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열린 자동문 사이로 차례차례 나오는 일행.
지영이를 필두로 20명에 가까운 길드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부, 무슨 일로 우리를 부른 겁니까?”
“넌 왜 스승님한테 뾰족하게 말해.”
“선법 수련할 시간도 없다.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흥, 스승님이 부른다니까 좋아서 방방 뛰어놓고 아닌 척…… 읍읍!”
“그게 무슨 말이냐!”
핑 레이가 당황한 기색으로 지영이의 입을 막았다.
너희,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냐.
“아! 아아아! 물지 마!”
“우아 그어애(누가 그러래)?”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길드장님 앞이니 자중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토마스 분석관이 중재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애들 보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훈련 과정은 잘 따라주니 괜찮았습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경쟁심이 붙어서 더 효과가 좋았습니다.”
글쎄요.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성과와 별개로 견원지간인 두 사람을 말리느라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훤했으니까.
두 랭커와 무극, 옐로우 스톰 팀이 차례차례 나오고.
낯이 익은 여인이 그 뒤를 따랐다.
잠깐만.
“엘렌 테일러?”
“새삼스럽게 남처럼 부르기는. 아니면 얼굴 본 지 오래되어서 그러나.”
역천 길드와 블랙 네트워크 사이를 중계해 주는 정도만 부탁했는데.
왜 여기까지 온 거냐!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네.”
“네가 왜 여길 왔냐.”
“재미있는 일을 벌이는 것 같아서.”
엘렌은 내 곁으로 다가와서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했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이지만 1그램도 설레지 않았다.
이 녀석이 그런 정상적인(?) 목적으로 다가올 리가 없으니까.
“길드원들을 호출한 거, 르네 데이비스랑 관련 있지?”
“그걸 확인하려고 직접 왔냐.”
“응, 재미있어 보이잖아. 유럽 최강의 플레이어가 연루된 일이라니.”
엘렌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 머릿속에는 르네 데이비스랑 한판 붙어보려는 생각만 있을 거다.
“자세한 건 이따 이야기해 줄게.”
“아, 조오오옴.”
“길드원들한테도 공유할 거니까, 그때 들어.”
엘렌은 대놓고 애를 태웠다.
강한 상대 말고는 관심이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후후훗, 그대에게는 좋은 일이지 않느냐.
부정 못 하겠군.
엘렌과 골든 서클.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강력한 팀이다.
요청도 안 했는데 제 발로 수라장에 들어왔잖아.
곧 벌어질 르네 데이비스와의 혈전에서 강력한 전력이 되어줄 것이다.
“자리 옮겨서 이야기하자.”
“알겠어.”
엘렌은 신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전력이 보강된 건 좋은데, 괜찮은 게 맞나?
* * *
알제리의 수도 알제 북부에 위치한 5성급 호텔.
창문 너머로 시야를 가득 메우는 지중해의 절경이 보인다.
“우와아, 스승님. 여기 정말 멋져요!”
“놀러 온 거 아니니까 너무 흥분하지는 마라.”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로구나!
“……거 사람이 말 좀 하면 들어주시죠. 여신님.”
너무 좋은 곳을 잡아도 문제네.
일행이 오는 날에 맞춰서 호텔 비즈니스 컨벤션을 통째로 빌려놓았다.
블랙 네트워크에 의뢰해서 도청 장치도 모조리 검색.
그 뒤에는 방음 및 탐색 금지 마법을 3중으로 쳐놓았다.
“다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후배님의 말인데 당연히 와야지.”
“우린 역천 길드원입니다. 길드장의 지시에 따라야죠.”
두 랭커의 호응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며칠 동안 겪은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난 알제리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간결하게 요약해서 이야기했다.
인신 공양, 그리고 연성진.
알제리 곳곳에 남겨진 클리포트 종파의 흔적을 쫓았던 것.
마지막으로 사하라 사막의 혈투까지.
토마스 분석관이 경악했다.
“현지인을 클리포트 종파로 편입시킬 수 있다니요?”
“놈들을 심문해 본 결과, 세례 의식이라는 걸 받으면 된다고 합니다.”
“믿기지가 않는군요. 혹시 민간인에게도 가능한 겁니까?”
“예, 그걸로 세력을 빠르게 확장한 모양입니다.”
클리포트의 세례.
탑의 초대를 받지 못한 이들, 일명 비 각성자도 세례를 통해 힘을 깨우칠 수 있다.
영혼의 크기에 따라 각성하는 힘의 규모도 다르기는 하지만.
[가지]급만 되어도 실버등급 플레이어에 버금가는 힘을 보유하니, 가성비가 좋다.
“다 성공하는 건 아닙니다. 세례를 받는 과정에서 힘을 감당 못 하면 죽거든요.”
이건 심문을 통해 알아낸 게 아니다.
전생의 지식.
세례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마나 감응을 높여 줄 여러 보석과 산 제물이 필요하다.
제물이 반드시 인간일 필요는 없으니 동물 같은 걸로도 대체가 가능하지만.
이면 세계의 힘을 받다가 영혼이 짓눌리면 괴물로 변해 버린다.
영수 형님은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왜 그런 짓까지…….”
“간단하게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멸망의 시대가 되었을 땐 자발적으로 클리포트의 세례를 받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제 영혼을 저당 잡히고.
세례 과정에서 괴물로 변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더 큰 힘을 얻으려면 무슨 짓이든 벌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대여, 마음을 가라앉히어라.
닉스의 한 마디가 끓어오르는 감정을 진정시켰다.
후, 짧은 심호흡을 내뱉고는 일행을 훑었다.
“스승님, 저희를 부른 건 아직 끝나지 않은 거죠?”
“맞아, 그때는 내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한국을 떠나기 전.
지영이가 꺼낸 말이다.
역천 길드는 더 이상 내가 챙기기만 할 이들이 아니다.
전생에도 명성을 떨쳤던 정상급 플레이어들.
내가 그들의 잠재 능력을 끌어올려줌으로써, 모두 회귀 전보다 몇 단계나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적이라서 모두를 불렀습니다.”
“그럼 후배님, 그 적이 누구인지 알 수 있나?”
올 게 왔군.
나는 엘렌을 흘겨보았다.
“저번에 부탁했던 거.”
“안 그래도 입이 근질근질했지. 잘 들으라고.”
따악!
엘렌이 손가락을 튀기자 모니터 위에 한 인물의 얼굴이 나타났다.
“며칠 전, 미스터 유가 한 가지 의뢰를 했었어.”
“그 부탁이라는 것이 르네 데이비스와 관련이 있습니까?”
홍윤수가 의아한 기색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맞아요. 프랑스를 대표하는 랭커를 조사해달라는 거였죠.”
길드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여태 클리포트 잔당 이야기를 하다가 프랑스 최고 플레이어의 이름이 나오니 당황할 만도 했다.
“그래서, 조사 결과는?”
“공교롭게도 미스터 유가 조사를 부탁한 시점부터 외부 활동이 크게 줄었어.”
엘렌은 지난 6개월간 르네 데이비스가 활동한 것을 요약해 놓았다.
최근 2주 동안 눈에 띄게 줄어든 활동량.
니스에 열린 게이트를 공략한 후에는 길드 전체가 침체기에 빠져든 것처럼 탑 공략이나 게이트 폐쇄 어느 쪽 활동도 하지 않았다.
“좀 더 조사해 보니 길드원들의 숫자가 줄었더라고.”
“그럴 만하지, 놈은 길드원들을 알제리에 투입했으니까.”
“미스터 유가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여기 있다.”
난 욕망의 주머니에서 핀 팽을 꺼냈다.
미간을 찌푸리는 엘렌.
“이건 나디아 카셀의 독문 무기잖아.”
“더 확실한 증거가 있을까.”
“보아하니 나디아 카셀은 미스터 유한테 쓰러진 모양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 되었어, 꼭 붙어보고 싶은 상대였는데.”
“그 소망은 언젠가 들어주지.”
“뭐야, 네크로맨서 쪽 스킬도 있는 거야?”
레이즈 데드
달의 제사장의 정수를 포식하면서 강령술 계열 스킬도 얻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시도하려는 건 조금 다른 방향이지만.
“알제리에서 입은 피해가 그만큼 크다는 말이군.”
“참, 그러고 보니 최근에 르네 데이비스가 활동을 재개했어.”
“얼마나 되었지?”
“3일 정도.”
“손해를 메울 정도는 아닐 텐데.”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클리포트 세력이 알제리에서 입은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지구 곳곳에 열린 게이트를 촉매 삼아 넘어온 클리포트 추종자들 대부분이 사망.
세례로 끌어들인 민족 해방 전선 및 이슬람 극단주의 잔당들도 힘을 잃었다.
블랙 네트워크는 이 순간에도 음지에 흩어진 극단주의자들을 쫓는 중이다.
놈들을 궤멸시키는 건 시간문제.
그뿐이랴.
르네 데이비스의 오른팔인 나디아 카셀을 포함, 길드원 다수가 사하라 사막에서 전사했다.
지금은 내부 결속을 먼저 다져야 할 때.
블랙 네트워크가 르네 데이비스를 노린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터다.
이 상황에서 자신 있게 나서는 건 승부수가 있다는 이야기.
“오히려 좋아.”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직접 부딪쳐 보면서 알아내면 그만이다.
“록펠러 길드장에게는 현 상황을 공유했나?”
“아직, 미스터 유의 부탁이잖아.”
“이제부터는 사태가 더 커질 것 같으니 록펠러 길드장에게도 귀띔해줘.”
“마스터가 기뻐하시겠네.”
엘렌은 히죽 웃었다.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는 랭커.
현시점에서 유럽 최강의 플레이어로 알려진 르네 데이비스의 스캔들이다.
록펠러라면 이 정보의 가치를 최대로 끌어올릴 것이다.
회귀 전에는 멸망의 시대 직전까지 치열하게 겨룬 상대지만 이번 생에서는 동맹이니까.
전 세계에서 제일가는 길드는 록펠러에게 맡겨 두기로 한 게 둘 사이의 계약이다.
“마스터에게 정보를 알려 주는 대가는?”
“드라이스트레가와 다리를 놔 줘.”
“거긴 독일의 길드잖아.”
“록펠러 길드장과 친분이 있는 걸로 아는데.”
엘렌은 혀를 내둘렀다.
“그건 또 언제 조사했나 몰라.”
조사가 아니라 회귀 전의 지식이란다.
드라이스트레가.
독일 조선산업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선 기업, 지멘스사에서 설립한 길드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기업 계열사인 백호와 비슷한 포지션.
과거 르네 데이비스가 인류를 배반하고 프랑스를 지옥으로 만들었을 때.
윌리엄 록펠러는 드라이스트레가 길드와 연계해서 르네의 세력 확장을 막았다.
“마스터께 전해 드릴게.”
엘렌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르네 데이비스와 전면전을 벌일 교두보가 준비되었다.
한 발자국.
앞으로 한 번만 더 나아가면 미래의 불안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
“기대되는군.”
나는 웃음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