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하얀 벽으로 감싸인 공간.
다이아몬드 승급전의 무대다.
팟! 파팟!
빛이 번쩍이고, 다른 플레이어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동양인 하나에 남미계 둘, 그리고 아프리카계 한 명.
“저 사람. 유진호 아니야?”
“프랑스의 방패를 꺾었다던!”
“방패는 무슨. 인류의 배반자다.”
“와! 팬이에요! 여기 갑주에 싸인 좀 해 주세요!”
같이 참여한 플레이어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왜 홀로 승급전을 치르느냐?
“이번 승급전은 최대 5인으로 진행해.”
다이아몬드 등급에 오르지 못한 길드원은 나를 포함해서 6명이다.
어떤 차원과 승급전에서 마주치는지.
무작위로 진행되는 매칭이라 알 수 없다.
“남은 애들 밀어 넣고 나 혼자 뛰는 게 나아.”
-네 수하들을 걱정하는 게냐?
“걱정은 무슨. 확률로 접근하는 거지.”
닉스가 풋, 하고 웃었다.
이 양반은 갑자기 왜 웃는 거람.
[몇몇 성좌가 당신의 시험에 관심을 드러냅니다.]
[성좌들이 영성을 소모하여 승급전에 간섭하고자 합니다.]
[유진호 플레이어와 지혜의 탐구자 간에 맺은 계약이 확인됩니다. 성좌의 간섭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서, 성좌의 개입?”
“유진호 플레이어는 스케일부터가 다르구나.”
“근데 난이도가 올라가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건데?”
승급전에서 한 팀이 된 플레이어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전달 사항을 읽었다.
그러고 보니 오래간만이군.
50층대에서 연신 고배를 마신 후로는 성좌들이 개입하길 꺼려했는데 말이야.
-기대되는구나.
“누구는 앞에 고생길이 펼쳐져 있고만.”
-그 고난을 자처한 건 바로 그대가 아니더냐.
제길.
닉스가 던진 묵직한 팩트에 대꾸할 말을 잃었다.
-본디 영웅이란 고난을 극복하며 강해지는 법이란다.
“편하게 가면 좋잖아. 편하게.”
[다이아몬드 승급전의 대상이 정해졌습니다.]
[지구 vs 드라켄 아일랜드]
[5대5로 대결을 벌입니다. 최후의 승자가 속한 팀이 승리합니다.]
쳇.
편하기는 틀려먹었군.
-차원 명이 특이하구나.
“드래곤들이 제 종족 이름을 따서 지은 세계니까.”
-호오. 이스메니오스와 닮은 아이들이더냐?
“뭐, 비슷할걸. 직접 비교해 봐.”
닉스의 눈에서 흥미가 동했다.
잠시 후.
대기시간이 종료되자 맞은편에서 환한 빛이 연달아 솟구쳤다.
* * *
레드 드래곤 칼니어스.
갓 해츨링(드래곤 유체)을 지나 성룡이 된 드래곤은 쭉 찢어진 동공으로 적을 훑었다.
“카흐흐. 성좌들이 말한 게 저 필멸자들인가.”
15미터에 달하는 신장.
붉은 비늘이 강한 마력에 뒤덮여서 번들거린다.
이마에는 날카로운 두 뿔이 솟아나 있고.
등 뒤에는 피막으로 뒤덮인 날개 4장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브레스 한 번이면 모두 쓸어버릴 수 있겠군.”
“뭇별 위에 이름을 새긴 존재가 엄중히 경고한 자들이다. 마음을 너무 놓지 마라.”
블랙 드래곤 제라미스가 태클을 걸었다.
칼니어스와 마찬가지로 성룡이 된 지 얼마 안 된 드래곤.
해츨링을 벗어나야 비로소 탑에 입장할 수 있기에, 이번 승급전에 참여하는 드래곤들은 모두 비슷한 연령대였다.
레드, 블랙, 화이트, 블루, 그리고 그린.
섬광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용들은 흉포한 눈동자로 경쟁 상대를 바라봤다.
『성스러운 샘물의 수호자가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성스러운 샘물의 수호자는 방심했다간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드라콘 이스메니우스.
아레스의 아들이자 올림포스의 용신, 그리고 용아병의 주인은 성룡들에게 경고했다.
이번 미션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성좌는 제우스다.
늘 진호의 활약상에 고배를 마신 게 얼마나 억울했는지, 이스메니우스를 통해 탑과 연결된 차원에서 가장 강력한 종족을 시련 대상으로 골랐다.
60층대 미션에서 낮은 성적을 거두는 인류.
드래곤과 매칭을 하려면 어마어마한 영성을 소모해야 했다.
『성스러운 샘물의 수호자는 많은 별빛이 이번 싸움을 지켜보고 있음을 명심하라고 합니다.』
“큼. 위대한 성좌들이 고작 필멸자 하나를 이렇게 주목하다니.”
레드 드래곤 칼니어스가 분통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수한 성좌들의 시선이 이 장소에 쏟아진다.
이스메니우스의 경고가 없었어도 알 수 있는 사실.
신왕급 성좌들과 S급 성좌만 수십이요.
그 아래로는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성좌가 진호를 바라보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신력을 타고나는 용족.
그런 이들마저 진호만큼 성좌들의 관심을 받진 못했다.
“박살을 내주자.”
“저 건방진 필멸자에게 죽음을!”
“성좌들은 우리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
드래곤들은 살기를 피워 올렸다.
쿠르르릉!
살기만으로 요동치는 공간.
무공으로 치면 살기만으로 누군가를 해하는 경지, ‘심검’과 흡사했다.
타고난 신력으로 초절정 무인보다 더 강력한 의념을 퍼트리는 종족.
그게 바로 드래곤이다.
“첫 번째는 나다.”
레드 드래곤 칼니어스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반대편에서 나온 인간.
남미 출신 플레이어는 전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제1라운드를 시작합니다.]
두 종족을 가르는 초록색 장벽이 사라지는 순간.
“필멸자. 그대로 죽어라.”
칼니어스의 살의가 ‘단어’에 실리고.
드래곤 하트에 담긴 마나와 신력이 그 언어가 현실로 이루어지게끔 작용했다.
파워 워드 킬.
5성을 넘어선 마법.
성좌가 내려주는 ‘가호’에 가까운 궁극 마법이다.
가슴팍을 부여잡는 플레이어.
두 눈을 부릅뜬 채 뭐라고 뻐끔거리더니,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카흐흐흐. 이 정도인가? 약해 빠졌군!”
두 번째 대전 상대는 초록색 막이 거둬지자마자 재빠르게 돌진, 칼니어스와 거리를 좁혔다.
파워 워드 킬을 전개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움직임.
[다중 연산]
[파이어 볼 x 32]
빗발치는 화염구가 정면으로 달려드는 플레이어를 집어삼켰다.
연달아 울려 퍼지는 폭음.
검은 연기가 걷힌 후에는 새카맣게 타버린 플레이어의 사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상대도 시시했다.
처음부터 비장의 수단을 펼쳤지만 칼니어스의 비늘에 흠집도 못 냈다.
“고작 이딴 종족을 상대하려고 이렇게 긴장했나.”
콰지지직!
두꺼운 꼬리가 플레이어를 강타했다.
붉은 비늘 위에 아른거리는 기류.
오러를 두른 채 휘두르니 인류 측 플레이어가 일격에 사망했다.
“남은 건 하나뿐이다.”
크르르르.
칼니어스는 낮게 짖으면서 상대를 노려보았다.
진호.
이스메니우스가 경고했던 플레이어이자, 무수한 성좌들의 관심을 받는 초특급 루키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힘을 보여준 것은 맨 뒤에서 기다리는 진호를 의식해서였다.
“하암.”
입을 크게 벌린 채, 하품을 하며 나오는 진호.
칼니어스의 눈동자 위로 진노의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필멸자. 후회하게 될 것이다.”
“말 많네. 곧 뒈질 놈이.”
“보호막을 믿고 까부는 모양이다만 그것도 끝이다.”
[제5라운드를 시작합니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칼니어스의 아가리가 크게 벌어졌다.
목구멍에 아른거리는 화염.
“여기서 브레스를 쓰다니. 상대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군.”
“시시하니 빨리 끝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흥. 성좌들의 관심을 받는 자라고 해서 기대했건만.”
동료 드래곤들은 칼니어스의 동작을 보자마자 의도까지 맞췄다.
브레스.
용족 최강의 스킬이다.
체내의 마나를 속성력으로 전환.
대기 중의 공기와 섞으면서 일거에 쏟아 낸다.
막대한 마나를 소모하는 만큼 출력량이 어마어마했으며.
정령만큼이나 해당 속성에 친숙한 드래곤의 마력인 만큼 브레스에 실린 힘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그 어떤 불 속성 마법보다도 강력한 화염의 숨결이 진호를 휘감는다.
“끝이다. 필멸자.”
칼니어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과연 그럴까?”
촤아악!
미증유의 힘이 그의 브레스를 반으로 베기 전까지는.
* * *
뚝, 뚝.
이마에 맺힌 땀이 바닥에 떨어진다.
“건식 사우나에 온 기분이야.”
후끈거리는 공기.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를 정면으로 받아 내니 피부가 화끈거렸다.
딱 거기까지지만.
진룡장갑은 화염의 정수가 담긴 숨결을 완벽하게 막아 냈다.
-브레스에 담긴 힘이 제법 대단해 보인다만.
“용족한테는 위력이 반감돼.”
이야.
레서 드레이크의 정수를 포식하지 않았으면 조금 귀찮았을지도 모르겠다.
승급전 상대로 드래곤이 매칭될 거라고는 예상 못 했거든.
진룡장갑 위에 암흑 투기를 두르니, 같은 ‘용족’이라는 개념으로 억누른 브레스의 파괴력을 완전히 막아 낼 수 있었다.
유일한 단점 하나는 뜨거워진 열기에 땀이 배출되었다는 것 정도?
[백수제왕무 - 13초식]
[황룡아를 사용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한줄기 섬광.
레드 드래곤이 전력으로 펼친 브레스가 반으로 갈라지고.
놈에게 향하는 길이 열렸다.
진한 살기로 번들거리던 눈동자 위로 다른 감정이 떠올랐다.
당혹감.
급격한 상황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굳어 버린 것이다.
“이래서 도마뱀 새끼들은 안 돼요.”
자기들이 패배할 거라고 생각을 안 하거든.
방심을 하다가 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황룡아로 낸 길을 질주.
레드 드래곤에게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한발 늦게 내 접근을 알아챈 드래곤이 앞발을 휘두른다.
손톱에 맺힌 오러.
태산조차 가를 만한 파괴력이 실려 있지만, 안 맞으면 그만이다.
엄청난 신체 능력과 마나 양 덕분에 강할 뿐.
레드 드래곤의 움직임에는 어떤 무학도, 깨달음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단순한 폭력의 연장선.
진리안으로 힘의 궤적을 파악.
비익대붕장을 펼쳐서 레드 드래곤의 손을 흘렸다.
훤히 드러난 놈의 가슴팍.
[백수제왕무 - 18초식]
[기린살을 사용합니다.]
쭉 뻗은 두 팔.
뇌전의 기운이 섞인 내공이 창대의 역할을 맡은 팔을 휘감는다.
손끝으로 레드 드래곤의 심장이 있는 위치를 가격하는 순간.
콰르르릉!
기린의 뇌전을 담아낸 창격이 심장을 꿰뚫어 버렸다.
휘둥그레진 드래곤의 눈동자.
처음에는 의혹의 감정이 떠올랐고.
그다음으로는 불신.
마지막에 떠오른 건 경악이었다.
쿵- 심장이 파괴된 레드 드래곤은 더 움직이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다음.”
난 손가락을 까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