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치이이익!
나디아 카셀의 피가 강기에 타서 증기로 화한다.
무너져 버린 몸뚱이.
그녀가 제어하던 핀 팽 50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운이 좋군.”
회귀 전의 강적.
나디아 카셀을 알제리에서 마주친 건 여러모로 행운이었다.
공격과 수비에 모두 능한 만능 병기 핀 팽.
미니 사이즈 마법사들을 여럿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화력이 엄청났다.
“한데 그런 병기를 저치만 쓰느냐?”
“특별한 고유 능력이 필요해.”
고유 능력 [다중 공간 지각].
시야를 3인칭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지휘 외에는 쓸모가 거의 없어 보이는 고유 능력이지만 [핀 팽]을 착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뭐, 이미 상대해 본 녀석이라 그 틈을 찔렀지.”
방어막의 내구력은 무한이 아니다.
황룡아로 일시에 타격.
핀 팽이 링크하면서 방어막을 복구하려고 할 때 극야의 힘을 살짝 흘려놓았다.
“0.04초라는 타이밍을 맞추면 방어막 재구축을 막을 수 있어.”
“쉽게도 말하는구나.”
“전생에서 해낸 일이니까.”
“한데 핑 레이처럼 회유할 생각은 없더냐?”
“쟨 안 돼. 르네 데이비스한테 푹 빠져있는 놈이라.”
구룡문의 길드 마스터인 장 우페이처럼 갱생이 불가능하다.
이미 클리포트의 세례를 받기도 했고.
[하랍 세라펠(나디아)의 묘목에게 포식을 사용합니다.]
[포식한 정수 : 100%]
[정수 등급 : 희귀]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다중 공간 지각이 추가됩니다.]
[다중 공간 지각 - 불완전 버전]
등급: ★★
분류: 패시브
사용자의 감각을 3차원으로 확장한다.
나디아 카셀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인간이 아닌, 탑의 주민 판정을 받았다.
포식 대상이 된 것도 그 이유.
녀석의 ‘고유 능력’이 스킬화 되면서 조금 약화되었지만, 그래도 쓸 만했다.
[하랍 세라펠(나디아)의 묘목의 정수가 동굴인의 정수와 공명합니다.]
[다중 공간 지각을 사용할 시 인지 범위가 2배로 늘어납니다.]
감각을 끌어올리는 동굴인의 정수.
3인칭으로 감지하는 나디아의 고유 능력, 아니 열화된 스킬이 감지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호오. 그대도 저 병기를 다룰 수 있겠구나.”
“그렇기는 한데 효과가 좀 떨어지지.”
잠깐.
나디아를 포식했으니 [공허 비추기]로 구현하면 핀 팽도 다룰 수 있지 않을까?
네크로맨서들이 할 만한 고민이군.
닉스의 말을 들으니 의외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난 극야를 펼쳐서 땅에 떨어진 핀 팽을 모두 회수했다.
당장에는 쓸 수 없지만.
공허 비추기의 쿨타임이 다시 돌면 나디아를 되살리는 것도 고려해 봐야겠다.
“저들은 그냥 둘 셈이더냐?”
“설마, 존 도가 죽으면 곤란하다고.”
[공허 비추기를 사용합니다.]
[원시종 - 티라노사우루스 ‘렉시’를 구현합니다.]
[아크 리치 군주 ‘아크’를 구현합니다.]
카오오오오!
『주군의 부름에 응하였나이다.』
원시종 중 최강의 존재.
니플헤임의 냉기를 받아들이면서 죽음을 초월한 리치.
내 정수에서 분리되면서 자아를 지닌 소환수들이 극진한 예를 표했다.
바엘의 눈동자가 건재했을 때는 불러내 봐야 단번에 소멸될 게 뻔해서 아껴두었지만.
이젠 상황이 뒤집어졌다.
“클리포트 숭배자들을 모조리 죽여라.”
“카오오오!”
『주군의 명대로.』
블랙 네트워크의 역습에 밀려서 방어에 집중하고 있는 클리포트 집단.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 * *
[연옥 수호병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 100%]
[정수 등급 : 고대]
[스킬 - 수호의 정신이 추가됩니다.]
[수호의 정신]
등급 : ★★★
분류 : 액티브
발동 후 적의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 혹은 상쇄할 때마다 방어력이 5초 동안 10% 상승한다.
최대 10번까지 중첩되며 새 스택을 쌓을 때마다 지속 시간이 초기화된다.
방어나 상쇄.
어느 쪽이든 발동되는 유용한 스킬이다.
지속 시간이 짧은 게 흠이지만 급박한 전장에서는 신경 쓸 틈도 없이 스택이 쌓이니 문제도 아니었다.
“그대에게 방어력이라는 게 의미가 있더냐?”
“메탈 반사 장갑도 있고 호신강기의 방어력도 상승하니까 쓸 만하지.”
눈먼 공격만큼 전장에서 위험한 요소가 또 있을까.
수호의 정신을 활성화시키면 미처 대비하지 못한 공격도 수월하게 방어가 가능하다.
다른 가아그셰블라와 하랍 세라펠의 [가지] 녀석들은 포식해도 별 소득이 없었다.
정확히는 탑 19층에서 [다크매터 코어]를 획득한지라 이미 포식한 정수 취급을 받은 거지만.
르네 데이비스의 수하들도 마찬가지다.
나디아 카셀처럼 강하지 않아서인지, 놈들의 정수를 포식해도 고유 능력이나 스킬이 추가되지는 않았다.
“끅…….”
최후의 클리포트 추종자가 기절했다.
“흘흘, 유 이사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승리했구먼.”
“그 말씀, 정정하셔야겠는데요.”
“다른 의견이 있는가?”
“패배할 싸움을 뒤집었다, 라고요.”
존 도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자네의 조력이 없었다면 이 늙은이의 목숨도 위험했을 걸세.”
“블랙 네트워크 총수의 목숨값이 얼마나 됩니까?”
“흘흘흘, 가치를 따지기 어렵겠지.”
“방금 하신 말씀, 꼭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아무렴, 유 이사의 활약은 절대 잊지 않을 터이니 걱정 말게나.”
존 도는 암흑계의 거물이면서도 신용을 중시했다.
특히 자신의 발언은 꼭 지키기로 유명했다.
이만큼 생색냈으면 됐겠지.
“보스, 전장을 대부분 수습했어요.”
존 도의 곁으로 다가온 마담.
클리포트 추종자 중 살아남은 이들을 모두 붙잡았고.
마을에 끌려온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 미리 준비한 차량들로 돌려보내는 중이다.
급박했던 전투를 마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수완 하나는 대단하다니까.
존 도는 마담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납치된 사람들 중에 수상한 사람이 있던가?”
“이미 확보해 놓은 명단과 차이가 없더군요.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요.”
잠깐만.
“실종자 명단까지 확보했어?”
“호호, 유 이사님의 정보를 최대한 활용한 것뿐이랍니다.”
알제리로 넘어온 지 1주일도 안 됐다.
그런데 벌써 납치된 사람 리스트까지 뽑아내고 대조까지 하다니.
능력 많은 사람을 파트너로 둔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다.
“유 이사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얼마든지.”
“나디아 카셀의 배후가 누구인지 짐작하시나요?”
“글세, 같은 생각 아닌가.”
난 피식 웃었다.
“르네 데이비스.”
“상대는 유럽에서 제일가는 플레이어랍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이 상황에서 괜찮고 말고 할 게 있나.”
회귀 전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역사가 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다르지 않은 사실이 있다.
르네 데이비스가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개자식이라는 것.
-사적인 감정이 듬뿍 담겼구나.
영체로 돌아온 닉스가 후훗, 하고 짧게 웃었다.
* * *
사하라 사막에서 벌어진 혈투.
블랙 네트워크와 클리포트, 두 세력 모두 음지에 드리운 조직이다 보니 그 결과가 퍼져 나가진 않았다.
하지만.
그 여파는 착실하게 퍼져 나갔다.
북아프리카 곳곳에 스며든 클리포트 추종자들은 사막의 혈전에서 대부분 사망했다.
“호호호, 이제 시작이랍니다.”
마담은 존 도를 대신해서 단원들을 지휘, 알제리에 퍼져 있는 클리포트 잔당을 공격했다.
블랙 네트워크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르네 데이비스가 클리포트의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안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사하라 사막의 혈투와 연이은 소탕전.
클리포트 추종자들을 쫓는 과정에서 아이템이 나오는 건 덤이었다.
“전리품 획득은 유 이사님께 우선권을 드릴게요.”
마담은 사하라 전투 이후 꼬박꼬박 나를 이사라고 불렀다.
내 능력을 인정했다는 건지.
아니면 허울뿐인 이사가 아니라 블랙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인정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거면 됐어.”
은은한 노란색을 머금은 칼과 창, 그리고 방패.
모두 오리하르콘으로 제작한 병기다.
[신의 금속]이라고 불리며 탑 안에서도 구하기 힘든 금속.
클리포트 추종자들이 이면 세계에서 현실로 넘어오면서 가져온 물건들이다.
“가장 값진 물건을 고르시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네요.”
마담은 뒤끝을 드러냈다.
이 양반이 감정을 필요 이상으로 드러내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사막 전투 이후로 그녀의 본모습이 이따금씩 비쳐졌다.
전생에도 본 적 없는 희귀한 장면이라 생소했다.
“이 금속을 여신님께 진상하나이다.”
-공물로써의 가치가 모자라는구나. 하나, 그대의 정성을 보아 받아주겠노라.
눈빛 관리 정도는 하면서 그렇게 말하시지?
오리하르콘 제 병기를 보는 닉스의 눈빛에서 꿀이 떨어질 것 같았다.
노란빛을 띠는 검과 방패, 그리고 창이 모조리 녹아내렸다.
닉스의 붉은 눈동자에서 웅혼한 빛이 흘러나온다.
잃어버린 격의 복원.
“기분은 좀 어때.”
-부스러기 정도는 회복되었구나.
“여신님. 부스러기치고는 너무 강한 거 아니야?”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빈말이 아니다.
오리하르콘 병기를 흡수한 닉스의 힘은 이전보다 20% 정도 더 강해졌다.
닉스가 진심으로 나선다면 길드원 중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
미국 최고 랭커인 엘렌 정도는 되어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밤이라는 개념을 관장하는 여신답게 스케일도 남다르군.
블랙 네트워크가 발품을 팔 때, 나 역시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알제리 전역을 순회.
하랍 세라펠 종파가 설치한 연성진을 모조리 파괴했다.
위안인 것은 니제르나 리비아 쪽에 연성진을 설치하지 못했다는 점?
네트워크 망을 구축하듯 점진적으로 퍼트려야 해서 다른 나라들까지 뻗진 못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암세포처럼 아프리카 여기저기에 연성진이 퍼져 나갔겠지.
그걸 모두 찾아내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으으으.”
생각하기도 싫다.
알제리에 뿌리내린 클리포트 세력이 크게 흔들렸지만 반격은 없었다.
르네 데이비스를 꾀어낼 찬스라고 생각했지만,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 움직였다고 하는 게 맞겠지?
프랑스 남부의 도시 ‘니스’에 열린 게이트를 폐쇄하러 들어갔다가 공략에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고 한다.
놈이 공략을 마치고 나왔을 땐 알제리의 클리포트 세력 대부분을 상실했으니.
뒤늦게 움직이기보다는 블랙 네트워크의 행동을 감시한다더라.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쓸데없이 신중한 건 여전하네.
그러던 중.
“스승니이이이임!”
기다리던 아군이 알제리로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