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세르게이는 두 눈을 깜빡였다.
혹시 잘못 본 건 아닐까.
몇 번이나 눈꺼풀을 움직여 봤지만 풍경이 달라지지 않아서 팔등으로 비비기까지 해 봤다.
눈가가 붉어지기만 할 뿐.
그가 본 경악스러운 장면은 변하지 않았다.
-콰루루루!
뼈만 남은 드레이크가 괴성을 지른다.
저 녀석이 얼마나 까다로운 적인지는 세르게이도 알고 있다.
공중전에 능하며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은 어지간한 방어 마법으로 막아 내기 어려운 강력한 위력을 지녔다.
용족이면서도 본능에 충실한 게 유일한 약점인 레서 드레이크.
진호는 그 까다로운 괴물을 손쉽게 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언데드로 되살렸다.
‘당최 능력의 한계가 어디인지 알 수 없잖아.’
세르게이는 경악 섞인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몇 번이고 꾹 참았다.
장벽이 완전히 무너진 후.
공중으로 날아간 진호는 허공을 땅처럼 밟으면서 레서 드레이크들을 농락했다.
리치를 닮은 소환수는 어떻고?
레서 드레이크가 쓰러질 때마다 족족 본 드레이크로 제작.
어느새 제공권을 장악했다.
“우리 스승님, 좀 대단하시죠?”
지영이가 다가와서는 가볍게 웃었다.
흠칫 놀란 세르게이.
대꾸했다가는 속마음을 그대로 내비칠 것 같아서 입술을 꾹 붙였다.
세르게이를 제외한 일행은 진호의 기행에 익숙한지 긴장 풀린 모습으로 관전했다.
반면 클리포트 추종자들을 지휘 중인 플레이어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진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나디아 부 길드 마스터를 쓰러트린 게 저놈인가.”
쟝 뒤크레. 아르메 루즈 2팀장은 레서 드레이크의 목에 채워 둔 줄을 세게 당겼다.
파리 디즈니랜드 인근에 잔류 중인 병력을 모조리 끌어모았다.
이기진 못해도 침입자들을 저지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쟝의 오판이었다.
‘유럽에서 게이트를 공략할 때는 힘을 숨기고 있었나?!’
보고 받은 것보다 훨씬 강력한 전력.
역천 길드는 속한 플레이어가 많지 않지만, 프랑스 내 여느 길드보다도 강력했다.
클리포트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아르메 루즈 전원이 달라붙어도 승산이 높지 않았다.
‘아니, 질 것 같은데?’
허공을 도약하며 레서 드레이크를 쓰러트리는 진호.
첫수로 레서 드레이크 한 마리가 격살당한 후, 나머지 용족들이 전투 태세를 갖추면서 이전만큼 쉽게 쓰러지지는 않았다.
고꾸라진 만큼 적의 군세가 불어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언데드의 숫자가 레서 드레이크보다 많아졌다.
쟝은 길드장인 르네 데이비스 말고도 두려움을 일으킬 만한 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이대로는 시간도 제대로 못 끈다.’
지상도 상황이 안 좋은 건 마찬가지.
각국 랭커들과 진호가 엄선한 플레이어들이 합을 맞추며 이계의 괴물들을 마구 도륙했다.
세르게이의 광역 마법.
변신을 마친 엘렌은 정면으로 돌진, 클리포트 추종자들의 진을 망가트렸다.
무공 사용자들이 그 틈을 파고들어서 혼전으로 이끌고.
지영이의 결계가 병력을 분단시켜서 군세의 힘을 약화시켰다.
‘마스터에게 보고해야 해.’
쟝은 기수를 돌렸다.
여기서 진호 일행에게 들이받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난 여기서 죽을 만한 인재가 아니란 말이다!’
프랑스 제일의 길드인 아르메 루즈에서 팀을 맡았다.
클리포트의 세례를 받은 후에는 랭커들조차 씹어 먹을 정도로 강해졌다.
세계 단절 직후, 파리에 머무르던 다른 길드 소속 랭커들도 어렵지 않게 제압했었다.
쟝은 두려움을 애써 정당화하며 전장을 이탈했다.
“언제쯤 도망가나 했네.”
지근거리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목소리.
혼란으로 가득한 전장에서 금세 묻힐 만큼 작았지만.
기묘하게도 쟝의 귀에는 사내의 목소리가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지, 진호 유!”
“이름도 기억해 주고 영광이야. 쟝 뒤크레.”
“네놈이야말로 어떻게 내 이름을?”
“전생 때 신세를 진 적이 있는데 왜 모르겠나.”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
쟝은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옮겼다.
길드 마스터인 르네조차 모르는 비장의 한 수.
톱니처럼 생긴 단검. 소드 브레이커가 불쑥 튀어나왔다.
날을 타고 회전하는 오러 블레이드.
세례를 받아 마스터급에 오른 쟝은 강기와 동급인 오러 블레이드를 능숙하게 다루어냈다.
[고유 능력 - 오버드라이브]
[체인 소드]
[오러 블레이드]
폭발적인 마나가 일시에 방출된다.
쟝 뒤르케의 고유 능력, [오버드라이브].
본신의 출력보다 훨씬 높은 마력을 불어넣는 기예다.
후유증이 있지만, 등급을 넘어선 힘을 부여하기에 변수 창출이나 비장의 수로 활용하는 등 사용처가 다양했다.
‘레서 드레이크도 일격으로 죽일 수 있는 공격이다!’
다이아몬드 등급 플레이어라도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려면 2초 이상 집중해야 한다.
무공 사용자들은 강기 발출까지 시간이 조금 적게 들지만, 어쨌든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건 마찬가지.
[오버드라이브]로 강기를 끌어내면 그 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
마나를 과하게 투입하면서 통상적인 위력보다 3배 이상의 위력을 내기까지 하는 강력한 능력.
‘죽이진 못해도 치명상은 입힐 수 있다!’
한 줄기 섬광이 번쩍였다.
* * *
[오버드라이브]로 일으킨 오러 블레이드의 파동.
-그대여! 위험하도다!
닉스가 쟝 뒤르케가 숨겨둔 비장의 수단을 목격하고 소리를 질렀을 때.
나는 암암리에 끌어올린 폭마기로 칼날을 붙들었다.
카가각!
메탈 반사 장갑에서 불똥이 튄다.
폭마기를 최대로 방출했는데도 증폭된 오러 블레이드를 밀어내지는 못했다.
조금씩 깎여나가는 금속 피부.
오러 블레이드가 그 사이를 파고들면서 근육과 살점을 찢어낸다.
치이익!
새어 나온 피가 오러 블레이드에 닿자마자 하얀 연기가 되어 증발한다.
“어, 어떻게 간파한 거냐!”
“네가 그 수법으로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준 적이 있거든.”
이야.
그때는 진짜 아파서 뒈지는 줄 알았다니까.
내가 뒷말을 중얼거리자 쟝 뒤르케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넌 모르겠지.
회귀 전에도 같은 수법을 사용했다는걸.
그나저나.
“운이 좋네.”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회귀 전, 쟝 뒤르케는 유럽 전선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X새끼였다.
잔혹한 손속과 빠른 행동력, 그리고 전황을 읽는 판단력까지.
유럽 전선 여기저기를 누비며 전황을 흔들어 놓은 놈이다.
싹수가 노란 놈을 파리 진입 초기에 잘라 냈으니.
[극야의 힘을 사용합니다.]
[암영추혼검을 사용합니다.]
등 뒤에서 솟구친 흑검.
쟝이 오러 블레이드를 회수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난 초재생능력을 발동.
살갗 안으로 파고든 칼날을 붙들었다.
겁나게 아프네!
-과감하구나. 또한 무모하고.
닉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녀석이 튀는 데 일가견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일격 이탈의 달인이라.
극야의 힘으로 쟝 뒤르케의 전신을 난도질하자, 놈의 동공에 아른거리던 생기가 사그라졌다.
“싸게 잡았네.”
전생에서는 이놈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던가.
뜻밖의 성과에 만족해하며 포식을 사용했다.
[하랍 세라펠의 묘목(쟝 뒤르케)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스킬 – 오버드라이브(불완전)가 추가됩니다.]
[오버드라이브]
등급 : ★★★
분류 : 액티브
사용자의 마나를 과부하시켜서 경지 이상으로 출력을 끌어올린다.
통상적으로 소모하는 마나의 900%가 소모되며, 증폭률은 200%다.
*지속시간 – 10초
*사용 후 60초 동안 마나 운용 능력 90% 하락
불완전 버전이라서 그런가, 페널티가 더 늘어났고 위력은 줄어들었다.
-흐응, 그대에게는 여러 버프 스킬이 있으니, 탐나진 않겠구나.
“그거랑은 또 다르지.”
신의 분노나 우라즈 베르세르크, 혹은 악귀의 분노 같은 스킬도 내 능력치를 뻥튀기 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오버드라이브]의 진면목은 ‘마나’ 기반 스킬의 위력을 늘려 준다는 것이다.
쟝 뒤르케처럼 오러 블레이드(폭마기)의 출력을 올리면 경지를 넘어선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스텟을 늘려도 경지를 뛰어넘는 힘을 다뤄 내지는 못하거든.
전에 암영추혼검의 속성인 ‘그림자’를 극야에 동조시켜서 억지로 검강을 끌어올렸듯.
오버드라이브는 한계 너머의 힘을 내게 해 주는 고유 능력, 아니 스킬이다.
“머리를 부쉈으니.”
-이젠 나머지 적들을 쓰러트릴 차례로구나.
“척하면 척이네.”
나는 본 드레이크 하나를 호출했다.
* * *
흑색 장벽이 무너지고 1시간 후.
“살려줘! 난 르네 님이 시킨 대로만 했…….”
“응, 변명은 지옥에서 해.”
콰득!
마지막 추종자의 숨통을 끊었다.
지휘관인 쟝 뒤르케의 사망.
본 드레이크가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도망치는 놈들만 없었으면 진즉에 끝났을 것을.”
엘렌이 짧게 투덜거렸다.
일방적인 전투가 이어지자 추종자 일부가 싸울 의지를 잃고 자리에서 이탈했다.
평범한 게이트라면 모를까.
파리 시민들이 억류된 상황에서는 추가 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전장이 넓어지려는 걸 최대한 방지하며 싸우느라 정리까지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다들 컨디션은 어떻죠?”
“체력이랑 마나는 괜찮아. 내가 걱정인 건 미스터 유인걸.”
“후배님, 내공 소모가 있어서 20분만 운기행공을 해도 되겠나?”
“거, 무공 사용자들은 엄살이 심하군. 나는 쌩쌩한데!”
세르게이가 이를 드러내며 도발했다.
글쎄요.
[진리안]으로 보니 네놈도 보유 마나가 반 이하로 떨어졌구먼.
“30분 휴식하고 바로 출발합니다.”
“파리를 되찾으려면 더 빨리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윤수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마 놈들도 전력을 한곳으로 모을 겁니다.”
르네는 쟝 뒤르케의 죽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경위까지는 몰라도.
[묘목]급 추종자와 연결이 끊어진 것을 가볍게 넘기지는 않을 터.
“여기서 속도를 올려도 만전인 적과 마주치겠죠.”
“르네 데이비스. 프랑스의 방패라 불리는 플레이어와 맞서 싸우게 될 줄은…….”
“왜, 미스터 홍. 즐겁지 않아?”
엘렌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도 않았다.
저 전투광은 이 상황에서도 참 솔직하네. 솔직해.
-그대가 할 말은 아니로구나.
파고드는 닉스의 말에 머쓱하게 웃었다.
파리 중심 지역으로 향하는 길.
첫 교전 때와 달리 괴물이나 추종자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괜히 긴장했네.”
핑 레이는 봉을 거두면서 투덜거렸다.
“누가 경계 풀랬냐. 너도 지영이랑 같이 특훈이다.”
“아, 사부!”
결전을 앞둔 상황.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며 심력을 소모하는 것도 안 좋으니, 말만 안 했어도 같이 구르지는 않았을 거다.
지영이도 그렇지만, 이 녀석도 주둥이로 화를 불러오는 재주가 있단 말이야.
“어, 사부님. 저거…… 에펠탑 맞나요?”
“맞는 것 같다.”
경악 섞인 지영이의 목소리에 확신을 실어 주었다.
정확히는 에펠탑이었던 것이라고 해야겠지.
철골로 세워진 커다란 구조물은 나무껍질로 뒤덮인 채, 과거의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려한 외모의 사내.
르네 데이비스는 변이한 에펠탑 위에서 일행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