“좋아, 조슈아. 네 마음 잘 확인했어.”
“…뭐?”
“혐오감만 남았다더니, 나랑 하는 키스는 좋은가 보지?”
아리아드가 낮게 웃자 조슈아가 얼굴을 붉히며 젖어 있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소희는 허리를 감싸고 있던 단단한 팔이 떨어져 나갔음을 확인하고 속으로 좋아라 했다.
“조슈아, 근데 어째. 내 계획에는 네 옆에 묶여서 말라비틀어지는 결말은 없는걸.”
소희가 붕대를 감은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물론 고통은 매우 심했지만 애써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차의 문을 향해 그대로 몸을 날렸다.
이대로 굴러떨어져서 큰 돌을 맞고 현실로 가게 해 주세요.
“아리아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낙엽이 내려앉은 길목을 울리고, 소희는 잠시 허공에 날아올랐다가 제 계획대로 길가에 놓인 바위에 착륙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뜨거운 선혈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시야가 점차 흐려졌다.
그 사이로 소희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 이번 스토리 기깔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