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존 도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함정일 줄은 알았지만…… 예상보다 더하군.’
이계(異界)화 된 사막.
모든 스텟이 하락하고 원소 마법의 위력까지 줄어들었다.
마법이야 정체불명의 결계에 무용지물이 되었다손 쳐도 능력치 하락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스텟 감소도 큰 페널티지만 조금씩 늘어나는 클리포트의 전력도 무시무시했다.
약 7미터의 신장에 오우거보다 더 흉험해 보이는 근육질의 몸매, 그리고 등 뒤에는 날개가 달린 악마.
연옥 수호병은 블랙 네트워크의 수준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태세를 다시 갖춘다.”
존 도는 지시와 함께 양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인형술 - 극의 조종]
[트랜스 암 모드]
인형 4기의 겉면이 파란색으로 물든다.
흩날리는 푸른 입자.
인형 병기의 핵심인 코어를 인위적으로 폭주시키는 인형술이다.
파츠츠츠!
무기에 감도는 오러 블레이드가 종전의 배 이상으로 길어진다.
한계 이상의 출력을 뿜어내는 코어 덕에 인형 병기의 전투력이 3배로 상승했다.
‘3분 안에 전장을 수습해야겠구먼.’
지속 시간이 지나면 코어 폭주의 여파로 인형 병기의 모든 능력치가 절반이나 깎인다.
폭주한 코어를 안정화시키면 금방 제 출력을 낼 수 있지만 급박한 전장에서 인형 병기를 수리하기란 불가능했다.
인형 병기들이 연옥 수호병 무리와 충돌하려고 할 때.
“영감님은 수습이나 하십쇼.”
진호가 나타났다.
인형 병기와 연옥 수호병 무리 사이.
존 도는 그가 움직이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공간을 접는 선법, 축지의 공능이다.
“자네…….”
“나름대로 이사인데 밥값은 해야죠?”
팔을 위로 올리는 진호.
인형 병기 4기가 그 움직임에 맞춰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소리가 난 원인은 인형과 연결된 존 도의 손가락이 떨리면서였다.
‘내, 내가 떨고 있다고?’
본능적인 감각.
존 도는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삶의 지혜 덕에 진호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직감했다.
머릿속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
[백수제왕무 - 13초식]
[황룡아(黃龍牙)]
진호의 손이 아래로 떨어질 때.
존 도는 방금 전에 느낀 불안감의 정체를 목도했다.
일그러진 공간이 찢겨지고.
블랙 네트워크 플레이어들을 고전시킨 연옥 수호병 무리가 피 분수를 뿜으면서 쓰러진다.
현실감이 없는 모습에 두 눈을 껌뻑였지만.
존 도의 인형 병기로도 쉽게 쓰러트릴 수 없는 연옥 수호병들이 고깃덩어리로 화한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괴물을 일격에 쓰러트렸다고?”
“역시 보스야, 강자를 미리 섭외해두었어.”
“태세를 정비한다. 물러나!”
블랙 네트워크 소속 플레이어들은 기꺼워하며 후퇴했다.
존 도는 당혹감을 빠르게 수습했다.
‘역으로 시험을 받게 되었구먼.’
진호가 나선 타이밍은 굉장히 절묘했다.
블랙 네트워크의 피해가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전.
동시에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그가 나섬으로써 기울던 전황의 무게추가 다시 평형을 되찾았다.
진호는 행동으로 질문한 것이다.
‘블랙 네트워크의 가치를 증명하라는 것.’
존 도는 웃음을 뇌까렸다.
블랙 네트워크의 수장이 된 뒤로는 늘 누군가를 시험하는 입장이었다.
진호처럼 그에게 시험지를 제출한 이가 얼마만인가.
채챙!
인형 병기의 몸놀림이 기민해졌다.
포위 형태로 공세를 펼쳤다가 후퇴하는 블랙 네트워크 플레이어들에게 이동.
펠 비스트와 연옥 수호병의 공세를 어렵지 않게 받아쳤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 지금은 수습이 먼저이니.’
존 도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블랙 네트워크의 신입 이사. 진호의 힘을 본 직후라서 당혹감이나 망설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흘흘흘, 어디서 저런 친구를 찾아왔을꼬.’
후방에서 지원 중인 마담을 떠올리며 존 도가 미소를 지었다.
* * *
쯧, 나는 혀를 찼다.
-후후훗, 칼끝이 흔들리는구나.
“실전에서는 아직인가.”
-파괴력만 놓고 보면 준수하지 않느냐?
“난전 중에는 적합하지가 않아.”
피로감이 몸을 짓누른다.
백수제왕무 후반부 초식은 막대한 내공과 체력, 그리고 정신력을 소모한다.
내 경지는 무인으로 치면 절정.
초절정에는 이르러야 백수제왕무 후반부 초식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다.
황룡아를 펼쳤다고 내공이 상당부분 소모되었다.
진(眞)여의주가 마나를 흡수. 내공으로 치환해 주기에 버티는 거지.
본래의 내 수준이면 후반부 초식을 여러 번 펼치지 못했을 것이다.
“컹! 컹!”
펠 비스트 수십 마리가 마을을 우회한다.
경신법을 사용한 것처럼 엄청난 기동력으로 후퇴 중인 플레이어들과 나를 동시에 노렸다.
양동이라.
제법 머리를 굴렸지만…….
[용의 날개를 사용합니다.]
[암흑 투기를 부여합니다.]
새빨간 날개가 폭발적인 기세로 튀어 나오면서 펠 비스트 무리를 쓸어 담았다.
쿠당탕탕, 용의 날개에 밀려 이계화 된 바닥을 구르는 괴물들.
피해는 크지 않았다.
뭐, 예봉을 꺾는 정도로 사용했으니까.
진짜는 이거지.
[쏜즈 미사일을 사용합니다.]
[탐욕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용의 날개에 맺힌 가시 수천 개를 잠시 묶어두고.
그 위를 암흑 투기로 감쌌다.
파파파팟!
매서운 기세로 날아가는 쏜즈 미사일.
펠 비스트의 거죽이 가시에 아른거리는 암흑 투기에 찢겨나간다.
[펠 비스트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정수 등급 : 고대]
[포식한 정수 : 100%]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마나 번이 추가됩니다.]
[마나 번]
등급 : ★★★
분류 : 액티브
접촉한 상대의 마나를 태운다.
다 채우지 못했던 펠 비스트의 정수도 100%까지 포식했다.
마나 번.
펠 비스트가 마법 계열 플레이어의 천적이라고 불리는 스킬이다.
여기에 다크 미믹의 정수를 포식하면 핑 레이가 익힌 [흡성대법]같이 대상의 마력을 빨아먹는 스킬을 시너지 효과로 얻을 수 있다.
“크르르르, 인간 따위가 제법이다.”
“적의 공격 면적이 넓으니 일 점 돌파한다.”
연옥 수호병들은 용의 날개를 보더니 줄지어 돌진했다.
피격 범위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계획.
대응력이 제법 뛰어나지만.
“내가 익힌 게 많아서.”
[백수제왕무 - 18초식]
[기린살(麒麟殺)을 사용합니다.]
일직선으로 오면 내가 더 편하지.
곧게 편 양팔을 회전하면서 기의 위력이 더해지더니.
왼팔을 쭉 내지르자 뇌기를 띤 강기가 번쩍거리는 빛을 토해내며 해방되었다.
기린살을 펼칠 때 취하는 자세가 우습긴 해도.
위력 하나만큼은 뛰어났다.
기린의 형태를 띤 강기가 들이닥치자, 연옥 수호병들이 방패를 지면에 쿵- 하고 찍었다.
방패 전면을 뒤덮은 암흑 투기.
기린은 흉포한 괴성을 지르며 연옥 수호병의 방패와 암흑 투기를 찢어발겼다.
몸이 찌릿하다.
양팔을 창대 삼았으니 반동이 전신을 덮쳤다.
“빈틈이다. 죽인다.”
막 소환된 연옥 수호병이 대검을 높이 들었다.
나는 가볍게 땅을 밟았다.
[토둔 - 토룡출수를 사용합니다.]
무공을 펼치면서 암암리에 끌어올린 선기.
백수제왕무 후반부 초식을 펼치며 선법까지 전개하려니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토룡은 내 등을 노리던 연옥 수호병을 물어뜯었다.
일그러진 공간을 찢으면서 소환된 이계의 괴물들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쉼 없이 증원되고 있어서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놓았다간 금세 숫자를 채울 게 분명해서 용의 날개로 꾸준히 견제했다.
“제법이군요. 동양인.”
낭랑한 음색이 귓가에 아른거린다.
르네 데이비스의 심복.
나디아 카셀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저 오만한 눈깔.
예나 지금이나 재수 없는 건 마찬가지군.
차라리 잘 됐어.
회귀 전에는 나디아 카셀을 제거하느라 고생 깨나 했는데 일을 덜었다.
짝짝!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일그러진 세계가 재조립된다.
[허무계 이계 신전]은 처음 마주했던 연성진, [위상봉인 이계 신전]처럼 이면 세계와 동기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용자의 의지대로 공간을 재조립하는 공능.
인질을 모아둔 마을은 수십 미터 위로 치솟고, 그 아래로 깊은 해자가 파였다.
푹 꺼진 해자에서는 아름드리 나무 굵기의 촉수들이 수백 개씩 올라왔다.
악마들의 소환 위치도 변경되었다.
전투태세를 갖춘 마을 위.
연옥 수호병들은 해자 뒤에 도열해서 방패를 추켜세웠다.
[허무계 이계 신전]이 이면 세계의 존재를 불러냅니다.]
[바엘의 눈이 강림합니다.]
반으로 갈라진 하늘.
그 사이로, 커다란 눈동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지름은 약 50미터.
누런 눈자위 사이로 붉은 동공이 섬뜩한 빛을 흩뿌린다.
하늘에 고정된 눈동자가 나를 노려본다.
“꺄악!”
“컥, 커어억.”
“살려주세요…….”
클리포트에게 납치 당한 사람들이 비명을 흘렸다.
-비겁한지고, 인질극을 벌이다니.
“아니, 인질극 같은 게 아니야. 연성진을 증폭시키는 제물이지.”
-하면 저들이 모두 죽을 운명이라는 게냐?
“2시간 안에 연성진을 파훼하지 못하면.”
하랍 세라펠의 연성진은 단기간에 생명력을 빨아들이지 않는다.
설치된 곳 아래에 흐르는 지맥.
혹은 범위 안에 있는 생물들의 생기를 은근히 빨아들이면서 힘을 증대시킨다.
저 연성진에는 인신 공양에 특화된 가아그셰블라 종파의 힘이 섞여 있다.
그러니 허무계처럼 강력한 연성진을 발동시킨 거지.
저 위에 떠 있는 눈깔만 해도 그렇다.
“바알을 흉내 낸 악마. 그 일부를 구현한 것만으로도 이적에 가까운 행위야.”
-바알이라면 그 기분 나쁜 성좌 아니더냐?
“응, 클리포트라는 게 없는 개념을 만들다 보니 실존하는 악마를 어느 정도 따왔거든.”
하랍 세라펠 종파가 섬기는 존재는 바엘.
바알과 동일한 개념이나, 실존하는 판데모니엄의 마신이 아니라 이면 세계의 추종자들이 만든 인공 ‘신’이다.
데미우르고스.
만들어진 신이자 성좌.
뭇 필멸자들에게 추앙을 받는 진짜 성좌에 비해서는 격이 부족하지만.
눈깔만으로도 무시하기 어려운 강적이다.
“종말을 맞이하세요.”
나디아의 엄중한 선언과 함께 바엘의 눈이 사이한 빛을 흩뿌렸다.
두근- 두근-
육감이 경고음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