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지이잉!
푸른 웜홀 너머로 한 무리가 걸어 나온다.
프랑스의 랭커.
유럽 최강의 플레이어.
그 외에도 무수한 수식어를 보유한 자, 르네 데이비스가 선두에 섰다.
“르, 르네 님, 공략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머리가 벗겨진 사내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물어보았다.
기욤 가렐, 파리 시장을 역임 중인 노련한 정치인이지만 이번 게이트 사태 앞에서는 쩔쩔맸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
그 옆에 생성된 게이트는 S급이라는 극악무도한 난이도를 부여받았다.
게이트 브레이크를 막지 못하면 파리의 중심 지역을 포기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
르네 데이비스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공략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오, 오오오! 역시 파리의 영웅! 대단하십니다!”
파리 시장의 감탄을 신호탄 삼아 미리 준비해 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때 아닌 길거리 공연.
인근 도로가 혼잡해졌지만 그 누구도 욕을 하지 않았다.
파리를 위기에서 구해 낸 영웅.
프랑스의 자랑.
르네 데이비스의 승전보에 시민들이 모두 기뻐했다.
“사랑해요! 르네 님!”
“우리의 자랑!”
“프랑스의 자존심! 정의의 사도!”
“날 가져요! 엉엉!”
르네 데이비스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환호하는 인파를 둘러보며 여유롭게 손을 흔들었다.
반면에 그 뒤를 따르는 길드원들은 침착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게이트 공략의 주연인 르네에게 모든 공을 양보하기라도 하듯.
기묘한 분위기지만 게이트의 위험에서 벗어난 시민들은 위화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길드 하우스까지 모시겠습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대기 중인 전열 차량에 탑승한 르네.
창문을 올리자마자 입가에 감돌던 미소를 거두었다.
“귀찮군요. 이래서 우민들이란.”
음성에 섞인 경멸감.
르네 데이비스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환호하는 시민들을 흘겨보았다.
“클클클, 정의의 사도가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미리 차량에 탑승해 있던 노인이 쉰 소리로 대꾸했다.
“외부 행동은 자제하라고 했을 터인데요?”
하랍 세라펠의 묘목.
노인의 정체다.
“큰 변수가 생겨서 말입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안의 무게는 당신이 아니라 내가 판단합니다.”
차량 내부가 르네의 살기로 범벅이 되었다.
심지가 무른 사람이라면 발작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진한 사념.
노인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면서 힘겹게 대꾸했다.
“연성진이 다수 파괴되었습니다.”
“연성진이?”
“그렇습니다.”
“하랍 세라펠의 연성진은 그 누구도 파훼하지 못한다고 자신하지 않았던가.”
르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알제리와 니제르에 설치 중인 연성진.
지맥과 그 위에 살아가는 이들의 힘을 천천히 빼앗아서 대칭을 이루는 세계, 클리포트를 구현하는 대규모 의식이다.
‘곤란하게 되었군.’
르네는 맞은편에 앉은 노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클리포트와 맺은 계약.
하랍 세라펠의 ‘묘목’이 되면서 순식간에 몇 단계를 넘어선 힘을 얻게 되었다.
르네 데이비스는 클리포트의 세례를 받으면서 플레이어의 한계를 넘어섰다.
연성진을 설치하는 건 힘을 부여받은 것에 대한 값.
끈을 둔 정부 각료와 기업들을 동원해서 클리포트 세력이 알제리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당신들의 무능함이 불러온 참사 아닙니까?”
“끌끌, 인정하지요. 그러니 새 묘목께서 불민한 저희에게 힘을 보태주셔야겠습니다.”
“그러면 파괴할 수 없다고 자신한 연성진이 왜 부서졌는지부터 파악하죠.”
“얼추 파악했습니다.”
노인은 품속에서 보주를 꺼냈다.
구슬 한가운데에 일렁이는 커다란 어둠.
일렁이던 검은 영기가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저 자, 동양인이로군요.”
“연성진을 파괴한 자입니다.”
“나디아, 알아보겠어?”
르네의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이 보주를 빤히 관찰했다.
“한국 플레이어인 유진호입니다.”
“극동(유럽에서 동아시아를 지칭하는 단어)의 작은 나라?”
“예.”
“잠깐만, 내 기억이 맞는다면 가아그셰블라 종파에서 준비한 수단을 막은 것이 유진호일 텐데.”
“그렇습니다. 마스터.”
르네는 오른손으로 콧등을 꾹 눌렀다.
비무장지대에서 공작을 벌인 가아그셰블라 종파.
한국에 큰 혼란을 야기, 그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자들로 이면세계의 괴수들을 더 불러낸다는 계획이 보기 좋게 실패했다.
남은 잔당은 하랍 세라펠 종파와 접촉.
지금은 르네의 후원 아래에서 다시금 세를 불리는 중이었다.
‘당시에만 해도 나한테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만.’
입이 쓰다.
지구에 소환된 가아그셰블라 종파의 잔당을 거두었을 때만 해도 르네에게 이득이었다.
내심 극동에 있는 유진호에게 고마움마저 느꼈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하랍 세라펠의 묘목]이 들고 온 소식은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곤란하게 되었군요.”
르네의 한 마디에 차량 내부가 조용해졌다.
아까처럼 살기를 드러내던 것과 달리, 내부에 한기가 감돌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곤란하다’라는 표현.
분노가 임계에 가까워졌을 때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이었다.
“연성진은 얼마나 파괴되었습니까?”
“14%입니다.”
“유진호가 파괴공작에 들어선 시점은?”
“하루 전입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10일입니다. 그렇기에 르네 님을 뵈러 온 것입죠.”
“나디아, 다음 일정은?”
“니스에 열린 A급 게이트 공략이 예정되어 있어요.”
“이후 일정은 아무것도 잡지 말아주시죠.”
르네는 좌석에 등을 딱 대었다.
연성진을 지키는 것도 급하지만 그가 연기 중인 ‘정의의 사도’라는 가면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했다.
노인이 다급한 표정으로 르네의 손을 붙들었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나디아와 길드 전력의 1/3을 파견하겠습니다.”
길드원들은 이미 클리포트의 세례를 받았다.
르네 직속으로 배치해서 같은 종파의 ‘묘목’인 노인의 지시조차 받지 않는 이들.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례로 강해진 덕에 미국의 골드 문보다도 더 높은 전투력을 보유했다.
“감사합니다.”
르네는 손을 휘휘 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유진호라는 자, 연성진을 무슨 수로 파괴한지는 모르겠으나…….’
꼬리를 무는 상념을 억지로 끊어냈다.
나디아를 파견하기로 한 이상, 진호가 살아남을 수단은 없었다.
르네 본인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플레이어.
미국 랭킹 1위인 엘렌 테일러도 세례를 받아 강해진 나디아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인프라를 복구하려면 시간이 꽤 들겠어.’
르네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유진호’라는 존재가 들어있지 않았다.
* * *
3일이 지났다.
나는 경신법으로 사하라 사막을 종횡무진으로 누볐다.
[백수제왕무 - 10초식]
[백택군림각(白澤君臨脚)을 사용합니다.]
쩌엉!
땅 아래로 파고든 내기가 연성진을 뒤흔든다.
가벼운 진동.
백택군림각의 힘을 연성진 파괴에 집중시켜서 주변에 피해가 가는 것을 최대한 방지했다.
-이 마을에 있는 마지막 연성진이로구나.
“사람 귀찮게 말이야.”
연성진을 파괴하고는 지도를 확인. 다음 마을을 향해 달렸다.
-한데 왜 차량을 이용하지 않는 게냐?
“내가 더 빠르잖아.”
-그대가 효율을 중시하는 건 알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클리포트가 내 이동 경로를 파악하는 데 혼선도 줄 겸 이러는 거야.”
아무도 없는 사막이라면 속도를 더 올릴 수도 있다.
사막 전용 차량이나 낙타를 이용하는 것보다 4배 이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게 가능하니.
“귀찮긴 하네.”
사박- 사박-
사막을 경유하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중에 중얼거렸다.
-그대가 선택한 길이니라, 악으로 버티어라.
“예예, 참으로 힘이 됩니다요.”
투덜거리면서도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럴 땐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는 게 큰 도움이 되는구나.
“도움은 무슨, 감으로 때려 맞추는 거고만.”
-이미 벌어진 역사를 되짚으며 연성진의 위치를 파악한 게 아니더냐?
“놈들이 처음 진출하는 위치부터 틀려먹었어.”
전생에는 미국의 사탄 숭배자들을 흡수.
미국을 중심으로 멕시코, 그리고 남아메리카에 세력을 퍼트렸다.
회귀 후에는 하랍 세라펠 종파의 시작점부터 달라졌다.
-변수가 생겼구나.
“놈들이 나타난 위치는 동일할 거다.”
가아그셰블라 종파가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비무장지대에서 모습을 드러냈듯.
하랍 세라펠의 추종자들이 지구로 넘어오는 데 사용한 게이트도 동일할 것이다.
추측할 수 있는 건 누군가가 지구에 넘어온 하랍 세라펠 종파와 접촉했다는 것 정도.
-왜 그리 생각하느냐?
“뜬금없이 북아프리카에 뿌리를 내렸으니까.”
-하면 누군지도 짐작했겠구나.
“거기까진 아직.”
블랙 네트워크에서는 클리포트와 손을 잡은 이들을 추적하는 중이다.
이탈리아 마피아.
그리고 프랑스 기업 중 몇이 엮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정작 그들을 움직인 ‘배후’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오호라, 여의 앞에서도 말을 아끼는 게냐?
“내가 뭘.”
-그대의 표정만 봐도 아느니라.
이래서 눈치 빠른 여신님이란.
“르네 데이비스의 수작일 가능성이 높아.”
-인류의 배반자 말이더냐?
“그 녀석이 개입했다면 모든 게 딱 맞아 떨어져.”
알제리에 개입 중인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 마피아.
회귀 전의 지식으로 답을 추론, 풀이 과정에 엮어 내면 꽤나 그럴싸했다.
-전생과 달라진 시간의 흐름 때문에 확신하지 못하는구나.
“예리한걸.”
-후훗, 그대를 지켜본 것만 2년째이니라.
르네 데이비스가 인류를 배반한 건 2030년 이후의 일이다.
이 가정이 맞으려면 놈의 타락이 4년이나 앞당겨져야 한다.
내가 회귀하면서 발생한 나비효과라고 보기에는 인과관계가 전혀 없단 말이지?
-그대는 너무 기억을 맹신하는구나.
“왜, 뭐가.”
-회귀 전의 지식이 반드시 진실이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
닉스의 말은 내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전생에서 르네가 인류를 배반했던 시기를 알게 된 건 놈 스스로가 자백해서다.
놈의 말을 100% 신뢰할 수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꼭 진실이라는 법은 없겠어.”
-이제야 사물을 편견 없이 보는구나.
“다 여신님 덕분이야.”
닉스의 통찰력 덕에 생각의 폭을 넓혔다.
만약 르네 데이비스가 회귀 전에도 이른 시기에 클리포트와 손을 잡았다고 한다면.
북아프리카에 생긴 이변을 모두 설명하는 게 가능해진다.
“마담에게 전해 줘야겠군.”
나는 각오를 다잡았다.
르네가 클리포트와 연관이 있다면 쉽게 끝날 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동료가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