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하얗게 물든 세계.
에펠탑의 철골이 녹아내리고.
르네 데이비스가 펼친 마법들도 모조리 빛에 삼켜졌다.
-해치웠느냐?
이 여신님이.
지영이한테 못된 것만 배웠네.
“그런 말 하면…….”
두근- 두근-!
육감의 경고가 울리자마자 제 자리에서 벗어났다.
[블링크를 사용합니다.]
[공간 왜곡이 감지됩니다. 이동 위치가 변경됩니다.]
직후, 보라색 기둥이 내가 서 있었던 지역을 강타했다.
닭살이 피부를 뒤덮는다.
압도적인 출력.
솔라 익스플로전과 아발란체의 반발력을 극대화시킨 공격조차 모조리 지워 낸 공격이다.
르네의 마력이 공간 이동에 개입.
이동 좌표가 조금 틀어져서 공격을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보라색 광선의 여파가 전신을 두들겼지만 폭마기로 상쇄시켰다.
“여신님이 그런 말을 안 했으면 쉽게 끝났을 텐데.”
-후훗, 반대로 생각해 보아라. 여의 경고가 아니었으면 피하지 못했을 터.
“예예.”
난 대충 흘려들었다.
매캐한 연기가 걷히고, 소멸의 빛에 노출된 에펠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4 가량이 녹아버린 철골.
중간 부위는 부러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고.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던 양팔(?)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 이외에 융합기공을 다룰 줄 아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 위에 올라탄 르네 데이비스는 멀쩡했지만.
“폭발 직전에 에펠탑으로 몸을 방어했군.”
“예. 당신의 수법을 흉내 내봤지요.”
들켜 버렸군.
정확히는 융합기공에 의한 폭발이 아니라 [이클립스]로 반발력을 극대화시키는 거지만.
내가 즉발형 주문 두 개를 엮어 내면서 생긴 틈을 노린 것처럼.
르네도 반발력이 극대화되기 직전의 짧은 순간을 노려서 에펠탑으로 전신을 보호했다.
굳이 따지고 보면 솔라 익스플로전도 융합기공으로 만들어 낸 스킬이니, 부정하지 않았다.
“아쉽게 되었습니다. 날 쓰러트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치다니.”
“유일?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축지를 사용합니다.]
[공간 왜곡을 감지합니다. 축지의 효과로 무효화합니다.]
얽혀드는 기운을 축지의 공능으로 무시.
에펠탑 괴물 가까이로 이동했다.
-호오, 거리를 벌릴 땐 언제고 다시 접근하는구나.
“저 괴물에게도 나름의 패턴이 있거든.”
-패턴?
“재생하는 동안 움직이지 않아.”
몇 번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확신했다.
에펠탑 괴물은 공 · 수 전환이 자유롭지 않다.
마치 스위치를 On / Off 하듯이 공격 중에는 회복을 할 수 없고.
반대로 손상된 몸뚱이를 복구할 때에는 육체를 움직일 수 없다.
공수 전환에 들어가는 시간은 약 1초.
그 정도면 충분하다.
“용케도 그걸 파악했군요.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습니다.”
[인페르노&라이트닝 샤워]
[융합기공]
[라이트닝 인페르노]
붉은 번개가 시야를 가득 메운다.
전방위로 번개에 화염을 부여해서 총 마나량을 증폭.
‘열’을 매개로 두 속성의 파괴력을 증폭시킨 융합 마법이 들이닥친다.
오싹하구먼.
접근하는 번개를 두 눈에 담아 두고는.
클리포트가 빚어낸 허구의 성좌, 바엘의 가호를 발동했다.
만상침식.
시야에 닿는 것이라면 유 · 무형을 막론하고 침식하는 강력한 가호.
진리안으로 마나의 구조를 읽어내고, 만상침식이 그 사이를 파고든다.
아직 부족해.
만상침식의 원전.
바알이 내려준 [탐욕의 가호]가 르네의 마력을 제 색으로 물들인다.
“되돌려 주마.”
직선으로 쏟아지던 붉은 번개가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반대로 휘어졌다.
르네 데이비스의 입가에 감돌던 미소가 처음으로 사라졌다.
챙그랑!
목걸이에 박힌 수정이 산산조각 나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안에 봉인된 마법 [앱솔루트 실드]가 르네 데이비스를 지켰다.
-아쉽게 되었구나.
“거기까진 예상했어.”
놈이 차고 있는 목걸이의 효능 정도야 이미 알고 있었다.
[대천사의 가호]
회귀 전, 르네 데이비스의 목숨을 구해준 아티팩트다.
유럽 전선에서 놈의 숨통을 끊었다고 생각했을 때 저게 발동하는 바람에 놓쳐 버렸지.
전력을 다해도 아티팩트에서 발현된 결계를 부수긴 어렵다.
“이 정도로 대천사의 가호를 뺀 거면 이득이지.”
처음부터 노림수가 르네 데이비스였던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막 재생 중인 에펠탑 괴물을 향해 달렸다.
[신의 분노를 사용합니다.]
[우라즈 베르세르크를 사용합니다.]
…….
수 배로 늘어난 신체 능력.
거듭되는 버프가 적용되면서 힘이 넘쳐나다 못 해 몸이 터질 것만 같다.
내 수준을 아득하게 넘어선 버프.
서포터의 주문이라면 모를까, 잠재력을 일깨우는 스킬을 연달아서 사용하니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겨우 잡은 기회. 조금은 무리하자.
손목에 밀집된 내공.
드워프가 벼려 낸 무기보다 더 단련된 몸뚱이로 강기를 일으킨다.
[백수제왕무 - 14초식]
[도철각(饕餮角)을 사용합니다.]
손바닥을 회전하던 강기가 사방으로 흩날린다.
콰드드드득!
철골이 맹렬하게 회전하는 부강(斧罡)에 닿는 순간 굉음과 함께 붕괴되었다.
에펠탑을 유지하던 암흑 마나도.
강화된 철골도 강기 앞에서는 무력화되었다.
복구되는 속도가 따라오지 못하는 파괴력.
“감히, 이딴 사술로 나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마탄이 등 뒤를 노리지만 극야의 힘으로 튕겨 냈다.
에펠탑만 없애 버리면 르네 데이비스 따위, 내 적수가 못 된다.
초식을 연달아 펼치면서 재생 중인 에펠탑 괴물의 몸뚱이를 파괴했다.
에펠탑이 공 · 수를 전환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1초.
그 정도면 충분하다.
연달아 무공을 펼치면서 미리 준비해 둔 선법도 전개했다.
번개 그물이 에펠탑의 마력 운용을 방해하고.
아래에서 솟구친 토룡은 발을 물어뜯어서 중심을 흔들었다.
르네 데이비스가 융합기공으로 빚어낸 주문을 펼쳤지만, 극야와 폭마기로 방어했다.
마지막으로.
[백수제왕무 - 13초식]
[황룡아를 사용합니다.]
[오버 드라이브를 사용합니다.]
팔에서 솟구친 강기가 10미터 가까이 늘어난다.
본래 내 경지로는 4미터에서 5미터 길이가 최대이지만.
쟝 뒤르케의 고유 능력을 스킬로 만들면서 두 배에 근접한 출력을 강제로 끌어냈다.
단전이 빠르게 비어간다.
제길, 오래 유지하지는 못하겠군.
콰콰콰!
패도적인 도강(刀罡)이 재생 중인 에펠탑 괴물을 찢어발겼다.
강기를 한번 휘두르자, 길이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오버 드라이브가 통용되는 건 한 번의 공격뿐.
초식 한번 펼쳤다고 내공이 반 가까이나 줄어들었다.
[블링크를 사용합니다.]
재사용시간이 끝난 블링크를 전개.
1초가 되는 순간에 자리를 이탈했다.
『……!』
넝마가 된 에펠탑 괴물.
4/5에 해당하는 육체(?)를 잃었고.
남은 부위도 형태만 겨우 유지할 뿐, 전투 능력을 대부분 상실했다.
조금만 더 힘을 썼으면 완전히 파괴하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르네 데이비스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서 물러났다.
에펠탑 괴물이 앞뒤 안 보고 달려들면 앞뒤로 합공을 받게 되니까.
그건 좀 곤란하지.
“프랑스의 자랑을 잘도…… 이 꼴로 만들었겠다!”
“이제 존대도 안 붙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자를 존중할 이유는 없다!”
르네는 분기탱천한 모습으로 삿대질을 했다.
흐흐.
저 반질거리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니 속이 후련하네.
-참으로 짓궂구나.
“적이잖아. 이것도 심리전의 일환이라고.”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만상침식으로 가져온 승기.
일그러진 르네 데이비스의 얼굴을 즐겨 보려고 했…… 는데, 놈은 어느새 분노를 삼켰다.
“이 방법까지는 쓰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군.”
저기요.
그런 수단은 안 쓰셔도 되는데요.
“네가 자초한 일이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보도록 하여라.”
르네는 에펠탑을 만졌다.
폐기 직전인 구조물은 부서진 부위를 모두 떨쳐 내고는 재조립을 시작했다.
인간의 뼈와 근육처럼 분해와 조립을 반복하는 에펠탑.
르네 데이비스를 감싼 에펠탑은 완전무장을 갖춘 기사의 모습으로 변했다.
“2페이즈도 있던 건가.”
하아-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 * *
30미터 크기의 강철 거인.
에펠탑에 비교하면 1/10가량으로 줄어들었지만.
르네와 일체화된 에펠탑은 이전보다 더 강렬한 기세를 풍겼다.
“무슨 수를 쓴 거지?”
『하하하! 프랑스의 자랑과 일체화가 된 것이다.』
“처음부터 했으면 됐잖아.”
『어리석구나, 네가 에펠탑의 크기를 줄여 주었기에, 비로소 내 역량으로 동기화가 가능한 것이다.』
“너무 큰 마력은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인가.”
친절하기도 하지.
르네 녀석은 승리를 확신한 것처럼 힘의 비밀을 주절거렸다.
그 덕분에 무슨 원리로 에펠탑과 일체화했는지는 알겠어.
-방법이 있느냐?
“없지, 힘으로 두들겨 패는 수밖에.”
비무장지대에서 마주친 가아그셰블라의 묘목.
당시 그 노인은 엘드리치 드래곤을 소환, 놈과 일체화했다.
클리포트의 나무의 현신과도 같은 에펠탑.
의지가 없는 거대한 힘이기에, 르네가 제 몸뚱이와 일체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나, 저치는 마법이 주특기이지 않느냐. 강한 힘이 있다 한들 제대로 다룰 줄 모른다면.
“저 녀석의 직업이 올마이티인 건 잊었어?”
올마이티.
갖가지 스킬들을 익혀야 전직 가능한 직업이다.
여태 마법 위주로 펼친 건 근접전을 에펠탑 괴물에게 일임했기 때문.
『그 말대로다. 소환수여.』
강철의 거인이 된 르네가 정면으로 달려든다.
확연하게 줄어든 마력 양.
기세는 이전보다 더 날카롭고 패도적이다.
에펠탑이 의지가 없는 괴물로써 힘을 부릴 때하고는 다르다.
[소울 바디&이머전시 이스케이프]
[융합기공]
[셰이프체이서]
쭉 늘어난 르네의 신형.
둘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회피는 불가능.
대상에게 영혼의 낙인을 찍어서 반드시 곁으로 이동하는 저항 불가의 기술이다.
회귀 전에도 몇 번이나 경험한 르네 데이비스의 추격 기술.
난 회피하는 대신 반격을 준비했다.
오버 드라이브로 펼친 건 무공.
내공 운용 능력만 90% 떨어졌지, 나머지 기운은 페널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꽉 말아 쥔 주먹.
괴력으로 강화한 일격을 내지르자, 르네가 방패를 추켜세웠다.
[철벽&실드 브레이크]
[융합기공]
[아이언 메이든]
주먹에 깃든 폭마기가 역으로 내 몸을 해한다.
방어력을 증대시키면서 상대의 힘을 되돌리기까지.
난 반사되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주먹을 곧바로 거두었다.
메탈 반사 장갑이 찢겨 나가고 피가 공중에 아롱아롱 맺힌다.
단 일 합을 주고받았는데 수십 미터 뒤로 튕겨났다.
압도적인 출력과 기묘한 스킬 운용.
온몸이 욱신거린다.
『자, 참회할 준비는 되었나?』
“멍청하기는.”
나는 공중에 부유한 상태로 중지를 들었다.
“이게 내 도주 경로다.”
오버 드라이브의 후유증으로 무공을 못 쓰는 상황.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 알아서 거리를 주니 얼마나 좋아?
“여신님.”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현신한 닉스의 손짓에 맞춰 어둠이 넘실거린다.
너만 2페이즈가 있는 줄 알지?
“제대로 놀아보자고.”
“후훗,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려 주마.”
닉스가 내 말에 호응하며 극야의 힘을 넓게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