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마담이 준 휴대전화는 편리했다.
기능이야 얼마 없지만.
장소를 따지지 않고 전화가 된다는 것은 참 좋은 기능이다.
전력 보강을 떠올리자마자 토마스 분석관에게 연락했다.
-알겠습니다. 길드원들을 준비시키죠.
“참, 그리고 엘렌한테도 부탁 하나만 전해 주세요.”
-엘렌 상무라면 길드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뒤, 미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만.
“오히려 잘됐네요. 골드 문의 힘이 필요한 일이거든요.”
난 르네 데이비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해달라는 말을 남겼다.
블랙 네트워크에 의뢰하는 게 더 확실하지만.
이 타이밍에 르네의 이름을 언급하면 클리포트와 연관 지을 게 뻔했다.
내가 르네를 의심하는 건 전생이라는 답안지가 있기 때문.
마담이 정보 출처를 궁금해하면 난감하다.
-알겠습니다.
토마스와 통화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벨 소리가 울렸다.
이 전화기로 연락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마담, 무슨 일이라도?”
-클리포트에서 납치한 사람들을 한 장소에 모아놓은 정황이 포착되었어요.
“함정이겠군.”
-맞아요. 적이 함정을 팔 가능성은 78.2%랍니다.
“알면서도 습격을 강행하겠다는 건가.”
-예, 보스가 그렇게 정하셨어요.
어둠의 인형사.
존 도가 직접 나섰으니 어지간한 함정은 뭉개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참여하지.”
-미스터 유가 와 주시면 천군만마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죠.
“그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한 것 아닌가?”
-호호. 저는 보스를 믿지만 안전장치가 있으면 더 좋잖아요.
마담은 가볍게 웃었다.
갈라테아의 도면을 얻으면서 강해진 존 도.
회귀 전에는 갈라테아의 도면에 기록된 비의를 모두 익히면서 하이 랭커까지 올라갔었다.
그렇지만.
내가 도면을 준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그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을 터.
존 도가 허무하게 당하면 이쪽이 곤란하다.
블랙 네트워크가 건재해야 전 세계의 암흑가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정보력 면에서도 마찬가지.
한국 정부와 골드 문이 협력해주고 있지만 음지의 정보는 블랙 네트워크가 한 수 위다.
“위치나 알려줘.”
-작전 내용은 휴대전화로 전송할게요.
통화를 끊자마자 문자가 날아왔다.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한 마을.
오아시스 주위로 형성되어 있는 주거지가 블랙 네트워크의 목표였다.
“3시간 후에 공격을 시작할 예정이라…….”
빠르기도 하군.
클리포트에서 술수를 더 부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속도를 올려야겠어.
“여신님, 꽉 잡아.”
-머리털을 붙들면 되는 게냐?
“거긴 좀.”
[블링크를 사용합니다.]
[축지를 사용합니다.]
[운류보를 사용합니다.]
…….
지도로 대충 방향을 가늠하고는 모든 이동기를 사용했다.
이런 상황이야 멸망의 시대 때는 익숙했다.
지도라도 있는 게 어디야.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훑으면서 납치된 사람들을 억류시킨 마을로 달려갔다.
* * *
이르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세워진 작은 마을이다.
총인구는 유동 인구를 포함해서 약 100명 정도.
사하라 사막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중간지점으로 삼는 마을이지만.
“아빠! 아빠!”
“우리를 풀어줘요!”
마을에서 수용 가능한 인원의 10배나 되는 사람들이 붙들려 있었다.
주위를 감시 중인 검은 로브의 인영(人影)들.
클리포트에게 영혼을 판 인류의 배반자들이 마을을 철통같이 감시했다.
-약자를 핍박하는 비겁한 자들이로고.
쯔쯔, 닉스가 혀를 찼다.
기척을 최대한 감춘 채 마을을 둘러보던 중.
사막 여기저기에 은 · 엄폐 중인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미스터 유, 이쪽이랍니다.”
펄럭-.
노란색 막이 옆으로 젖혀지더니, 마담이 불쑥 튀어나왔다.
바벨탑에서 구매 가능한 위장포.
10,000cp라는 높은 가격에 1회용이라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아이템이다.
블랙 네트워크가 클리포트의 준동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단단히 준비를 했네.”
“마침 공격을 시작하려고 했어요.”
“내가 도울 건?”
“호호호, 이번은 저희 선에서 최대한 해결할 거라 지켜봐 주세요.”
쉬이이잉- 펑!
하늘 위로 솟아오르더니 화려한 빛을 내뿜는 섬광탄.
동시에 위장포가 펄럭이면서 백 단위의 플레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소 플래티넘급.
풍기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백 단위의 플래티넘등급 플레이어를 동원할 수 있는 길드가 얼마나 있을까.
국내 정상의 자리를 지켰던 화랑도 불가능한 동원력이다.
미국의 골드 문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겠어.
[블랙 로즈 가일]
[익스플로전]
[블랙 바인딩 블룸]
[다크니스 기가 플레임]
…….
최소 3성 이상 되는 마법들이 클리포트 신자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글거리는 화염과 어둠을 내포한 가시넝쿨.
일대 지형을 바꿀 만한 파괴의 힘이 마을 주변에 쏟아지는 순간.
지이이잉!
푸른 방어막이 반구 형태로 나타나면서 마법 공격을 모조리 흡수했다.
2파, 그리고 3파가 이어졌지만 방어막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마담은 자신만만한 태도를 고수하며 힘 있게 외쳤다.
“공격을 멈추지 마세요.”
“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왜죠?”
“저 방어막. 마법의 구조를 분해해서 연성진의 힘을 강화하고 있다.”
화염이 푸른 막을 두드리는 순간, 폭발음이 나오는 대신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클리포트의 결계는 마법과 충돌할 때 0.01초 단위로 재배열된 마나를 해제.
마법 계열 플레이어의 제어에서 벗어난 순수한 마나를 흡수했다.
-잔재주가 제법이로구나.
“이면 세계의 존재라는 기원 덕에 가능한 수작이지.”
한 번 방출한 마법은 무효화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거나.
그도 아니면 술식 과정에서 간섭해서 마법 발동 자체를 무력화시켜야 한다.
마담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원거리 포격 중단. 이제부터는 근접전으로 이행하겠습니다.”
사막 여기저기에서 모래가 튀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대기하던 근접 계열 플레이어들은 돌진을 개시했다.
간격이나 호흡이 전혀 맞지 않는 공세.
블랙 네트워크라는 조직의 특성상 협동과 거리가 백만 광년 정도 차이가 있으니 별수 없다.
“저 불신자들에게 심판을!”
[가아그셰블라의 가지]
[하랍 세라펠의 가지]
놈들의 머리 위에 붉은 글자가 아른거린다.
클리포트 종파의 세례를 받은 배반자들.
그들은 지구의 인간이지만, 시스템상 ‘적’으로 판정되었다.
붉은 마법진이 지면 여기저기에 드리운다.
음산한 기운과 함께 솟구치는 이계의 괴물들.
이면 세계의 사냥개인 펠 비스트 수십 마리가 소환되었다.
“크르릉! 컹컹!”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블랙 네트워크 소속 플레이어들은 펠 비스트를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가아그셰블라의 가지들이 저주를 연달아 사용하면 서포터들의 축복이 삿된 기운을 몰아냈다.
“흘흘, 이 늙은이가 나설 때가 되었구먼.”
존 도.
블랙 네트워크의 수장은 양손을 까딱였다.
모래를 파헤치며 튀어나오는 인형들.
팔은 여섯이요, 머리가 둘 달린 휴머노이드형 인형들이다.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온 파란 실이 인형 4기의 몸과 연결되었다.
“신입 이사 덕에 강화시킨 귀염둥이라네.”
존 도는 나를 힐끔 바라본 후 인형 조작에 집중했다.
사막을 빠르게 횡단하면서 전장으로 파고든 인형 4기가 팔을 휘둘렀다.
각 팔에 달린 병장기 위로 푸른 기운이 아른거린다.
오러 블레이드.
깨달음을 동반해야 펼칠 수 있는 비기를 영혼 없는 인형의 몸뚱이가 펼친 것이다.
서걱!
블랙 네트워크 소속 플레이어들의 공격을 버티던 단단한 피부가 오러 블레이드에 찢겨나간다.
존 도의 인형들은 무시무시한 돌파력으로 두 종파의 방어벽에 구멍을 냈다.
진형이 와해되자 두 종파의 ‘가지’들이 당황했다.
“도망가지 마, 맞서 싸워!”
“제길, 이런 괴물들이 어디서 튀어나온…… 끄륵.”
인형 병기가 난입하자마자 순식간에 전세가 기울었다.
마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아직 기뻐하는 건 이를걸.”
“함정을 숨겨 두었다고 해도, 이만한 전력 차를 엎는 건 불가능해요.”
“과연 그럴까?”
난 팔짱을 낀 채 전장을 바라보았다.
마을 주위를 지키고 있던 ‘가지’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 말인즉슨.
모두 지구의 원주민이라는 것.
클리포트 놈들은 아직 전력을 꺼내지 않았다.
“가아그셰블라 종파의 특기가 뭔지 아나?”
“인신 공양. 비무장지대 사태 후, 미스터 유가 발표한 자료를 봤어요.”
“그럼 저들의 역할이 뭘까.”
인형 조종에 열중이던 존 도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마담은 처음으로 동요를 드러냈다.
“설마…….”
우우웅!
마을 중심부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빛.
초대형 연성진이 마을을 포함, 반경 수 킬로미터를 뒤덮었다.
“저놈들의 피가 트리거인 셈이지.”
[허무계 이계 신전의 영역에 강제 편입됩니다.]
[당신은 현실의 인물입니다. 대칭 세계에서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0% 감소합니다.]
…….
하랍 세라펠의 연성진이 발동되면서 세계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 * *
경계가 무너져 버린 세계.
연한 회색을 띤 건물들은 액체처럼 흐물거리면서 땅에 흘러내리고.
사막의 모래 알갱이들은 바람처럼 흩날린다.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초현실적인 풍경을 현실로 옮기면 이런 모습일까.
이전에 경험했던 [위상 봉인]과는 다른 풍경이다.
“환영합니다. 블랙 네트워크 여러분.”
인질 사이에 있던 한 여인이 건물 위로 올라섰다.
나디아 카셀.
르네 데이비스의 오른팔이다
저 녀석이 여기에 있다는 건…… 내 추론이 맞았다는 증거로군.
“그녀가 왜 여기에?”
마담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질문을 던졌다.
“누구인데 그렇게 놀라나.”
“르네 데이비스, 프랑스에서 제일가는 랭커의 측근이에요.”
“간단하네, 그 녀석이 클리포트랑 손을 잡았겠지.”
미리 확보한 답안지로 풀이 과정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나디아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환영식을 준비했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짝짝!
일그러진 풍경 사이로 이계의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옥 수호병]
[펠 비스트]
어림잡아도 백 단위의 숫자.
블랙 네트워크 소속 플레이어들은 갑작스러운 적의 출현에도 당황하지 않고 난전을 펼쳤다.
챙! 채앵!
“이놈들, 오우거보다 강해!”
“다이아몬드급이잖아.”
“버텨, 보스가 함께하는 한 지지 않는다!”
빠르게 늘어나는 부상자.
존 도의 인형 병기들이 전장을 누볐지만, 한 번 기울기 시작한 전황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구경 잘했수다.”
난 마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미스터 유, 이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나요?”
“어느 정도는.”
걱정하지 마.
당신네 진형의 피해는 크지 않을 거니까.
존 도의 인형 병기를 믿고 관망했는데, 그 판단이 옳았다.
나디아 카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거물이 납셨군.
“이쪽도 보답을 해 주마.”
[운류보를 사용합니다.]
난 왜곡된 땅을 밟으면서 전장으로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