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진호가 방점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
파리 곳곳에서 전투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첫 교전은 역천 길드 본대 쪽.
클리포트 추종자들은 새빨개진 눈으로 팀원들을 노려보았다.
“네놈들도 제물로 삼아 주마.”
[제니가츠의 뱀]
[시안의 눈]
[앙그마체의 손톱]
암흑 마나로 이루어진 뱀 수십이 쏟아지고.
무수한 눈동자가 움직임을 제한한다.
허공에서 쇄도하는 날선 손톱.
악마의 ‘개념’, 혹은 육체 일부를 구현하는 흑마법이다.
[진동 결계]
수 겹으로 덧댄 방어막이 암흑 마법을 막아 냈다.
공세가 만만치 않아서 결계 다수가 파훼 되었지만, 그와 동일한 숫자가 바로 나타나면서 틈을 메웠다.
“카를라야!”
클리포트 추종자들의 공세가 지영에게 쏟아지고 있을 때.
한 인영이 쏜살같은 속도로 파고들었다.
기다란 낫을 든 여인.
카를라의 등 뒤가 일그러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공간 수축과 해방 과정에서 발생한 에너지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겼다.
1킬로미터가 넘는 거리가 단숨에 좁혀진다.
[디맨션 브레이크]
낫의 궤적에 따라 풍경이 일그러진다.
강력한 암흑 마법도.
철갑보다 단단한 괴물의 외피도.
공간 자체를 무너트리는 낫의 ‘개념’ 앞에서는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촤아악!
분수처럼 쏟아지는 피.
낫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여러 목숨을 수확한다.
카를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클리포트 추종자와 괴물들을 베어 넘겼다.
“적은 고작 둘. 당황하지 말고 대응하면…….”
“건방진 놈. 난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거냐?”
클리포트 추종자들이 카를라와 지영에게 시선을 붙들리는 동안, 핑 레이도 손 놓고 구경만 하진 않았다.
30명으로 늘어난 핑 레이.
고유 능력에 선법을 결합한 분신들이 쇄도했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강풍.
한발 늦게 클리포트 추종자들이 반응했지만, 선기를 휘감은 바람은 흑마법을 찢어발기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암흑 마나는 법칙의 대칭에 선 외도.
순리를 관장하는 선법과 부딪치면 상성에서 밀린다.
핑 레이가 전개한 바람의 선법은 밀집한 클리포트 추종자들을 여기저기로 튕겨 냈다.
“나만 빼고 활약하지 말라고!”
[메카닉 컨트롤]
[킴바야 유물]
수십으로 늘어난 비행체가 흩어진 클리포트 추종자들을 집요하게 노렸다.
나디아 카셀의 [핀 팽]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는 위력.
그럼에도.
핑 레이의 선법에 흔들린 추종자들을 격살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미 랭커급 실력을 보유한 네 사람.
역천의 본대가 클리포트 추종자들을 압도하고 있을 무렵.
다른 방점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아압!”
[폭호신권 - 7초식]
[폭호층층권(暴虎層層拳)]
금색 강기가 연옥 수호병의 방패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방패를 뒤덮은 시커먼 기류가 권강에 짓눌리고.
신준석의 주먹은 방패 뒤에 선 연옥 수호병의 가슴팍에 구멍을 뚫어버렸다.
“이제 파고들기만 하면…….”
[언홀리 타겟]
[배니시]
신준석의 이마에 찍힌 낙인.
동시에 보라색 기류가 그의 전신을 휘감더니 100미터 이상 튕겨 났다.
‘저항력을 낮추는 저주에 추방 주문인가.’
신음을 꾹 삼키는 신준석.
방점에서 전투를 개시한 후, 몇 번이나 반복된 상황이다.
무극 팀은 전원이 무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시대까지는 비주류인 무공.
1인분 몫을 내기까지 오래 걸린다는 단점 외에도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디버프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뇌까지 근육으로 된 놈들이구나.”
“저 침입자들에게 진정한 공포를 알려 주자.”
가아그셰블라 종파의 특기는 저주와 인신 공양.
제물은 없지만 이면 세계의 환경을 구현한 [세계 단절]의 효과 덕에 암흑 마나를 끊임없이 공급받았다.
무공 사용자 특유의 돌파력은 번번이 적중되는 저주에 막혀 힘을 잃었다.
“후배님 볼 면목이 없겠어.”
클리포트 추종자들은 제일 까다로운 유형의 적이다.
피해를 입은 팀원은 없지만.
소모전으로 가면 내공이 한정적인 무극 팀이 너무나도 불리했다.
한 차례 교전 후 팀원들이 신준석의 곁으로 물러났다.
“팀장님, 저희가 길을 열겠습니다.”
“저주 술사를 줄여 놓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신준석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면 피해가 너무 크다.”
방점 공략은 파리 탈환의 시작점.
도시를 감싼 흑색 장벽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길을 여는 건 내가 맡지.”
“팀장님,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저희한테 맡겨 주십쇼.”
“더 많은 숫자로 밀어붙여야 성공 확률도 올라간다.”
신준석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전신을 감싸는 금빛 막.
호신강기다.
‘내공을 온몸으로 발현하는 건 가성비가 안 좋지만 어쩔 수 없나.’
신준석은 한숨을 삼켰다.
방점의 수비 병력이 만만치 않을 것 정도는 예상했다.
이계에서 소환된 괴물들도 강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상성에서 압도적으로 밀린다는 것이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공략하면 이길 수 있다.
‘적지 한가운데에서 그럴 수는 없지.’
신준석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전황을 뒤엎으려면 다소 무리하는 수밖에.
“잠깐 멈춰 봐. 형씨.”
“세르게이?”
“드림랜드에서 진 신세 좀 갚자고.”
불쑥 튀어나온 모히칸 스타일의 사내가 흉흉하게 웃었다.
전황을 살펴보던 김영수가 세르게이를 무극 팀 쪽으로 투입시킨 것.
“면목 없게 되었구려. 고맙네.”
“크흐흐, 신세를 진 건 이쪽이니 신경 쓰지 마라.”
세르게이는 재배열한 마나를 해방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얼음 폭풍.
저주를 쏟아붓던 클리포트 추종자들은 황급히 암흑 마나를 회수, 방어로 전환했다.
“훌륭하구려.”
신준석은 호신강기를 거두었다.
* * *
다섯 방점을 파괴한 직후.
파리를 감싼 흑색 장벽은 소리 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결계 규모가 원체 큰 만큼, 붕괴가 시작되었지만 한동안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각지로 흩어진 일행은 느긋하게 집결.
한 자리에 모여서 결계가 무너지는 것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스승님, 그래도 모일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건 적도 마찬가지일걸.”
“네?”
“우리 위치를 특정했을 테니 전력을 끌어모았을 거다.”
“그러면 그게 그거잖아요.”
지영이가 부쩍 아쉬움을 드러냈다.
“배부른 소리 하기는. 파리 탈환 후에는 훈련이다.”
“아, 아니. 결론이 왜 그런 식으로 나요!”
“너는 말을 아끼는 법을 배워야 해.”
전생에는 엄청 과묵했었는데.
그때가 그립다.
세상 살기가 얼마나 팍팍했으면 이렇게 수다스러운 처자가 말을 잃었을까.
하기야 멸망의 시대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지.
무너지는 장벽 사이로 조금씩 드러나는 대도시의 정경.
“이건 대체…….”
“내 사랑 파리는 어디로 간 거야!”
엘렌의 뾰족한 비명 소리가 인근을 뒤흔들었다.
빛의 도시라는 이명을 지닌 프랑스의 수도, 파리.
역사와 아름다움을 모두 품었던 찬란한 도시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드림랜드를 연상시키는 기괴한 건물들.
일부는 땅에 눌어붙어 버렸고, 어떤 건물은 중력을 거슬러 수 미터 위로 떠올랐다.
도로에 있어야 할 자동차들이 허공에 붕 떠오른 채 멈춰 있고.
사람들은 각자의 집에 구속된 채 두려움 섞인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곡되어 버린 도시의 풍광.
초현실주의 그림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흉가 테마로 꾸며진 유령의 집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지.
을씨년스러운 풍경에 일행의 눈가가 긴장으로 물들었다.
-다행히 여기 있는 필멸자들은 무사하구나.
“말했잖아, 별일 없을 거라고.”
걱정할 건 파리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라고.
나는 뒷말을 삼킨 채, 장벽 너머의 적을 가리켰다.
다크 마만트, 연옥 수호병, 펠 비스트 등 여태 마주했던 괴물들이 바글바글했다.
얼추 봐도 수천에 달하는 군세.
결계가 무너지는 동안 파리 곳곳에 분산시킨 병력을 집결시켰으리라.
“사부, 저기 위!”
커다란 그림자가 지면 위에 드리운다.
“크라라라라!”
새빨간 비늘과 쭉 찢어진 동공.
등 뒤에 달린 기다란 날개.
15미터가량 되어 보이는 괴생명체가 일직선으로 하강하면서 일행을 노렸다.
“레서 드레이크?”
“67층의 네임드 몬스터가 어째서…….”
다이아몬드 등급 플레이어들의 얼굴 위에 수심이 드리웠다.
-영락한 용이라, 본래의 격과 긍지를 잃어버린 불쌍한 짐승이로구나.
“하위 용족이니까 영락이라는 단어도 맞겠네.”
레서 드레이크는 앞서 상대해 온 괴물들과 등급 자체가 달랐다.
60층대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실제 난이도는 한 단계 더 높았다.
옐로우 스톰 팀원이 언급했듯, 네임드 몬스터 판정을 받은 괴물이니까.
70층대 난이도로 봐야겠지?
그런 레서 드레이크 수십 마리가 하늘을 배회하고 있다.
“휴, 긴장 좀 해야겠는걸.”
“길드장님, 하늘은 옐로우 스톰이 견제하겠습니다.”
“흥, 내 마법이면 모조리 얼음 동상으로 만들 수 있다.”
의욕을 불태우는 각국 랭커들.
“저놈들은 내가 처리하죠.”
나는 타오르는 열기 위에 찬물을 끼얹었다.
“아크야, 가능하겠냐?”
『하위 용족은 훌륭한 재료입니다. 주인이시여.』
“최대한 상하지 않게 배달해 주지.”
[축지를 사용합니다.]
발을 한번 내디뎌서 상대와의 거리를 0으로 만든다.
입맛을 다시던 레서 드레이크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을 때.
푸아아악-!
광서지로 놈의 가슴팍을 빠르게 찔렀다.
미스릴만큼 단단한 비늘이 강기에 찢겨진다.
손을 내밀 때 느껴지는 약간의 저항감을 무시하며 힘을 더하니.
드레이크의 심장이 광서지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펑- 하고 터져 버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하강하는 레서 드레이크의 사체.
원래대로라면 곧장 포식했겠지만.
지금은 모자라는 전력을 충당해야지.
『내 힘으로 그대의 영광을 재현하리니, 감았던 눈을 뜨고 주인을 섬기어라.』
으스스한 기운이 레서 드레이크의 사체를 삼켰다.
붉은 비늘이 우수수 떨어지고.
뒤이어 살점이 썩어 문드러져서 하얀 뼈만 남았다.
-콰루루루루!
뼈만 남은 하위 용족.
본 드레이크가 괴이한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네 동료를 늘려 주마.”
본 드레이크의 허리뼈를 가볍게 박차면서 도약.
레서 드레이크가 배회 중인 하늘 위로 가볍게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