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바엘의 동공에 아른거리는 사이한 빛.
숨을 한 번 들이마실 정도의 짧은 시간 만에 붉은빛이 공간을 격하면서 진호의 머리 위에 도달했다.
-위험하…….
닉스의 다급한 경고가 빛무리에 삼켜진다.
직경 30미터에 달하는 시뻘건 광선 기둥은 닿는 것을 모조리 소멸시켰다.
“미스터 유!”
마담의 고성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간을 허무하게 맴돌았다.
나디아는 허리 언저리까지 닿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휙 넘기며 빙그레 웃었다.
“쿡쿡, 흔적도 남지 않았군요.”
판데모니엄의 수장인 바알의 ‘개념’을 따서 만든 인공 성좌.
1천의 생명과 두 종파의 주특기를 엮어 낸 [허무계] 연성진으로도 눈을 불러내는 게 고작이었다.
준비는 힘들었지만 투자한 효과가 확실했다.
연옥 수호병들조차 아이처럼 가지고 놀던 진호가 광선을 한 번 맞은 걸로 소멸해 버렸다.
‘나머지 인원들을 정리할 시간은 충분해.’
르네 데이비스는 클리포트의 두 종파를 이용해서 전 세계 암흑가에 손을 뻗치는 중이다.
이 자리에서 어둠의 인형사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클리포트는 블랙 네트워크를 밀어내고 세계 각지의 암흑가를 좌지우지하는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다.
[허무계 이계 신전]의 지속시간은 아직 1시간 반 이상 남았다.
원래 세계와 격리되어 버린 이질적인 공간.
연성진 자체를 부수거나 공간에 간섭하는 스킬이 있어야 탈출할 수 있다.
“자, 거래를 하실까요?”
나디아는 어둠의 인형사를 내려다보며 자신 있게 외쳤다.
“거래는 개뿔.”
엉뚱한 곳에서 돌아온 대답.
[축지]
[용의 날개]
나디아는 고개를 위로 추켜세웠다.
붉은 날개가 시야를 뒤덮는다.
20미터까지 자라난 용의 날개가 암흑 투기로 타오른다.
팔짱을 낀 채로 오연하게 선 사내.
“어, 어떻게?!”
나디아가 두 눈을 연신 껌뻑였다.
헛것을 본 게 아닐까.
몇 번을 깜빡여봤지만 바엘에게 소멸당했어야 할 진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뿐이랴.
용의 날개를 휘감은 암흑 투기를 보면 닭살이 돋아났다.
플레이어의 한계를 넘어선 압도적인 출력.
세례를 받으면서 오러 블레이드도 펼칠 수 있는 나디아지만, 용의 날개를 보면 두려운 마음이 샘솟았다.
‘마치 르네 님을 배알한 것 같은…….’
나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르네 데이비스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불경을 저지른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는 마음속 응어리를 떨쳐내려고 크게 외쳤다.
“바엘의 눈이여, 저자를 소멸시켜 주십시오!”
만들어진 신의 눈동자가 진호의 움직임을 쫓았다.
붉은 동공에 아른거리는 막대한 암흑 마나.
이면 세계의 법칙이 섭리를 일그러트리면서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한다.
[만상침식(萬狀侵蝕)]
[절대부패영역(絶代腐敗領域)]
붉은 날개가 빛을 잃는다.
만물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는 바엘의 권능.
암흑 마나가 이면 세계조차 침식하며 그 주민이 되어 버린 진호의 육신을 서슴없이 잠식했다.
날개를 빼곡하게 채우던 암흑 투기가 제 색을 잃고.
하늘 위로 날아오르던 진호의 몸뚱이가 일그러진 세계와 일체화된다.
공간을 통째로 소멸시켰던 붉은 광선도 ‘침식’이라는 개념 일부를 분리시킨 것.
이번에는 공간을 없애는데 그치지 않고 즉발로 진호를 구성한 개념을 수정한 것이다.
‘피하는 건 불가능해.’
나디아가 승리를 확신했다.
[디어사이드]
[신살의 법]
서걱!
진호의 온몸을 휘감았던 사이한 빛이 잘려나간다.
방금 전까지 바엘의 간섭으로 형(形)과 태(態)를 잃어가던 육신.
어느새 본래의 색을 되찾고는 개변되는 법칙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렸다.
디어사이드.
종말의 대검 미스틸테인의 정수에서 추출한 대(對) 성좌 스킬이 발동되었다.
만상침식이 물질과 공간의 경계를 일그러트리고 기운까지도 부패시킬 때.
진호는 신살의 힘으로 권능의 근원을 잘라냈다.
그럼에도.
이미 바엘의 권능에 무너지기 시작한 육체를 수복하지는 못했다.
녹아내린 피부가 땅으로 흘러내리고.
용의 날개를 이루던 암흑 투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닿는 것을 모조리 파괴했다.
허공에서 일어나는 강력한 힘의 폭발.
진호는 그 중심지에 서 있으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무너져가던 육신이 시커멓게 물든다.
어둠의 육체.
닉스에게 하사받은 극야에 몸이 동화되면서 붕괴가 멈췄다.
“여신님.”
-기다렸느니라.
극야 자체가 된 진호에게 스며든 닉스.
밤이라는 개념 자체인 그녀가 진호의 어둠과 하나가 되면서 바엘의 만상침식이 허물어진다.
법칙을 수정하는 것은 신왕급 성좌조차도 다루기 힘든 막강한 권능이다.
이면 세계의 만들어진 신.
허수 공간이라는 특수성이 결합되었고, 원본인 바알의 성질을 따온 덕에 가능한 이적.
반대로 말하면 이적을 행한 대가도 막대했다.
낮과 밤.
이면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법칙 앞에 바엘이 비틀어 버린 섭리가 붕괴된다.
노란 눈자위 위로 푸른 균열이 여기저기 생성되었다.
역전된 법칙.
그 반동으로 바엘의 눈동자가 큰 타격을 받은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나디아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면 세계의 신.
블랙 네트워크의 총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준비한 비장의 카드다.
구현된 건 일부지만, 법칙을 침식해서 바꾸는 힘은 절대적이며 저항이 불가능했다.
르네 데이비스마저도.
상정하지 않았던 최악의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왜, 뭐가 잘 안 돼?”
진호가 바엘의 눈동자를 비웃었다.
붉은 동공이 찢어질 듯 크게 늘어났다.
* * *
전신에 스며든 고통.
만상침식으로 물질과 공간, 그리고 에너지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험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분쇄기로 몸을 갈아 버려서 가루로 만든 다음 펄펄 끓는 물에 쏟아붓고 휘휘 젓는 느낌?
회귀 전의 기억 덕에 바엘의 권능을 알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비명도 못 지르고 일그러진 공간의 오브제가 될 뻔했다.
“미스틸테인의 덕을 보네.”
우트가르트 로키한테 받은 종말의 대검.
고신족 및 성좌와 싸울 때를 대비해서 포식해 두었다.
유 · 무형을 가리지 않고 성좌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개입하게 해 주는 [디어사이드].
섭리가 비틀어지는 것을 느끼자마자 디어사이드를 발동, 바엘의 권능이 간섭하는 것을 빠르게 차단했다.
-그대가 경고한 대로구나.
“어,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리겠어.”
균열로 뒤덮인 바엘의 눈동자.
만상침식의 반동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전투 능력이 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나한테 대 성좌 관련 스킬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겠지.
[만상침식]
[차원대혈류(次元大血流)]
붉은 비가 하늘에서 아래로 빗발친다.
바엘의 눈동자에서 쏟아지는 암흑 마나.
하나하나에 침식의 개념이 깃들어 있어서 닿는 것을 모조리 변질시킨다.
-공간에 직접 간섭하지 않는구나.
“저 꼴이 됐잖아, 마나를 촉매 삼아서 간섭하는 게 전부일 거야.”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은 어림잡아 수천.
한 방울이라도 몸에 닿으면 썩거나 부식되면서 제 형태를 잃어버릴 것이다.
[메모라이즈 한 마법 – 솔라 익스플로전을 해방합니다.]
[메모라이즈 한 마법 – 아발란체를 해방합니다.]
연성진을 파괴하면서 틈틈이 메모라이즈 해 둔 마법을 방출.
두 구체가 충돌하는 순간 이클립스를 사용했다.
극양과 극음의 마나가 부딪치면서 생긴 반발력이 극대화되었다.
환한 빛이 일그러진 풍경을 뒤덮는다.
[허무계 이계 신전]의 영향으로 폭발의 위력이 대폭 감소했지만.
치이이익-!
붉은 비를 밀어내기는 충분했다.
폭발의 여파로 한순간 생긴 공백.
-단번에 파고 들자꾸나.
붉은 광선을 피하는데 [블링크]를.
그리고 거리를 한번 좁히느라 [축지]도 사용했다.
두 스킬 모두 쿨타임이 걸렸지만.
이럴 땐 달려가면 그만이지.
[바람길을 사용합니다.]
공기를 박차면서 다시 한번 도약.
이클립스로 생긴 공백을 한달음에 뛰면서 바엘의 눈동자에게 더 다가갔다.
눈동자와의 거리는 지척.
1초에서 2초 사이면 도달할 만큼 가까워졌다.
파괴의 빛이 사그라지자 다시 쏟아지는 붉은 비.
한 끗이 모자라지만.
[뇌둔의 술 – 뇌망을 사용합니다.]
콰르르릉!
뇌기를 수십 겹으로 짜서 만든 그물이 바엘의 암흑 마나를 옭아맨다.
우산처럼 붉은 비를 막아내는 뇌망.
이 정도면 충분하다.
바람길로 허공을 밟고는 손바닥에 내공을 집중시켰다.
[백수제왕무 – 14초식]
[도철각(饕餮角)을 사용합니다.]
손바닥에서 회전하던 강기가 해방되면서 넓게 퍼져나간다.
붉은 비를 막아내다가 소멸하는 번개의 그물.
찰나의 순간에 퍼져나간 강기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엘의 암흑 마나를 모조리 밀어냈다.
쩌어어어엉!
맹렬히 회전하는 강기가 바엘의 눈동자를 훑고 지나갔다.
『!!!!!』
이면 세계에서 만들어진 신이 비명을 질렀다.
말할 입조차 없지만.
사념으로 전하는 고통이 허무계 이계 신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저적- 저저적-
[만상침식]이 깨어지면서 생긴 균열이 수 배로 늘어난다.
천천히 잠기는 바엘의 눈동자.
한계 이상의 피해를 입어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된 것이다.
연성진으로 이면 세계를 구현했다지만 완벽하진 않다.
바엘 또한 클리포트가 만들어 낸 신일 뿐.
온전한 성좌가 아니기에 존재력도 완벽하지 않다.
노란 눈자위가 깨어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유리창이 깨진 것 같은 모습.
나는 호신강기를 두른 채로 바엘의 눈동자에게 다가갔다.
-역시나 그거로구나.
“응, 먹어야지.”
허무계 이계 신전으로 불러온 건 눈동자뿐.
포식해도 바엘의 능력을 모두 얻진 못한다.
뭐, 오히려 포식 가능한 정수가 너무 많지 않아서 다행이지.
이면 세계의 특성으로 만든 가짜 성좌라지만, 탑의 기준으로 치면 A급에서 S급 사이는 된다.
많이 먹었다간 탈이 나버릴걸?
전생에는 포식하지 못했던 정수라서 어떤 능력이 나올지 기대가 되었다.
무너져 가는 바엘의 눈동자를 만지자, 열기가 손바닥에 파고든다.
강렬한 분노.
이면 세계의 신은 역 소환되는 와중에도 노기를 터트렸다.
“어쩌라고.”
회귀 전에는 더한 것도 많이 받아봤거든?
전(前) 성좌한테 심장을 뚫려보기도 했는데 사념 따위야.
[거짓된 성좌 바엘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정수 등급 : 신화]
[포식한 정수 : 3.2%]
[포식한 정수 : 7.5%]
[······.]
가짜라고 해도 명색이 성좌라고.
포식에 시간이 걸렸다.
“놈이 멈춰있을 때를 노리세요!”
뾰족한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나디아 녀석.
꽤 당황한 모양이군.
“여신님.”
“흐응, 모자란 계약자를 챙겨 주는 것은 늘 여의 몫이로구나.”
“부하도 붙여 줄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사용합니다.]
현신한 닉스.
그 모습을 복제해서 만든 기계장치의 신이 동시에 극야를 펼쳤다.
얼마 정도 지났을까.
바엘의 눈동자가 완전히 감기고, 놈의 정수가 몸에 스며들었다.
[만상침식의 가호가 몸에 스며듭니다.]
회귀 전에는 얻지 못했던 정수.
난 차분하게 바엘의 정수를 포식하면서 생긴 능력을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