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나는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욕망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건 낡은 향로.
-그 불길한 것을 왜 꺼내느냐?
“스텟 좀 채우려고.”
들불의 화로.
악 계열 성좌들의 모임, [트릭스터]에서 배포한 반쪽짜리 성유물이다.
마약 카르텔을 소탕하면서 얻은 아이템.
“이때 아니면 언제 쓰겠어?”
망설이지 않고 욕망의 주머니를 크게 벌렸다.
들불의 화로 아래로 우수수 떨어지는 아이템들.
녹색 불길이 치솟으면서 최소 억 단위인 물건들을 가루로 만든다.
순식간에 100억 가까운 돈이 잿더미로 변했다.
제길.
속이 쓰리지만 확실하게 승부수를 띄우려면 어쩔 수 없지.
[들불의 화로에 제물을 바쳤습니다.]
[사용자의 육체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냉혈이 여러 성좌의 가호와 사념을 감지합니다. 힘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사용자의 의지가 혼탁해질 수 있습니다.]
정신 간섭에 곧장 반응하는 냉혈.
들불의 화로가 정상적인 성유물이 아니라는 것쯤, 이미 알고 있었다.
악 계열 성좌들이 혼란을 부추기려고 내려 준 성유물.
전생에는 들불의 화로 때문에 온갖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내가 목숨 걸고 저걸 회수한 이유가 있다고.
성좌들의 의념은 배제하고 화로에 녹여 낸 ‘힘’만 극야의 힘에 투자했다.
[극야 스텟이 512 상승합니다.]
[지속시간은 127초입니다.]
-투자에 비해 아쉬운 성능이로구나.
“2분이면 충분해.”
준비한 수단은 하나가 끝이 아니거든.
[데모닉 파워를 사용합니다.]
[모든 능력치를 극야로 치환합니다.]
[어둠의 육체를 사용합니다.]
아공간에서 전투를 벌인 지도 한나절 이상 지나갔다.
데모닉 파워의 쿨타임도 돌아왔겠다.
밤의 어둠과 동화된 육체.
“여신님.”
-후훗, 저항하지 말고 여에게 모든 것을 맡기어라.
악마도 아니고 말씀하시는 게 좀 그렇다?
내 극야와 동화된 닉스.
이전에도 느꼈던 전능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밤을 관장하는 여신.
닉스의 ‘격’은 내 이해를 아득히 초월했다.
회귀 전, 내 전투력으로는 S급 성좌와도 일전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강했지만.
신왕보다도 한 수 위인 밤의 여신의 진정한 힘에는 미치지 못했다.
『아직도 숨겨 둔 잔재주가 있었나?』
“호오. 여를 배알하는 영광을 주었건만, 교만함에 눈이 멀었구나.”
내 의지를 벗어나서 멋대로 들썩이는 입술.
목소리도 성별을 알기 힘든 중성적인 음색으로 변했다.
『영광 같은 소리. 천박하게 떠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게를 잡는가!』
스톰블링거가 허공을 가른다.
폭풍처럼 몰려드는 막대한 에너지.
바람의 마나에 오러 블레이드를 섞은 파괴의 물결이다.
“어리석은지고.”
닉스는 오른손을 가볍게 들었다.
기품 있는 손동작.
극야의 힘은 여신의 의지에 따라 스톰블링거가 발생시킨 마력 폭풍에 비견되는 기세로 솟구쳤다.
르네 데이비스의 공격이 폭풍이라면 닉스의 극야는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해일을 연상시킨다.
재배열 과정 없이 의지만을 반영한 힘.
『크크, 누가 어리석은지는 결과가 말해 줄 것이다.』
“이번에는 옳은 말을 하는구나.”
밤의 어둠이 오러 블레이드 폭풍과 충돌했다.
촤아아아!
잘게 쪼개진 르네의 마나가 극야의 힘을 난도질한다.
『그 보잘것없는 어둠으로 뭘 할 수 있지?』
닉스는 하아, 짧게 한숨을 내뱉더니 손가락을 까딱였다.
쉴 새 없이 베이고 잘려 나가도.
극야의 힘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르네의 마력을 삼켰다.
『이건 어떠냐!』
응집된 마나가 거인의 몸 여기저기에 맺힌다.
[파이어 필러&파이어 볼텍스]
[융합기공]
[크림슨 레이 x 32]
즉시 발동형 스킬에 방출을 엮어 낸 광선 타입 공격.
시야를 빨갛게 물들이는 광선들도 밤의 어둠을 걷어 내지는 못했다.
모든 것을 품는 극야.
데모닉 파워로 모든 스텟을 돌리고, 들불의 화로까지 사용해서 강화한 극야는 르네의 총 마력 양을 넘어섰다.
제 꾀에 역으로 넘어간 셈이군.
『내가 출력에서 밀린다고!?』
“더 반항하지 말고 어둠에 몸을 맡기어라.”
『웃기지 마라. 나는 프랑스의 방패, 그리고 하랍 세라펠의 나무다. 고작 평범한 플레이어 따위에게 밀릴 것 같으냐!』
르네 데이비스의 말과 다르게, 어둠은 차근차근 전진하면서 놈에게로 다가갔다.
융합기공으로 빚어낸 스킬을 발악적으로 사용했지만 헛수고.
극야의 힘이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난타전을 벌일 게 아니라 몸을 온존해서 출력 싸움을 끌어야 했……!』
들썩이던 르네의 입이 멈췄다.
“이제야 알았?”
『네놈, 여기까지 계산했단 말이냐!』
“처음부터 끝까지.”
그래.
세세한 건 달라도.
클리포트의 나무가 구현한 아공간이 어떤 곳인지.
르네 데이비스가 어떤 전투 스타일인지도 모두 숙지했다.
“내 손바닥 안에 있었다는 거다.”
『유진호오오오!』
르네의 원망 섞인 포효가 극야의 해일에 집어삼켜졌다.
* * *
[데모닉 파워의 지속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원래대로 돌아온 스텟.
닉스는 곧바로 동화를 해제했다.
-으읏, 이 감각은 언제 느껴도 기분이 나쁘구나.
“고마워. 다 여신님 덕분이야.”
-여의 도움이 없으면 언제나 1인분 몫을 하려는지.
쯧, 하고 닉스가 혀를 찼다.
여신님의 전력도 계산에 포함했다고 말하면 화내겠지?
나는 웃음을 삼키고는 르네의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두 눈을 부릅뜬 르네.
전투 내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게 꽤나 억울한 모양이다.
나라고 해서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오는 게 쉬운 건 아니었으니까 눈 좀 감아라.
[하랍 세라펠의 나무(르네 데이비스)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 100%]
[정수 등급 : 전설]
[스킬 - 융합기공이 추가됩니다.]
[융합기공]
등급 : ★★★★★
분류 : 액티브
사용자의 보유 스킬을 융합기공에 등록하거나 전개 후 융합한다.
융합 지정 가능한 스킬은 최대 15개다.
*융합 스킬 - 0/15
*24시간마다 1번 융합 지정 가능.
르네 데이비스의 정수를 포식하면서 완전해진 융합기공.
저장할 수 있는 개수가 세 배로 늘어났고.
쿨타임도 24시간으로 줄어들었다.
거기에 방출한 스킬들을 섞는 것도 가능해졌으니.
이클립스도 비슷한 효과를 지녔지만, 융합처럼 응용력이 높지는 않다.
증폭 면만 놓고 보면 이클립스가 한 수 위지만 말이야.
-일장일단이 있다는 말이로구나.
“장 · 단점을 따질 의미는 없어.”
융합기공은 르네 데이비스를 군주까지 오르게 한 일등공신이다.
그걸 손에 넣다니.
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꾹 눌렀다.
회귀 전에는 세례를 받지 않아서 놈의 사체를 포식하는 건 불가능했다.
르네가 세례를 받아 ‘괴물’ 판정으로 변한 것 또한 과거로 돌아온 영향이겠지.
놈을 쓰러트리고 얻은 건 정수만이 아니었다.
[수리야의 눈물]
등급 : 초월
분류 : 목걸이
내구도 : 721/1,000
태양신이 흘렸다는 눈물입니다. 사용자의 육체를 보호해 주며 조화와 관련된 힘을 증폭시켜줍니다.
*육체에 간섭하는 디버프 스킬 완전 무효.
*스킬의 연계 효과 20% 증가.
[츠쿠요미의 숨결]
등급 : 초월
분류 : 반지
내구도 : 593/700
달의 여신의 기운이 담긴 반지입니다. 사용자의 정신을 보호해 주며 조화와 관련된 힘을 증폭시켜줍니다.
*정신공격 완전 무효.
*스킬의 연계 효과 20% 증가.
태양과 달.
두 성좌가 속한 사회는 달라도, 기원이 비슷해서 그런지 옵션이 매우 비슷했다.
-스텟 증가가 없는데 등급이 초월이라. 좀 아리송하구나.
“두 개를 끼면 디버프에 완전 면역 효과가 생기잖아.”
괜히 초월 등급이 아닌 셈.
거기에 스킬끼리 연계하면 효과도 20% 증가시켜준다.
중복 착용하면 모두 40%!
반지와 목걸이라서 착용 부위도 겹치지 않는다.
르네 데이비스 녀석.
초월씩이나 되는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그거지?
“이젠 모두 제 겁니다.”
히죽거리면서 가루를 털어내고는 바로 착용했다.
무기나 방어구를 쓰지 않으니 아티팩트 욕심이 거의 없지만, 이번에는 예외다.
융합기공도 손에 넣었겠다.
그게 아니어도 스킬끼리의 연계라면 포식과도 궁합이 잘 맞는 옵션이다.
쓸 만한 아이템이 더 있나 뒤져봤지만 전투 중에 모두 산산조각 나버려서 수확이 더 없었다.
-한데 그리 여유를 부려도 되느냐?
닉스가 위를 가리켰다.
유리창이 깨진 것처럼 큰 균열이 새겨진 하늘.
이 공간의 주체인 [에펠탑]이 부서지면서 붕괴를 시작했다.
“가만두면 원래대로 돌아가.”
난 팔짱을 낀 채 아공간이 무너지기를 기다렸다.
쩌어엉!
큰 이명과 함께 강한 빛이 눈을 덮쳤다.
얼마 정도 있었을까.
명멸했던 시야가 원래대로 복구되었고 귀를 괴롭히던 이명도 사라졌다.
-돌아왔구나.
검게 타버린 나무 꼭대기. 르네와 마주했던 공간이다.
아래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꽤 오래 머문 것 같다만. 이곳은 아직도 정리가 안 되었구나.
“아공간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까.”
-호오, 시간도 격리된 공간이라.
“바깥에서는 1시간도 안 흘렀을걸.”
닉스와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클리포트의 나무에 올라탄 추종자들이 나를 발견했다.
“저자는 유진호가 아닌가!”
“르네 님께서는 어떻게 된 거지?!”
“나무의 가호가 사라지고 있다.”
“설마, 르네 님이 패배하신 건가?”
“헛소리 마라! 그분이 일개 플레이어에게 질 리 없잖나!”
르네의 패배를 부정하는 클리포트 추종자와 아르메 루즈 플레이어 집단.
말과 다르게 클리포트의 나무는 생기를 급격하게 잃어갔다.
“스승님! 역시 믿고 있었어요!”
“흥, 모름지기 내 사부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미스터 유.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어.”
나는 일행을 둘러보았다.
중 · 경상자가 꽤 있지만 용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특히 탱킹과 딜 모두 관여한 엘렌과 무공 사용자들은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엉망이었다.
“나머지 놈들은 빠르게 정리하자.”
-여도 가세하겠느니라.
“조금만 쉬어 둬. 호문쿨루스의 육체도 망가졌잖아.”
닉스는 이미 많은 것을 해 주었다.
후욱, 길게 심호흡하면서 몸에 남은 피로감을 떨쳐 냈다.
“너희들도 대장 곁으로 보내 주마.”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류의 배반자들은 죽어서 정수를 남긴다.
자.
네놈들은 어떤 정수를 줄 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