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하루 종일 소설을 고치고 꾸벅꾸벅 조는 틈으로.
“아리.”
꿈속에는 또다시 데온 필트모어가 등장했다. 그는 잿빛 눈동자를 험악하게 빛내며 무섭게 소희를 내려 봤다.
“뛰어내릴 정도로 그렇게 내가 싫었어?”
꿈이 이어진다. 뭐야, 이거 불길하게.
왜 또 꿈속에서 아리아드로 나오는 건지, 반복해서 나올 정도로 그리 애정이 있는 캐릭터도 아니었는데 조금 황당했다.
“싫었던 게 아니라 꿈에서 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
앞뒤 맥락 다 잘라먹고 대충 뱉는 설명에 그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너는 삼 일을 꼬박 누워 있었어.”
“삼 일?”
“그래, 그 사이에 조슈아가 왔다 갔지.”
와, 아무리 꿈이라지만 꽤 흥미진진했다. 좋은 소재거리라며, 이대로 꿈을 좀 진정성 있게 진행시킨 다음에 소설에 반영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작가다운 생각을 했다.
샘솟는 아이디어로 환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데온의 낯빛이 전보다 더 어두워졌다.
“조슈아의 이름만 들어도 좋다는 거야?”
아무래도 큰 착각이 있는 듯하다.
“아니, 조슈아 때문에 웃은 거 아니야.”
“그럼 뭐 때문에 웃은 건데.”
“그냥 재밌는 일이 생각났어.”
“거짓말.”
데온이 이를 아드득 물었다.
눈빛이 흉흉해 금방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듯했다. 아무리 말해도 질투에 휩싸인 데온은 제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휴, 소희가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나려다가 제 팔을 감싸고 있는 물건에 눈이 동그래졌다.
쇠사슬이 두 팔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엥? 이건 뭐야.”
쇠사슬을 풀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철컹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노기 서린 목소리가 쏟아졌다.
“아리아드, 넌 내 거야.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또다시 허튼수작 부리면 이걸로 끝나지 않을 거야.”
“와, 데온. 네가 아무리 집착남 설정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야. 당장 풀어!”
아니, 이러면 소재거리를 찾으러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꿈에서 깨려고 죽지도 못하잖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도 데온은 그에 대해 묻지 않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뜨거운 숨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난 조슈아한테 너와 몸을 섞었다고 말했어.”
“뭐어?”
뭘 그걸 그렇게 대놓고. 죽는 날짜를 빠르게 당기고 싶어서 발악을 하는 거야 뭐야.
“조슈아가 뭐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가져다주겠다고 했어.”
“그렇게 순순히?”
얼떨떨한 대답에 데온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서 픽 웃었다.
“그는 너한테 그리 큰 애정이 없어. 아리, 널 진정 사랑하는 건 나 하나야.”
집착이 진득하게 묻은 말에 대답하지 않고 소희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조슈아가 그렇게 순순히 놓아주는 설정이 아니었는데?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 애정이 있었던 건 물론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를 가진 거에 얼마나 화가 났으면 굳이 힘들여서 큰 두 가문을 멸족시키겠냐고.
아니, 뭐 개꿈이니까 이렇게 진행될 수도 있겠다 싶어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그래, 데온. 날 진정 사랑하는 건 너 하나야. 그 마음 충분히 알아.”
“정말 알아?”
“당연하지.”
달래려고 차분히 뱉은 대꾸에 점점 데온의 흉흉한 눈빛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데온, 나도 널 사랑해. 나에게 남은 진정한 사랑도 너 하나야.”
연애 한 번 안 해 봤지만 소설 써 본 짬밥으로 달콤히 말을 이어 갔다. 그에 화답하듯 데온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좋아, 이제 내 진심을 다 알았으니 이 쇠사슬 좀 풀어 주지 않겠어?”
소희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 앞으로 날 선 얼굴을 붙이고 다가선 남자가, 그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맞춰 왔다.
냉한 그의 분위기와는 상이하게 달콤한 설탕 향이 입술에서 감돌았다.
“아리, 그건 안 될 것 같아.”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억지로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어째서?”
“내가 이 편지를 읽어 버렸거든.”
그는 입고 있던 재킷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펼쳐 보인 종이 안에는 낯선 필체로 적힌 글이 있었다.
아, 물론 내용은 익숙했다. 내가 짠 스토리니까.
[나의 꽃 아리아드 피어슨 영애. 당신과 보낸 밤을 매일 같이 떠올리고 있어요. 그대가 너무 그립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 당신을 볼 수 있을까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휴온 칼리우드에게서 온 편지였다.
물론 소설 속 아리아드는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편지를 읽고 누가 보낸 건지조차 알지 못한다. 몸을 섞은 남자들이 너무너무 많다는 설정이었으니까.
아니, 근데 이 꿈은 왜 이렇게 스토리가 쓸데없이 촘촘한 거야?
데온의 눈에는 다시 화기가 들끓고 있었다.
“이걸 읽어 버렸는데 내가 널 어떻게 놔줘?”
“오해야. 누군지도 잘 몰라.”
“하, 아리. 그 말이 더 화나는 거 알아?”
“생각해 보니 그렇겠네. 근데 이렇게 묶어 둔다고 바뀌는 건 없걸랑?”
태평한 소희의 말에 데온이 앉아 있던 그녀의 몸을 거칠게 밀었다. 그에 몸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 결국 눕혀졌다.
“바뀌는 게 왜 없어. 아무도 못 만나고 이렇게 영원히 묶여 있는 거지.”
“데온, 그러면 그럴수록 너한테 불리해.”
“어째서.”
잿빛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그녀가 짜낸 설정이긴 했지만, 저 눈동자는 사람을 급속도로 위축시킬 만큼 무서웠다.
하지만 나 한소희, 이 소설의 창조신은 이따위에 겁먹지 않지.
“왜냐하면 나한테 밉보일수록 너의 분량은 적어지고, 죽는 날짜는 빨라질 거야. 알겠니?”
“아리, 전부터 자꾸 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
일순 데온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나왔다. 염려하는 듯 그의 손이 이마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아냐, 난 아픈 게 아니야.”
“네가 창문에서 뛰어내렸을 때부터 이상하다 여겼어. 아니, 그 전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할 때부터.”
“멀쩡하다니까?”
“아니야. 넌 확실히 이상해. 그래서 내가 오늘 의원을 불렀어. 점심때 일단 만나 보자.”
“아니, 아니라고! 아니라고!”
꿈속인데도 왜 이렇게 억울한 건데.
소희가 소리를 내질렀다.
“나 제정신이야!”
데온은 그녀의 말을 경청할 생각이 없었다. 진정 제정신이 아니라 믿는 듯 그 눈빛이 안타까움에 젖어 갔다.
* * *
“어, 그러니까. 신체는 전체적으로 건강하신데.”
작고 동그란 안경을 쓴 남성이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그녀의 겉모습을 다시 훑었다. 의원직을 단 남성의 시선이 손목에 채워진 쇠사슬로 고정됐다.
“제가 보기엔 묶여 계셔서 좀 미쳐 가시는 게 아닐까.”
“그렇습니다. 정확하십니다.”
얼마 전까지 제정신이라고 소리 지르던 소희가 의원의 말에 감탄하며 박수를 짝짝짝 쳤다.
“당장 이 야만적인 짓을 멈추라고 말씀해 주십쇼.”
“어….”
의원이 데온의 사나운 눈빛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못마땅해하며 팔짱을 낀 채로 입을 뗐다.
“틀렸어, 영감.”
“네?”
“미쳐 있기에 묶어 둔 거야.”
“웜마.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 대화 사이로 소희가 탄식을 자아냈다.
“내가 말 안 했던가. 자살 시도를 했다고.”
“아. 맞죠 맞죠. 잠시 잊고 있었네요.”
의원은 그냥 무서운 낯을 한 데온의 말이라면 뭐든 옳다고 할 기세였다. 이럴 거면 의원을 부른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소희가 헛웃음을 뱉었다.
“자살 시도는 심히 우울해야 가능한 것인데. 원래부터 큰 걱정거리가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그걸 좀 해결하고자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약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아뇨, 저 우울하지도 않고 걱정거리도 없고 너무 멀쩡한데?”
데온의 매서운 기세에 눌려 벌벌 떨던 의원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그러자 그가 화들짝 놀라 그녀의 손을 빠르게 뿌리쳤다.
“절대! 안정!”
난데없이 고함을 내지르는 것에 소희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의원이 급히 자리를 뜨자, 열린 문틈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 들어왔다.
“시끄럽네. 무슨 일이 있나 봐?”
다정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위압감이 느껴지는 남자.
검은색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 핏빛 눈동자, 그 유려한 콧날의 굴곡을 따라 내려가면 체리를 입에 머금은 듯 어여쁘게 빛나는 새빨간 입술.
소희가 쓴 전형적인 클리셰 범벅 남주였다.
“조슈아, 네가 여긴 또 무슨 일이야.”
데온의 흉흉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조슈아가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가까이 다가섰다.
와, 얘도 겁나 잘생겼네. 이 꿈, 영원해도 괜찮을 것 같아.
소희가 제 처지를 잠시 잊고 남주의 실물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위로 상냥한 목소리가 자리했다.
“이혼 서류를 주겠다고 했잖아.”
그에 데온이 매서운 기세를 조금 가라앉혔다.
“두고 꺼져.”
“가기 전에 잠시 아리아드와 둘이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냥 꺼져.”
경계심이 진득한 단호한 어투에, 조슈아가 서류 봉투를 탁자에 내려놓았다가 다시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렸다.
“협조해 주지 않으면 이걸 주는 일도 없겠지.”
“하, 조슈아. 그건 그냥 뺏으면 될 일이지.”
“오 분이면 돼.”
그 짧은 시간도 아리아드와 둘이 두는 것이 싫다는 듯 데온이 거칠게 다가섰다. 그리고 팔을 뻗어 서류를 뺏으려고 했으나, 조슈아가 손의 방향을 금방 틀어 버렸다.
“마지막까지 너희 둘은 참 유치하게 구는구나.”
적안을 담은 눈가가 곱게 접혔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 유치해져 볼게. 데온, 매킨리 황실의 이름으로 명하지. 당장 방 밖으로 나가.”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시며 단호한 어투가 이어졌다.
오, 카리스마 미쳐. 내가 이런 멋진 남주를 썼다니.
쓴 글이 눈앞에서 실체화되어 움직이니 소희는 그저 신기해서 동그래진 눈으로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하.”
실소를 뱉은 데온은 황태자의 명에 거역하지 못하고 테이블을 쾅 치고 돌아섰다. 그리고 이내 방문이 닫혔다.
드라마 한 편을 보듯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소희의 앞으로 조슈아가 걸어왔다. 그는 한쪽 무릎을 굽혀 침대에 앉아 있는 소희와 눈을 맞췄다. 겁나 잘생긴 용안이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아리아드 피어슨. 넌 황후가 되고 싶어 했으나, 결국 그 더러운 몸뚱이에 못 이겨 네 복을 걷어차는구나.”
역시나. 해사한 얼굴에 다정한 목소리와는 상이하게 내용은 매서웠다.
그의 적안이 팔목을 묶어 둔 쇠사슬로 향했다. 뒤이어 조슈아가 픽 웃었다.
“남자들과 몸을 섞으며 얻은 결과가 겨우 그거니?”
“이건 스토리에 없던 건데. 데온이 워낙 미친 새끼라.”
조용히 읊조리는 말을 그가 뚝 끊었다.
“난 몇 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며 너에게 많은 걸 바란 적 없었어. 다른 남자를 만나도 그저 내 이름에 먹칠만 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지.”
“그래, 네 마음 다 알아.”
“아니, 아리아드. 내 마음을 알면 넌 이런 식으로 굴면 안 돼.”
상냥히 웃던 그가 일순 무서운 기세로 다가섰다.
“처음 만났던 날, 잠시라도 너의 화려한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겼던 내가 너무 한심하고 가여워.”
“어, 뭐라 해 줄 말이 없네. 미안하다.”
소희는 화기를 뿜어내는 저 고운 얼굴에 진정 해 줄 말이 없었다. 내가 아리아드는 아니잖아?
그 가볍고 짧은 성의 없는 사과에 조슈아의 커다란 손이 목을 조를 듯 가까워졌다.
오, 이렇게 죽어도 꿈에서 깰 테니 나쁘지 않겠어.
손힘이 점차 강해지자, 얼굴 위로 벌겋게 피가 쏠렸으나 소희는 저항 없이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시야가 흐릿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