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저항 없이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그 손힘이 옅어졌다.
소희가 자유를 찾은 목을 부여잡고 몰려오는 공기에 컥컥거렸다. 그리고 고통이 좀 잦아들자 고개를 번쩍 들고 도리어 되물었다.
“뭐야! 왜 날 안 죽여?”
“…뭐?”
“죽이고 싶어 했잖아! 원래 죽일 거였잖아! 빨리 죽이란 말이야!”
생생한 꿈이 너무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좋은 소재고 뭐고, 글을 써야 할 것도 태산이어서 빨리 깨고 싶었다.
“내가 진정 널 죽이길 바라?”
그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든 걸 자신이 계획한 대로 살아온 설정의 남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매우 당황한 채였다.
“여기서 아리아드는 죽어야 돼. 그게 맞아.”
정말 제정신 아닌 사람처럼 보일 삼인칭을 쓰며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조슈아의 만면에는 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 넌 진짜 끝까지 이기적이구나.”
“맞아. 내가 배려심이 넘치는 편은 아니지.”
“쓰레기인 건 알았지만 끝까지 참 지독해. 아리아드 피어슨, 너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졌어.”
“좋아, 이제 죽이면 되겠다.”
끝까지 죽음을 입에 담는 그녀를 보며 조슈아가 실소를 하였다.
그리고 그 적안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며 반짝이다가, 다시 본래의 온화한 가면을 되찾고 싱긋 웃어 보였다.
“아니, 아리아드. 넌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어째서?”
소희의 얼굴이 안타까움에 일그러졌다.
여기서 안 죽으면 내 꿈은 대체 언제 끝나니? 묶여 있어서 떨어져 죽을 수도 없고.
“아리아드, 넌 아주 오래 살 게 될 거야.”
“아니, 그런 스토리는 짜 놓은 적 없어. 아리아드가 빨리 죽어야.”
“아니.”
그 담담한 어투를 조슈아가 냉정히 끊었다.
아니, 이 새끼들은 왜 자꾸 사람 말을 끊어.
그 고운 미성을 들으며 소희가 애써 짜증을 눌러 담았다.
“기나긴 인생,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게 해 줄게. 네가 만나는 남자들도 하나하나 바닥을 기게 만들 거야. 매킨리 황실의 이름을 걸고. 또, 나 조슈아의 모든 걸 걸고.”
“와, 그러면 새로운 스토리를 다시 짜야겠는걸? 골치 아프겠어.”
조용히 중얼거리는 말은 노기 어린 기세에 묻혔다. 조슈아는 웃고 있었지만 그 주변으로 매서운 물결은 계속됐다.
“내가 처음으로 손볼 남자는 데온이 되겠군. 기대해도 좋아.”
그렇게 말하며 뒤도는 조슈아를 보고 소희가 황급히 그 두꺼운 팔목을 잡았다. 그러나 그가 거칠게 쳐 내, 매서운 손길에 닿은 손이 아릿했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그래! 다 좋으니까 이 쇠사슬이라도 풀어 줘!”
“뭐?”
다행히 조슈아가 뒤돌았다.
“다 좋아. 복수하고 아리아드와 몸을 섞은 남자들은 바닥을 기고. 다 너무 훌륭한 스토리야. 다만 가기 전에 이 쇠사슬만.”
소희가 불쌍한 눈망울을 만들어 보이며 묶여 있는 손을 그의 시선 앞에 갖다 댔다.
“옆에 차고 있는 칼로 이것 좀 끊어 줘.”
“내가 왜?”
조슈아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내려 봤다.
이어 아리아드의 어여쁜 눈에 눈물이 조금씩 차오르더니 매혹적으로 깜빡였다. 고운 이슬이 도르르 떨어지자, 조슈아가 일순 말을 잃고 그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부탁이야.”
청초하고 가녀린 목소리였다.
사실 실상은 즙을 짜내느라 애쓰는 소희의 필사적인 연기였지만. 그 가여운 연기는 다행히도, 첫 만남에 잠시 혹했던 조슈아의 마음에 작은 불이라도 지핀 모양이다.
“하.”
짧게 헛웃음을 뱉은 그가 칼을 꺼내 들었다.
소희는 계획대로 돼 즐거워 씰룩이는 입가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검이 매섭게 사선을 그렸다. 순간 제 몸을 베는 건 아닌가 고민했던 게 우습게도, 손에 묶여 있던 쇠사슬이 쉬이 떨어져 나갔다.
“오 분 지났어.”
때마침 데온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다시 자신을 묶을세라 소희가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격한 움직임에 조슈아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그리고 방 안에 입장한 데온도 끊어진 쇠사슬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데온은 침대 위에 선 그녀를 잡으려고 황급히 뛰어왔다.
하지만 무섭게 뒤쫓는 추격이 우습게도 소희의 발걸음은 그보다 더 날렵했다. 후다닥 달려 창가 앞에 설 수 있게 된 소희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와, 이번 꿈은 꽤 험악했어. 역시 목이 졸리는 것보다야 떨어져서 한 방에 죽는 게 편한 거 같아.”
“아리!”
데온이 고함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목소리는 시폰 커튼을 흔드는 바람결을 타고 창밖을 넘었다.
조슈아는 놀라서 입도 떼지 못하고 돌아오라며 손을 뻗었다. 상식을 뛰어넘는 아리아드의 행동 덕에 그 핏빛 눈망울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에 소희는 그저 말간 미소와 함께 짤막한 인사만 남기고 사라졌다.
“안녕!”
* * *
눈을 뜨자, 다시 책상에 엎드린 채였다.
자꾸 이렇게 글을 쓰다가 대충 자서 가위눌리듯 깨기 힘든 꿈을 꾸나?
뻐근한 어깨를 돌리다가 소희가 모니터에 떠 있는 메신저 속 한 문장을 읽고 멈춰 섰다.
소설 담당자가 보낸 메시지였다.
[와! 소희 작가님! 이번 화 대박대박.]
“이번 화? 왜 또 그래, 무섭게….”
그 메시지를 클릭해서 내용 전문을 읽었다.
[지난 화와는 다르게 반응 대박 좋은데요? 저번 댓글이 욕설로 뒤덮여 있어서 살짝 걱정했는데 역시! 작가님은 천재야!^^]
뭐지, 이 묘한 익숙함은.
턱을 괴고 고민에 빠져 있던 그녀가 황급히 소설 플랫폼을 들어갔다.
“헐.”
한 시간 전, 유료 연재 회차가 풀려 있었다.
클릭해서 들어가 보니 놀랍게도 자신이 꿨던 꿈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은, 자신이 계속해서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닌 것처럼 떠들어 대던 이야기들은 모두 생략되었다. 얼렁뚱땅 꿈 이야기는 꽤 그럴듯한 피폐물로 변모한 채였다.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어.”
누가 지금 깜짝 카메라 찍니?
헛웃음을 뱉으며 두려운 마음으로 댓글 창을 열었다. 놀랍게도 피디님의 말처럼 긍정적인 여론이 주를 이뤘다.
[여주 안 나와도 될 듯. 조연이 미쳐서 난리 피우는 거 존잼.]
[자살시도 했지만 살아나겠지? 그냥 아리아드랑 다 이어주세요. 역하렘 가자.]
[여주이야기 별로 안 궁금해짐. 아리아드 여주 시켜줘라.]
전반적인 댓글을 다 읽은 소희가 흥분해서 콧구멍을 벌렁댔다.
“아, 안 돼! 여주 켈리 유레시아도 겁나 착하고 예쁘단 말이야. 아직 안 보여 준 사연과 매력이 잔뜩 있단 말이야. 아리아드는 그냥 몸 막 굴리다가 죽는 조연1이라고. 안 돼!”
이내 진정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내가 몇십만 자를 적어 놨는데, 여주를 없애래. 이씨. 절대 안 돼.”
읊조리는 말에는 소설을 쓰느라 몇백 시간을 갈아 넣은 소설가의 울분이 담겨 있었다.
모니터 위로 담당자의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작가님^^ 혹시 댓글 반응 보셨나요? 수정 가능할까요?]
“허어어엉.”
소희가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여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웹소설가의 비애였다.
“그래, 돈을 벌려면 해야지. 슈퍼 을인 내가 뭘 어쩌겠니.”
다시 고개를 들어 한글 창을 키고 다음 편을 수정하려다가.
“근데 내가 글을 쓰는 게 의미가 있는 거야?”
문득 본질적인 의문이 들었다.
꿈을 꾸는데, 그 꿈 내용이 내 손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플랫폼에 연재된다. 결국 두 번이나 써 놨던 내용을 올릴 수 없었다.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설정은 다 똑같다만, 주어진 배경에서 심지어 그냥 다들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이걸 누구한테 고민 상담을 하냐.”
집에서 글만 써서 미쳤다고 정신 병원을 추천받기에 딱 좋은 고민 내용이었다.
이내 소희의 시선이 모니터 옆에 놓인 수면제로 향했다. 그걸 바라보는 그녀의 뇌 회로가 갑작스레 단순해졌다.
“생각해 보니 개꿀인데?”
고생해서 시놉을 짜지 않아도, 글을 쓰지 않아도, 잠만 자도 알아서 연재가 되고.
나는 돈을 벌고. 이게 바로 일석이조.
“와, 나 진짜 천잰가 봐.”
소희가 껄껄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능력인진 모르겠다만, 또다시 꿈을 꿨는데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냥 평생 놀고먹어도 된다는 소리였다.
“개꿀!”
소리를 내지르며 앞에 놓인 수면제를 물도 없이 삼켰다.
“빨리 자자. 또 엄청난 스토리를 만들어 낼 거야, 내가.”
침대에 편히 누워 캭캭거리며 웃고 있던 소희는 이내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내리고 기쁘게 어둠을 맞이했다.
* * *
“아리아드.”
눈을 떴을 때, 데온이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헉, 성공이다. 또 소설 속 내용이 이어지고 있어.
소희가 덩실덩실 내적 댄스를 췄다. 그 앞으로 아련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가 문제야. 내가 정말 싫어서 그래? 우리 사이 좋았잖아. 왜 그러는지 말이라도 해 줘.”
아리아드가 쓰러져 있는 동안 홀로 삭였던 고뇌 덕에, 그의 만면에는 깊은 어둠이 드리웠다. 안 그래도 사나워 보이는 조각 같은 얼굴이 한층 더 날이 서 있었다.
“아니야, 아리. 너의 대답은 필요 없어. 네가 싫다 해도 널 옆에 잡아 둘 거야.”
아련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변모했다. 또라이 조연에 걸맞게 그 눈동자에 광기가 서려 일렁였다.
이야기를 이제 어떻게 재밌게 풀어 가지. 고민하던 소희가 다시 제 손목에 감겨 있는 쇠사슬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일단 아리아드가 여주가 되어야 했으니 조슈아의 마음을 다시 돌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데온의 품에서 벗어나야 했는데.
“저기, 나 이제 진짜 뛰어내리지 않을게. 이거 좀 풀어 주겠니?”
아리아드 답지 않은 다정한 어투에 데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눈빛으로 보아하니 절대 제 말대로 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두 번이나 뛰어내린 너를 내가 어떻게 믿어. 저번에는 나무에라도 걸렸지. 이번에는 정말 큰 일 날 뻔했어, 아리. 두 다리가 다 부러져 반신불수가 될 뻔했다고.”
그 말에 발로 시선을 옮기니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다.
오 마이 갓. 기깔 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또 침대 신으로 이어진다고? 3화 내내?
“말도 안 돼. 내 소설이 이렇게 루즈해질 순 없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아리아드를 보며 데온이 눈을 꽉 감고 한숨을 쉬었다. 나의 아리아드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다며.
“아리, 일단 여기서 한 달 정도 쉬다가 회복이 되면 풀어 줄게.”
“한 달이라니. 그건 너무 길어.”
“한시라도 빨리 내 옆을 벗어나고 싶은 거야?”
“그런 게 아니라 아리아드가 여주가 되려면 조슈아를 만나야 되는데….”
조슈아, 그 단어가 귓가에 와 닿자 데온이 발작 버튼이 눌린 사람처럼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절대 안 돼!”
“아이씨,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 거대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고압적으로 짓눌렀다.
“이혼 서류를 가져다줄 테니까 거기다가 사인을 하고, 그 새끼랑 영영 연을 끊어 버려.”
오우, 그렇다면 우리는 곧 죽을 텐데.
섹시해서 코피가 팡 터지게 생긴 데온의 외형을 훑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네가 이렇게 빨리 죽기엔 아까워.
몸을 보며 침을 흘리는 소희를 내버려 두고 데온이 벌떡 일어났다. 이혼 서류를 챙기러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벌컥 문이 열렸다. 반갑지 않은 인물의 등장에 데온이 얼굴을 잔뜩 구겼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렇게 쉽게 이혼하기 싫어졌어.”
검은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조슈아가 느른한 미소를 지은 채 입장했다. 최상위 포식자답게 여유롭지만 위압감이 느껴지는 걸음걸이였다.
나이스 타이밍!
소희가 흥미진진한 전개에 내적 환호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