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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287화 (287/300)

287화

눈앞을 메운 시커먼 구름.

프랑스로 진입하는 길을 모두 막아선 기류 사이로 괴물의 울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국경선을 관찰했다.

“향신료 제도의 영웅. 타국의 일에도 발 벗고 나서 주시니 감사합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마르첼로 칼바니.

EPU(유럽 플레이어 연합) 회장의 눈동자가 초조함으로 뒤덮였다.

“뭘요, 인류의 위기 앞에서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오오오, 참으로 훌륭한 인품이군요.”

“진입 계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영웅께서 보다시피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검은 구름 밖으로 도망치듯 물러나는 플레이어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등 각국의 랭커들을 모아 프랑스 내부로 진입을 시도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현대 화기는요?”

“구름에 흠집조차 내지 못합니다.”

예상했던 대로다.

[세계 단절]은 [허무계 이계 신전]보다 한 단계 위인 고위 연성진이다.

육안으로 보일 만큼 선명한 차원 굴절 결계.

“저희도 곧 진입 준비를 하겠습니다.”

“역천 길드에게 무운이 있기를.”

마르첼로 회장은 금세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인사 차원에서 온 모양이군.

하기야, 프랑스가 저 꼴이 되었으니 플레이어 협회장도 엄청나게 바쁠 것이다.

-그대는 너무하는구나.

“뭐가?”

-이리될 것이라고 예상하였지?

“맞아.”

-저 안에 있는 이들의 목숨은 고려하지 않은 게냐.

“걱정하지 마. 사람들은 무사하니까.”

현시대에서 클리포트에 대해 나만큼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례를 받은 르네 데이비스조차 내 지식에는 못 미칠 테니.

“저 정도 연성진을 유지하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해.”

하랍 세라펠과 가아그셰블라 종파가 손을 잡고 만든 대규모 결계.

프랑스 영토 곳곳에 설치한 연성진으로 이면 세계의 개념을 끌어오는 원리다.

사하라에서 본 [허무계 이계 신전]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을 뿐더러, 범위까지 넓으니 당연했다.

-설마, 필멸자들의 생명력으로 결계를 유지하는 게냐?

“응, 그러니까 함부로 못…….”

-그게 어찌 무사라는 단어와 연관이 되느냐!

“살려 둬야 두고두고 힘을 빼먹거든.”

프랑스 영토 안에 머무는 사람들은 연성진을 유지하는 배터리인 셈이다.

두고두고 살려 둬야 부정적인 감정, 그리고 생명력을 차근차근 빨아먹지.

결계에 갇힌 사람들은 평소보다 더한 피로감을 느낄 뿐.

없던 병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흐으응, 여는 그대가 목적을 위해 저 사람들을 희생시키지 않았을까 염려하였노라.

“내가 그럴 사람이냐?”

-훗, 여가 잘못 생각하였구나. 사과하마.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닉스.

정말이지.

가끔은 신왕급 성좌조차 경외하는 개념신급인지 잊을 정도로 자애가 넘치는 양반이라니까.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토마스 분석관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역천 길드.

그리고 엘렌을 위시한 골든 서클 팀.

르네 데이비스의 야망을 분쇄하려고 준비한 동료들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채, 내 지시를 기다렸다.

“참, 길드장님. 한 가지 제안이 왔습니다만.”

“제안이요?”

“예, 러시아의 랭커 세르게이가 합류할 뜻을 밝혔습니다.”

“러시아는 EU 가맹국도 아니잖아요.”

현 상황은 꽤나 미묘했다.

타국에 플레이어를 파견하는 건 자칫 외교적인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회귀 전 ‘향신료 제도의 비극’으로 알려진 부루섬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

인도네시아가 정식으로 파견 요청을 했으니 게이트 브레이크를 해결할 수 있었던 거지.

프랑스가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러시아가 EU 가맹국이 아니라서 개입 권한이 없다는 것.

“개인 자격으로 참가를 요청했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본인이 뒤집어쓰겠다는 말이군요.”

세르게이.

회귀 전, 어깨를 나란히 했던 전우이자 인류의 정점에 선 여섯 군주 중 한 명이다.

녀석이 박애가 넘치는 성격도 아닌데 굳이 참가할 이유를 모르겠네.

“하하, 우리나라가 나를 벌하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

걸걸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당사자가 직접 나오셨군.

세르게이는 나를 향해 곧장 걸어왔다.

“이유가 뭐지?”

“너 때문이다. 유진호. 내가 빚진 건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우리 사이에 빚이 있었나?”

“드림랜드. 네 도움 덕에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10대 마경 중 하나. 퉁구스카에 열린 이계와 현실이 뒤섞인 지역이다.

1차 대침식 후.

드림랜드의 괴물들한테서 뜯어낼 정수도 있겠다. 드림랜드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 얻은 정보는 러시아 플레이어들에게 큰 힘이 되었지.

세르게이 녀석. 의리가 있는 건 이때도 마찬가지구나.

“미스터 유, 그럼 슬슬 진입할 거야?”

“그래야지.”

주머니에서 투박한 휴대전화를 꺼냈다.

블랙 네트워크에서 준 기기.

기능이라고는 ‘전화’ 말고 없지만, 어느 기지국이나 인공위성에도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녔다.

“나다.”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이제 시작하자.”

난 시커먼 구름 앞에 섰다.

[데모닉 파워를 사용합니다.]

[모든 스텟이 신력으로 치환됩니다.]

신력.

뭇별 위에 자신의 이름을 기록한 존재, 성좌가 다룰 수 있는 힘이다.

여러 정수를 포식했지만 신력 자체는 늘리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신력 ‘스텟’이 존재하니 이런 꼼수라도 부릴 수 있지.

오른손을 넣으니 만져지는 게 없이 쑥 들어간다.

어디 보자.

그 구결이 어떻게 되었더라?

정수리에 자리 잡은 신력을 오른손에 집중시켰다.

콰지지지직!

강한 반발력이 금방이라도 손을 밀어낼 것처럼 거세게 일어난다.

“열쇠는 제대로 작동하는군.”

좋아.

다음은…….

“마담.”

-알겠어요.

프랑스 국경선 근처에 설치해 둔 100개가 넘는 마법진.

내 지시를 신호탄 삼아 초록색 광선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마법진에서 흘러나온 빛은 시커먼 구름을 감싼다.

[순환계 아인(AIN)이 발동됩니다.]

[공간과 차원에 간섭하는 모든 능력이 무효화됩니다.]

“어?!”

“이, 이건?”

근방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화들짝 놀랐다.

[세계 단절]과 가까이에 있는 자들이라면 모두 시스템 메시지를 들었을 터.

진짜는 이제부터다.

블랙 네트워크에 의뢰해서 프랑스 곳곳에 설치해 둔 마법진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소.

순환계 아인을 발동시키려면 내 역할이 중요했다.

-괜찮으냐? 출력 차이가 너무 크다만.

“상성상 앞서니까 괜찮아.”

난 자신 있게 대답했다.

클리포트는 본래 순환을 상징하는 [세피로트의 나무]를 거꾸로 만든 개념이다.

원본의 힘을 사용하는데 그림자가 버틸 수 있겠나?

“천사 놈들, 이런 데서 도움이 되네.”

자기들만의 정의를 중시하는 가식적인 놈들.

그럼에도.

회귀 전, 75층에서 같은 팀을 맺었던 천사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신력을 움직였다.

철커덩!

진한 녹광이 구름 안쪽으로 파고들더니 시커먼 기운을 해체했다.

경계를 지키던 괴물들이 반항했지만 초록색 빛이 스치고 지나간 곳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얼마 정도 지났을까.

시커먼 구름이 셀 수 없는 조각으로 쪼개지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세계 단절이 일부 해제되었습니다.]

침묵으로 물든 국경선.

“후.”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 * *

일행은 국경을 넘어 프랑스 영토로 진입했다.

-기분 나쁜 공기가 흐르는구나.

“한 번 섞여 버렸잖아. 완전히 분리하려면 시간이 걸려.”

순환계 아인의 힘으로 세계 단절을 중화시켰지만 완전하진 않다.

압도적인 출력 차이.

닉스의 지적대로 상성에서 앞섰어도 프랑스 전역에 설치한 연성진을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원소 마법의 위력이 10% 감소합니다.]

[마나 운용 능력이 10% 감소합니다.]

소소한 디버프까지.

군용 차량에 탑승해서 도로를 쭉 가던 중, 우회 도로 쪽에 자리 잡은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까마귀 떼처럼 공중을 장악한 이계의 괴물.

“크핫, 내 힘을 보여 주마.”

세르게이는 하늘을 검게 물들인 괴물들 앞에 섰다.

양팔을 벌린 채 마나를 집중.

그저 재배열을 하는 것뿐인데도 거센 바람이 일어났다.

데모닉 파워를 썼군.

내 비장의 카드 중 하나인 강력한 스킬.

원래는 세르게이의 독문 기술이자 상징과도 같았다.

회귀 전, 녀석이 습득 방법을 알려 준 덕에 잘 써먹고 있었지.

원주인이 데모닉 파워를 사용하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받아라!”

세르게이가 재배열된 마력을 해방했다.

[아이스 에이지]

눈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옛날 지구를 얼어붙게 만든 빙하기의 재림.

눈발에 섞인 절대영도의 한기가 괴물들의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냉기 속성 마나가 수십 겹으로 포개어지면서 만들어진 단단한 얼음이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수백에 달하던 괴물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무시무시한 눈발에 그대로 잡아먹혔다.

5성급 대마법.

아이스 에이지를 벌써 익혔을 줄은 몰랐군.

동행 중인 일행들조차 할 말을 잃고 세르게이를 흘겨보았다.

“명성은 들었는데 제법이잖아. 당신.”

“대련. 나중에 부탁드려요.”

엘렌과 카를라만 빼고.

전 사제 관계라고 이런 것까지 닮은 거냐?

“크크크, 엘렌 테일러는 얼마든지 환영이지. 옆에 꼬마는 뭐냐?”

“진호 유 길드장님의 제자.”

“제자라고? 너도 합격. 일이 끝나면 한판 붙어 보자.”

아오.

너희는 머릿속에 싸움밖에 안 들었냐!

“세르게이. 너무 힘 낭비하진 마라.”

“프랑스 사람들을 구하는 게 목적 아니었나?”

“아직 세계 단절은 유효하다.”

클리포트의 힘으로 분리된 세계를 원래대로 돌려놓았지만.

순환계 아인보다 세계 단절의 출력이 훨씬 높았고, 술법의 주체인 나도 완전하지 않았다.

세피로트의 힘을 100% 끌어내려면 종족이 천사여야 하거든.

“천사?”

“등에 하얀 날개 달린 애들 말하는 거 맞다.”

회귀 전이야 탑에서 나오는 천사종을 포식해서 세피로트의 힘을 제법 사용할 수 있지만.

지금의 나는 천사와 관련된 정수를 하나도 포식하지 못해서 순환계 아인의 힘을 최대로 낼 수 없었다.

“미스터 유, 그럼 먹구름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는 말이야?”

“너무 시간을 끌리면 그러겠지.”

연성진의 중심.

파리로 가야 한다.

“사부, 그럼 지체할 시간이 없지 않소?”

“그래서 말해 두는 거다.”

클리포트의 군세는 세계 단절이 발동된 이후, 프랑스 각 도시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과 생명력.

인간이라는 발전소를 제대로 관리하려고.

“놈들이 우리의 목적을 알아채면 길을 막아설 거다.”

“그 적들을 상대하려면 힘을 아껴 두라?”

“맞아. 알겠나, 세르게이.”

“끙, 어쩔 수 없지.”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프랑스 국경 곳곳에 설치해 둔 마법진이 세계 단절의 재발동을 억제하겠지만.

내 계산이 맞는다면 1주일 이상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가자, 파리로.”

일행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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