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종말을 떠올리게 하는 폭발.
하얀빛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시시하군, 이 정도로 육체를 구성하는 힘이 떨어지다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지속시간이 끝났습니다.]
히페리온의 움직임이 멎었다.
금속으로 만든 성좌.
형체야 그럴싸해도, 금속에게 생명을 부여한 근원은 내 마력이다.
히페리온이 창을 투척한 순간, 데모닉 파워로 치환시킨 마나가 바닥을 드러냈다.
울컥-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맛.
입을 벌리니 역류한 피가 한 바가지 쏟아졌다.
“이야기야 들었다만, 참으로 딱한지고.”
닉스는 호들갑을 떠는 대신 내 등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마력 폭주.
사용자의 한계를 넘어선 스킬을 전개했을 때 오는 반동이다.
이 정도야 각오했지.
내가 구현한 히페리온은 이름을 잃은 낙성좌 시절의 모습이 아니다.
바벨탑이 세계와 완전히 동조화를 마쳤을 때.
세계의 근원을 얻어서 잃어버린 ‘이름’과 격을 모두 회복한 만전의 모습이다.
그걸 구현하려고 했으니, 당연히 마력 폭주가 오지.
난 침착하게 마나의 흐름을 바로잡았다.
혼원룡의 심장은 압도적인 마나 장악력을 지녔다.
거기에, 최근 얻은 마나의 지배자 능력까지 있으니 내 의지력만 충분하면 마력 폭주쯤이야 얼마든지…….
“웨에에엑!”
다시 한번 피가 역류한다.
“스승님! 마력 폭주쯤은 제어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난 제어를 할 수 있다고 했지, 쉽다곤 안 했다.
뒈질 것 같은 아픔이 뒤따르는 건 옵션이고.
그래도 말이야.
난데없는 속앓이(?)까지 한 보람은 있었다.
히페리온이 던진 창.
[슈퍼 노바]는 마력 공급이 끊기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좌’의 격을 담아낸 공격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신력의 잔향.
[태양]에 근원을 둔 히페리온의 공격이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잎사귀를 불태우고, 나무껍질에 커다란 상흔을 남겼다.
대기 중에 충만한 태양의 힘은 클리포트의 나무가 암흑 마나를 집결시키려 할 때마다 번번이 방해했고.
반나절 정도는 클리포트의 나무가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씀.
“웩!”
그러니까 속만 좀 진정시키면 된다.
“우린 진입하자.”
[인크레더블]
엘렌의 육신이 부풀어 오른다.
근육 한 올 한 올에 마나를 실어서 강화하는 고유 능력.
그녀를 선두로, 일행 모두 제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막아! 놈들이 어머니 나무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이 이상은 허락되지 않는다. 침입자들!”
세례로 늘어난 클리포트 추종자 무리.
이면 세계에서 불러낸 괴물들.
그리고 아르메 루즈의 플레이어 집단까지.
르네 데이비스는 에펠탑 결전을 예견이라도 한 듯, 잔존 병력을 나무 아래로 집결시켜 놓았다.
히페리온의 신력은 클리포트의 나무가 친 방어막을 무효화시키는데 모조리 소모되었다.
적은 병력을 온존시킨 상황.
수적으로 열세지만, 언제 우리가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였던가?
『모두 죽음으로써 나의 주인을 섬겨라.』
『캬오오오!』
본 드레이크 위에 탄 아크가 죽음의 군세를 부리고.
렉시의 괴성이 이계의 마물들을 기죽인다.
모자라는 숫자는 아크의 강령술 덕에 어느 정도 채워지고.
화력 면에서는 일행이 아르메 루즈를 압도했다.
“나와라, 워 골렘!”
공간 일부를 찢고 나온 강철의 거인.
타이탄의 초기 모델, 워 골렘이 전장에 강림했다.
엔리케 녀석. 저걸 소환할 줄이야.
모르스에게 의뢰했던 [고대의 마나 코어]를 기반 삼아 마침내 워 골렘을 완성시킨 모양이다.
탑 미션 중에 획득한 타이탄이야, 아직 수준이 안되어서 구동시키지 못하지만.
워 골렘만 해도 전장의 판도를 바꿀 정도의 강력한 병기다.
[고유 능력 - 분신]
여럿으로 늘어난 핑 레이(분신)들은 전장 여기저기에 난입해서 혼란을 부추겼고.
서걱-!
공간을 건너뛴 카를라가 클리포트 추종자들을 격살했다.
“후배들에게 뒤처질 수야 없지 않겠나!”
신준석을 위시한 무극 팀은 일직선으로 나아가며 길을 만들었다.
내공 소모가 크지만 화력만큼은 근접 계열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높은 무공.
옐로우 스톰은 무극 팀이 만들어 낸 길을 확장시켰다.
“휘감아라, 폭풍이여!”
두 다리에서 회전하던 바람이 정면으로 방출된다.
홍윤수가 쏘아낸 돌풍은 클리포트 진형을 헤집으면서 균열을 더 크게 만들었다.
엉망이 된 진형을 뭉개는 건 골든 서클과 세르게이의 몫.
“우린 프랑스의 방패다. 고작 미국의 개 따위에게…… 커허헉!”
“얼씨구, 방패 좋아하시네. 이딴 짓을 하면서?”
바위보다 단단한 엘렌의 주먹이 아르메 루즈 플레이어의 몸뚱이를 다진 고기로 만들었다.
[드래곤 라이트닝]
세르게이의 주먹에 맺힌 뇌전이 드래곤의 형태로 날아든다.
이야.
인류의 여섯 군주 중 셋.
그 외에도 명성을 떨친 하이 랭커들이 협업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뜨거워졌다.
“크아와! 공격! 공격해라!”
일행을 지나쳐서 날아드는 괴물들도 있었다.
[극야의 힘]
[진동 결계 x 10]
어둠을 벼려 낸 칼들이 괴물을 베어내고.
몇 겹을 덧대어 만든 견고한 방패가 적이 다가오는 것을 막아 낸다.
창과 방패.
극야의 힘은 어느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가 가능하고.
진동 결계의 방어력은 결계나 방어막 부류 중에서 최상급이다.
거기에, 원 역사대로라면 몇 년 후에나 깨우칠 요령까지 미리 익히면서 방어력이 더욱 상승했다.
회귀 후에 모은 동료들.
난 그들을 믿으며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마나를 억눌렀다.
* * *
“후욱.”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가려는 마나를 겨우 진정시켰다.
데모닉 파워로 마력 스텟에 올인한 것도 사태 수습에 도움이 되었다.
[마력]은 마나의 총량도 관장하지만, 마나 자체의 컨트롤 능력에도 영향을 미치니까.
혼원룡의 심장으로 폭주하던 마력을 수습한 후.
억눌러놓았던 재생능력을 발동, 진탕된 내장을 회복했다.
“그대여 괜찮으냐?”
“어, 덕분에.”
“스승님, 길을 열게요.”
진동 결계가 양쪽으로 펼쳐지며 괴물들의 접근을 막아낸다.
“여신님, 영체로 돌아와 줘.”
“계약자여, 지영이만 두어도 되겠느냐?”
“내 제자야.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어.”
“맞아, 그러니까 날 믿어 줘.”
지영이가 닉스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미스터 유, 벌써 달려와도 괜찮은 거야?”
“그럭저럭.”
“너무 무리하지 마. 우리가 리드하고 있어.”
“아, 그게 말인데 클리포트의 나무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도와 줘.”
클리포트의 나무에는 거점 방어형 괴물들과 추종자들이 올라탄 채로 마법 포격을 이어갔다.
나무가 두른 기운 때문에 축지나 블링크로 붙을 수도 없다.
“여기 있는 적들을 모두 쓰러트리고 차근차근 올라가는 게 낫지 않아?”
“르네 데이비스가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을 거다.”
불완전하지만 클리포트의 나무가 이 세계에 강림했다.
활용 방법은 그야말로 무궁무진.
르네가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이 승부. 길게 끌수록 우리한테 불리해.”
“그렇게 말한다면. 어이, 미스터 킴!”
“이야기는 모두 들었습니다.”
영수 형님은 방금 전 대화를 모두에게 전달했다.
“후배님, 우리한테 맡겨 주게.”
“큭, 재미있는 짓에 내가 빠질 수 없지!”
“길드장님, 먼저 가십시오.”
“사부, 금방 따라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십쇼.”
팀별로 흩어져서 전투를 벌이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플레이어 김영수의 지휘에서 벗어납니다.]
영수 형님은 나를 추방.
그 직후, 머리 위에 쓰고 있는 왕관을 만지작거렸다.
왕관에 달린 보석에서 강한 빛이 새어 나오고.
[거인 왕의 왕관 내장 스킬]
[결사의 돌진]
금빛이 일행을 감쌌다.
지휘 중인 플레이어들의 능력치를 2배로 뻥튀기시켜 주는 강력한 스킬.
하지만 방어와 관련된 옵션들과 스킬의 효과를 대폭 감소시키는 양날의 검이다.
영수 형님은 모두의 동의를 얻어 승부수를 꺼냈다.
“흐하하하하! 이거 효과 좋은데?”
“이놈들, 모조리 쓸어주마!”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극단적인 버프.
그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피보라가 공중을 새빨갛게 물들인다.
활짝 열린 길.
난 동료들이 열어준 길을 경신법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라.”
“르네 길드장님을 방해할 수는 없다.”
“클리포트에 영광을!”
영혼이 뒤틀려 버린 추종자들.
그리고 아르메 루즈 소속 플레이어들이 몸을 날리면서 막았다.
적의 숫자가 많다 보니 [결사의 돌진] 버프가 걸렸는데도 모두 밀어내지 못했다.
“부나방처럼 달려드네.”
[기가 임팩트를 사용합니다.]
[폭마기를 사용합니다.]
검붉은 기파가 퍼지면서 달려드는 적들을 모조리 분쇄했다.
-더 몰려드는구나.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메모라이즈 스킬 – 아발란체를 해방합니다.]
[메모라이즈 스킬 – 솔라 익스플로전을 해방합니다.]
[이클립스를 사용합니다.]
르네 데이비스와의 결전을 대비해서 미리 저장해 둔 대단위 마법.
두 구체가 충돌하는 순간에 반발력을 최대로 만들었다.
일행이 만들어 준 길을 넘어 클리포트의 나무 위로 크게 도약.
히페리온의 신력이 감도는 부분을 지나 단숨에 꼭대기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앙상한 나뭇가지.
초신성 폭발은 잎사귀들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
마치 멸망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
르네는 나무 한가운데에서 눈을 감은 채, 태양의 기운을 몰아내는 중이었다.
“이야, 다시 보니 반갑네.”
“당신…… 용케 여기까지 왔군요.”
“내 능력이 좀 대단해서.”
“성좌의 힘을 구현하는 능력은 처음 봅니다.”
놈은 감았던 눈을 떴다.
의외로, 놈에게서는 분노나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끈적거리는 부의 감정.
노골적인 탐욕이 놈의 시선에 얽혀있었다.
“왜, 내 능력이 탐나나?”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겠지요. 성좌를 만들어 내는 것이 교단의 목표이니까요.”
인공적으로 빚어낸 성좌, 바엘.
원본인 판데모니엄의 수장과 흡사하지만, 진짜 성좌에 비해서는 한 수 모자란다.
사하라에서 전투를 벌였을 때에도 그 불완전성을 파고들어서 승리했다.
“원하면 가져가 보던가.”
“제 발로 여기까지 왔으니 저도 힘을 아낄 필요가 없겠지요.”
촤라라락!
나뭇잎 하나 남지 않은 가지들이 넓게 펼쳐졌다.
다시 한번 진행되는 세계 단절.
외부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하는 강력한 차원 막이 가지 안과 밖을 분리했다.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르네 데이비스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