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또 결계인가. 참으로 발전이 없는 족속들이로고.
“결계하고는 조금 달라.”
앙상한 가지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공간.
클리포트의 나무가 자리 잡은 도시, 파리의 정경이 발밑에 구현되어 있다.
기존 개념을 뒤집어서 만든 이면 세계.
에펠탑을 삼켜서 만들어진 커다란 나무도, 차원의 벽이 희미해지면서 이면 세계를 비추던 하늘도.
뒤틀려 버린 건물, 그리고 괴물들도 없는 곳.
빛의 도시라고 불렸던 파리의 모습이 재현되었다.
“꽤 악취미군.”
르네가 구현한 클리포트의 심상.
하필이면 세계 단절로 일그러트리기 전의 파리라니.
제 손으로 프랑스의 자랑을 박살 내 놓고는 그 풍경을 비추어서 역으로 구현할 줄은 몰랐다.
“아름다움은 보존해야 하는 법이지요.”
멀쩡해진 에펠탑 위에 올라탄 르네 데이비스.
놈은 턱을 치켜세운 채 오만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제 손으로 부숴 놓고 뭘 보존한다는 거냐?”
“이면 세계에 파리의 빛나는 모습을 기록함으로써, 영원불멸한 형태로 남기는 겁니다.”
“지랄도 풍년이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제정신이 아닌 녀석과 대화하는 건 피곤했다.
“설마. 주둥이로 싸우려고 날 불러낸 건 아닐 테고.”
“여기는 알자스-로렌처럼 방해꾼도 없는 공간입니다. 그러니 제 전력을 다할 수가 있지요.”
“클리포트의 힘을 빌려오는 주제에 전력은 무슨.”
“큭, 후회하게 해 드리죠.”
[다중 영창]
[라이트닝 샤워&소닉 밤]
[융합기공]
[라이트닝 웨이브]
빛과 같은 속도로 퍼지는 충격파.
눈으로 보고 반응하면 늦는다.
이미 기감을 한껏 벼려 놓은 덕에 메탈 반사 장갑과 폭마기로 방어.
뇌전이 섞인 충격파를 가볍게 흘려보냈다.
-꽤 화려해 보인다만 실속은 없는 공격이로구나.
“가만있었으면 내부가 바짝 타 버렸을걸?”
방어력을 무시하는 음파 공격.
거기에 번개 속성을 융합해서 대상의 안쪽을 노릇노릇하게 태워 버리는 흉악한 기예다.
폭마기를 두르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역시 융합기공이야.
올마이티의 상징 격인 고유 능력.
르네 데이비스는 융합기공으로 인류의 정점인 군주까지 올라갔다.
뭐, 그렇다고 해도 내 상대는 아니지만.
“솜씨가 제법이군요. 하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구구구구궁!
에펠탑이 몸을 일으킨다.
강철로 된 구조물에게 ‘몸'이 어디 있으며, 일으킨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내 감상을 표현하기에는 이보다 적합한 단어를 찾기가 어려웠다.
구조물을 지탱하는 네 기둥이 쑥 뽑히면서 자유로워진다.
철골 일부는 분리되면서 팔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뾰족한 철탑은 투구를 쓴 기사처럼 변했다.
“너 말이야. 방금 전에 아름다운 풍경을 보존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이 몰골의 어디가 그렇게 아름다운지 모르겠는데.”
“파리의 자긍심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켄타우르스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한 에펠탑이 발을 떼었다.
쿵!
백택군림각을 사용한 것처럼 커다란 충격파가 퍼져 나간다.
“그럼 가 볼까?”
-후후훗. 그대가 앞장서거라.
나도 발을 세게 내디뎠다.
[토둔의 술 - 토룡출수를 사용합니다.]
지면이 들썩이면서 에펠탑의 다리를 물어뜯었다.
휘청거리는 에펠탑.
“감히 파리의 자랑을…….!”
“클리포트로 만든 가짜한테 너무 몰입하는 거 아니냐?”
다시 한번 토룡출수를 전개.
에펠탑의 무게 축을 흔들어서 그 위에 올라탄 르네 데이비스의 시선을 아래로 확 꺾었다.
* * *
콰아앙!
채찍처럼 늘어난 에펠탑의 팔(?)이 지면을 후려친다.
일대 지형을 바꿀 정도의 파괴력.
“어마어마한 힘이군.”
-한가하게 그리 말해도 되느냐?
“아니. 이크!”
[블링크를 사용합니다.]
쿠구구궁!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곳이 쑥대밭으로 변했다.
“자신만만할 때는 언제고. 그저 도망만 칠 겁니까?”
르네의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쾅! 쾅!
연속적으로 내리꽂히는 번개.
융합기공으로 빚어낸 ‘적을 쫓는 뇌전’이다.
흘리거나 회피는 불가능.
반드시 폭마기로 흘리거나 상쇄시켜야 한다.
-언제까지고 물러설 수는 없느니라.
“나도 알아.”
채찍처럼 늘어난 팔이 다시 한번 머리 위로 떨어진다.
등 뒤에 나타난 검붉은 날개.
암흑 투기로 구성한 [용의 날개]로 쏜즈 미사일을 발사했다.
2성급 스킬인 아이스 스피어보다 강한 공격이 1초에 수백 개나 쏟아진다.
티티티팅!
쏜즈 미사일은 에펠탑 괴물의 팔뚝 일부를 찢어발겼다.
면적이 넓은 만큼 조준에 공들일 필요가 없었다.
순식간에 넝마가 되어 버린 에펠탑 괴물의 팔.
『…….』
시간을 역행하는 것처럼.
방금 전 쏜즈 미사일로 타격한 부위가 재생을 시작했다.
0.5초.
파손된 면적이 수십 미터 단위인 걸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회복능력이다.
“이거,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괴물이잖아.”
난 볼을 긁었다.
에펠탑을 변형시켜 만든 괴물은 비무장지대에서 마주한 엘드리치 드래곤보다 한 수, 아니 두 수 위의 전투력을 지녔다.
생김새는 우스꽝스럽지만 덩치가 몇 배나 크다.
마법 능력이나 체술 같은 기예를 펼치진 않지만 저 육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만으로 엘드리치 드래곤을 압도했다.
클리포트의 나무에서 뽑아 쓰는 어마어마한 마나 출력.
그것만으로도 70층대, 아니 80층대 괴물보다 더 강한 능력을 지닌 셈이다.
또한,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구조물에 ‘개념’을 부여해서 만든 괴물인 만큼 생명력 = 마나와 동일했다.
놈을 쓰러트리려면 육체를 구성하는 마나를 0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건데, 말처럼 쉬워야지.
[파이어 필러&아이스 필러]
[융합기공]
[영원의 감곡]
적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도 위협적이었다.
융합기공으로 얽힌 화염과 냉기.
상반된 기운이 반발하면서도 사용자의 의지에 맞춰 움직인다.
거듭 증폭된 불꽃과 얼음은 기묘한 형태로 얽히면서 내 움직임을 속박했다.
두 마법 다 재배열을 마치는 순간 지정된 위치에 발동되는 즉발형 주문.
피할 수는 없다.
[진리안을 사용합니다.]
마나를 읽어 낸다.
융합기공으로 뒤엉킨 강렬한 마나의 흐름.
인위적으로 두 기운을 합칠 수 있다면.
그 흐름에 간섭해서 원래의 형태로 되돌리는 것도 가능하다.
보인다.
[파이어 필러]와 [아이스 필러]를 엮어내는 르네의 마나가!
손가락을 빠르게 내지른다.
백수제왕무 5초식.
광서지로 마나가 뭉친 곳을 꿰뚫었다.
반발 중인 두 마나를 엮어 내던 융합기공의 정수가 파훼되고.
겹쳐서 사용한 두 주문이 다시금 충돌했다.
저적! 화르르륵!
동시에 발동된 파이어 필러와 아이스 필러가 서로 충돌한다.
마법 발현의 중심지에 서 있기에, 완전히 피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피부에 두른 [메탈 반사 장갑]이 남은 에너지를 흡수했다.
“어때.”
-뭘 묻느냐. 여의 계약자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까다롭긴.”
르네는 몇 번이고 좌표를 지정해서 즉시 발동되는 스킬을 전개했다.
내 발을 묶어서 에펠탑 괴물로 끝내겠다는 노림수.
그때마다 진리안으로 마나의 흐름을 간파, 융합기공이 제 위력을 발휘하기 전에 분쇄했다.
“당신, 융합기공을 알고 있습니까?”
“내가 눈이 좀 좋거든. 시력도 2.0이나 된다고.”
“말해 줄 생각이 없다면 제힘으로 알아내도록 하죠.”
즉시 발동형 기술이 연달아 파훼되자, 르네도 공격 패턴을 바꾸었다.
[다크 캐논&솔라 빔]
[융합기공]
[카오스 레이]
음산한 빛이 번쩍였다고 느끼는 순간.
회색 광선은 눈앞에 도달했다.
융합으로 끌어낸 혼돈의 힘.
무상성이면서 모든 속성에 타격을 입히는 게 가능한 사기적인 공격 타입이다.
쳇, 꿀 좀 더 빨아 보나 했더니.
여전히 [진리안]의 효과는 유효했다.
일직선으로 솟구치는 광선에도 나름의 결이 있다.
손에 아른거리는 내공.
비익대붕장으로 혼돈의 힘을 가볍게 밀어냈다.
옆에 생겨난 기다란 고랑.
카오스 레이가 만들어 낸 살풍경한 모습이다.
“역시 방출하는 공격을 파훼하진 못하는군요.”
“그래서 이길 것 같나?”
“큭. 만용을 부리는 것도 여기까지입니다.”
에펠탑 괴물의 위에 올라탄 채 마법을 연사 중인 르네.
마법 포격을 흘려 내도 300미터 크기의 거대한 철골 괴물이 팔을 휘두른다.
공격이라기보단 재난에 가까운 압도적인 파괴력.
정확도는 높지 않다.
한 번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급이라서 문제이지.
-여도 나서겠노라.
“기다려 줘. 아직은 아니야.”
클리포트의 나무로 구현해 낸 파리.
내가 예상한 패턴은 아니었다.
르네가 전생에 펼친 수단은 세계를 침식하는 것이었지.
일부 범위를 지정해서 분리, 나무 안으로 불러들이는 행위를 벌이진 않았다.
계산에 없던 행동이라고 해서 손 놓고 당할 생각은 없다.
회귀 전의 경험이 만능까지는 아니라는 것쯤, 닉스가 알려 준 덕에 실감하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에펠탑 괴물과 르네의 전투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지금이야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르네의 힘.
에펠탑 괴물의 전투 능력과 반응 속도까지.
중요한 건 얼추 파악했다.
그럼 이제…….
“소소한 반격을 해 볼까.”
두 다리에 내공을 흘려보내며 경쾌하게 스텝을 밟는다.
구름 위를 걷는다는 경신법, 운류보가 물 흐르듯이 펼쳐지고.
철골로 된 채찍이 한발 늦게 지면을 후려친다.
정면으로 맞지 않았는데도, 충격파에 피부가 저릿저릿하다.
이 정도로 물러날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지.
에펠탑의 공격 속도와 파괴력.
그리고 반응에 걸리는 시간까지 모두 견적이 나왔다.
[블리자드&스콜]
[융합기공]
[아이스 스태커]
빗발치는 얼음비.
일일이 쳐 내기도, 피할 수도 없는 촘촘한 공세다.
나는 극야의 힘을 끌어냈다.
그림자에 깃든 밤의 힘이 폭발적으로 증가.
무수히 쏟아지는 얼음비를 튕겨 냈다.
“좋습니다. 에펠탑이여, 저 어리석은 자의 발이 묶여 있을 때 끝을 내십시오!”
『……!』
이번에는 왼팔이 지면을 낮게 쓸면서 다가온다.
바닥과 마찰을 일으킨 탓에 속도가 전보다 느리지만, 철골의 높이가 뒷동산보다 더 커서 회피하기가 까다로웠다.
마치 해일이 몰려오는 것 같은 압박감.
“이때를 기다렸어.”
팔로 지면을 쓸어 담느라 아래로 처진 에펠탑의 상체.
그 위에 올라탄 르네도 내 위치와 가까워졌다.
[아발란체를 사용합니다.]
[솔라 익스플로전을 사용합니다.]
부동심.
트윈 헤드 오우거의 정수를 포식하면서 얻은 스킬이다.
격렬하게 움직이면서도 마법 전개를 가능케 해 주는 강력한 효과.
대신 집중력 소모와 재배열 속도 50% 감소라는 페널티가 있지만, 시간은 충분했다.
지근거리에서 터트리는 강력한 폭발.
세계가 하얗게 명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