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사박- 사박-
지평선 너머로 펼쳐진 모래사장 위에 우두커니 섰다.
인근 도시에서 제법 멀어졌다.
주위를 둘러봐도.
넓게 기감을 펼쳐도 느껴지는 것이 없다.
“이 정도면 충분하군.”
나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꽤 멀리 왔구나.
“마을 한복판에서 후반부 초식을 펼쳤다가는 난리 날걸?”
주먹에 내기를 두른 채로 가볍게 휘둘렀다.
퍼엉!
모래언덕 일부가 기파에 휘말려서 푹 파였다.
단순히 기를 발현한 게 이 정도인데.
강기 기반으로 펼친 초식을 마구잡이로 펼쳤다가는 도시 하나가 쑥대밭이 될 것이다.
-그대에게 초식의 파괴력을 절제할 재량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당연히 있지, 근데 고생하면서 수련할 필요는 없잖아.”
광활한 사막.
마음 편히 수련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눈앞에 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구나.
“얼마든지.”
-폭마기와 체술을 같이 운용하는 것도 꽤 효과적인 것 같다만.
“그래도 무공보다는 한 수 아래야.”
백수제왕무 후반부는 전반부보다 위력이 더 강하다.
강기 운용을 전제로 구성한 초식들.
체술에 폭마기를 섞는 건 [포식]이라는 고유 능력 덕에 벌일 수 있는 기행이다.
원래대로라면 상응하는 깨달음이 있어야 가능하겠지.
오러, 혹은 오러 블레이드처럼 말이야.
“체술의 등급이 더 높다면 모를까.”
-과연, 이해하였도다.
그러고 보니 [용의 날개]로 체술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무공이야 내 손과 발의 연장선이라서 날개로 운용하기 어렵지만.
이것도 실전에서 응용해 볼 가치가 있겠어.
“잡생각은 여기까지.”
후우-
긴 한숨과 함께 모든 잡념을 흘려보낸다.
동시에, 백수제왕무 6성에 도달하면서 떠오른 초식들을 꼼꼼하게 되짚었다.
회귀 전에도 익힌 무공.
그렇지만.
탑 시스템의 영향을 받기에, 과거의 기억만으로는 익힐 수 없다.
백수제왕무의 경지가 6성에 이를 때까지 기다린 이유.
거기에, 후반부 초식은 필멸자의 한계를 넘어선 육체 능력을 요구한다.
어느 쪽이든 후반부를 펼칠 조건을 충족시킨 건 최근이다.
“그러니 집중해야지.”
수라마령심공의 내기가 팔뚝을 뒤덮는다.
피부 위로 올올이 솟구치는 선명한 검은 기운.
절세 보검보다도 날이 선 강기는 더 이상 권(拳)의 형태가 아니었다.
도강(刀罡).
육신으로 구현해 낸 한 자루의 칼이다.
백수제왕무 후반부는 육체를 여러 ‘병기’에 빗댄 것을 전제로 한다.
뭔 말이냐 하면.
팔은 칼이요, 다리는 봉이란 말이지.
전반부 초식은 육체능력을 최대로 끌어내는 방식이지만.
후반부는 기를 운용함으로써 한계와 규격을 벗어나게끔 구성되어 있다.
나는 팔뚝으로 구현한 도(刀)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바람의 흐름이 검의 궤적에 밀려서 양옆으로 밀리고.
그 여파로 발생한 폭풍이 사막 인근을 뒤흔든다.
도강에 실린 힘은 바람을 엉클어트리는데 그치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모래 언덕 하나가 도강의 그림자에 삼켜지는 순간, 큰 폭음과 함께 대량의 모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도강이 일으킨 기류에 휘말린 알갱이들이 사방으로 날리면서 때 아닌 모래 폭풍이 발생했다.
나는 극야의 힘으로 전신을 감쌌다.
타타타탕!
무수히 튀는 모래 알갱이.
두 손 놓고 있었으면 엄청 따가웠겠어.
-폭풍을 일으키는 힘이라.
“완벽하게 펼친 게 아니야.”
쳇.
나는 혀를 찼다.
백수제왕무 후반부 1초식.
황룡아(黃龍牙)를 제대로 펼쳤다면 모래 언덕이 날아갈 게 아니라 기다란 고랑을 새겼을 것이다.
-여가 보기에는 꽤 훌륭해 보인다만.
“도강을 유지했으면 폭발이 아니라 베었을 거야.”
오른팔에 아른거리는 강기.
시퍼런 칼날이 번뜩이지만, 날 끝이 미묘하게 흔들린다.
‘벤다’라는 초식 본연의 성질을 완벽하게 담아내지 못해서 기 일부가 새어나간 것이다.
[백수제왕무의 성취가 올랐습니다.]
[1.3% → 3.2%]
꽤 후한 판정이고만.
회귀 전의 기억을 지닌 내 기준에는 못 미쳐도.
시스템이 보기에는 황룡아를 제법 훌륭하게 펼친 모양이다.
후웅! 훙!
몇 번을 반복해서 휘두르니 금세 내공이 1/3 가량 소모되었다.
진(眞)여의주의 공능으로 마나를 내공으로 치환.
소모된 기가 빠르게 차오른다.
황룡아를 펼칠 때마다 흔들리던 칼날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전에 했던 짓인데, 못하는 게 이상하지.”
난 짧게 투덜대며 도강을 거두었다.
언제까지고 첫 초식에 매달릴 수는 없으니까.
부족한 건 실전에서 채우면 된다.
다음 초식은 부법(斧法)이다.
-처음 자세와 큰 차이를 못 느끼겠다만.
“기 운용 방식이 달라.”
손바닥 중심에 아른거리는 검은 내공.
빙글빙글 돌더니 널찍하게 회전하면서 반월(半月) 형태의 도끼날로 구현되었다.
손의 움직임에 맞춰 크게 궤적을 그리는 도끼날.
투콰콰콰!
사막에 기다란 선이 그어지더니 동시다발적으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좀 쉽네.”
후반부 2초식.
도철각(饕餮角)은 황룡아보다 한결 나았다.
강기 운용에 익숙해져서일까.
아니면 강기의 운용 원리가 ‘베는 것’이 아니라 ‘해방’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속도라면 황룡아보다 더 빠르게 익숙해질 수 있을 것 같다.
“흐흐흐, 좋아.”
-또 저 웃음이로구나.
하아, 닉스의 한숨을 BGM 삼아 무공 수련에 몰두했다.
* * *
기가 소용돌이치고.
사막이 쉼 없이 들썩인다.
백수제왕무의 여파로 생긴 폭풍은 규모를 더 불려가더니 일대를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필멸자가 만든 대재앙이라.
닉스의 감평이 귓가에 아른거린다.
[백수제왕무 - 18초식]
[기린살(麒麟殺)을 사용합니다.]
은은한 뇌기를 띤 강기가 하늘을 겨눈다.
쭉 뻗은 왼손을 창대처럼.
곧게 모은 손끝은 날의 형상을 부여해서 펼치는 기예다.
콰르르릉!
손과 팔뚝을 휘감은 강기를 해방하자 천둥소리와 함께 용솟음치며 위로 날아간다.
구름에 생긴 커다란 구멍.
기린살의 강기가 닿았다고 하기 보단, 강기의 여파가 하늘에 미쳤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아무렴.
무공의 사거리가 1천 미터를 넘겠나.
“이제 절반이네.”
-더 안 할 셈이더냐?
“몸이 못 버텨.”
손과 발이 파르르 떨린다.
백수제왕무 후반부 초식을 연거푸 펼쳤다.
[무지개의 휘광석]으로 육체를 개변한 후에 느껴보지 못했던 피로감이 오래간만에 고개를 들었다.
세상을 뒤덮었던 햇빛이 사그라지고.
닉스의 영역인 밤이 되었다.
한나절이 지나도록 한 번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단전의 내공이 모자랄 때면 곧바로 진여의주의 공능으로 다시금 힘을 돋우었다.
“아오오오, 뻐근하다.”
명치 아래가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다.
단전이 깃든 위치다.
내공이라는 기운은 마나보다 훨씬 민감하다.
모자란 내공을 진여의주로 족족 채웠다지만, 그 양이 많아지면서 수라마령심공이 흔들렸다.
내가 회귀 전에 지고의 경지에 올랐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여의주로 마나를 치환하던 중에 주화입마가 왔을지도 모른다.
-쯔쯧, 그리 무식하게 수련을 하니 그런 것 아니더냐.
“때로는 무리할 필요가 있어.”
알제리에 뿌리를 내린 클리포트 세력.
하루를 돌아봤을 뿐인데도 규모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무공.
무리를 해서라도 익혀두면 손해 볼 게 없잖아?
-그리 생각하면 한국에서나 익힐 것이지.
“새 능력에 익숙해지는 게 더 급했지. 백수제왕무 후반부야 이미 가본 길이니까.”
어디까지나 후순위였을 뿐이다.
나는 한나절 동안 수련했던 초식들을 다시 한번 되짚었다.
13초식 - 황룡아(黃龍牙).
도(刀)법. 종으로 휘둘러서 적을 베는 초식.
14초식 - 도철각(饕餮角).
부(斧)법. 휘두르는 방향으로 강기를 해방해서 다수를 짓누르는 초식.
…….
18초식 - 기린살(麒麟殺)
창(槍)법. 양팔을 창대 삼아 내공을 회전, 손끝으로 방출하여 적을 꿰뚫는 초식.
후반부 초식은 전반부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 대신 익숙해지기까지는 펼칠 때마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게 단점이다.
회귀 전의 경험이 있어도 현재의 육체와 무공의 성취가 모자라서다.
띠링~♬ 띠리링~♬
투박하게 생긴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린다.
이야.
모래 폭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에도 전화가 터지는구나.
이 정도면 순수 기계가 아니라 마도 공학을 접목시킨 게 아닐까 의심된다.
“여보세요.”
-저…… 미ㅅ…… ㅇ…….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신호가 터진 게 기적이지.
오른손을 위로 올렸다.
팔에 감도는 흑색 도강.
처음보다 훨씬 안정감이 더해진 황룡아를 크게 휘둘렀다.
서걱!
모래 폭풍이 칼날에 실린 힘에 잘려 나간다.
사막 인근을 뒤덮었던 기상이변이 한순간에 소멸했다.
폭풍을 지워 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굉음이 발생해야 했지만.
황룡아는 그 소리마저도 완전히 소멸시켰다.
“잘 들리나?”
-미스터 유, 어디시기에 이렇게 신호가 잘 안 가는 건지.
“사하라 사막.”
-개인적인 용무가 사막에 있을 줄은 몰랐네요.
나는 그저 웃었다.
알제리까지 와서 무공 수련을 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위치를 파악했어요.
“함정일 가능성은?”
-0은 아니지만 낮다고 봐야죠.
“뭘 짜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겠군.”
-보스께서 직접 오실 거라고 하니 다른 곳을 추적해주셔도 된답니다.
호오.
어둠의 인형사가 직접 행차한다라.
갈라테아의 도면을 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전장에 나설 줄이야.
도면을 해석하기에도 벅찬 시간일 텐데.
“꽤 무리를 하는군.”
-호호, 보스께서는 미스터 유한테 감사하다고 전해 달라고 하신걸요.
하랍 세라펠과 가아그셰블라 종파가 손을 잡은 상황.
업그레이드 된 인형 군단의 힘이 필요했다.
“좋아, 그쪽은 계속 추적해줘. 나는 단독 행동을 이어가지.”
블랙 네트워크의 수장. 존 도가 나선다면 일처리에 빈틈이 없을 것이다.
가아그셰블라 종파에서 벌이는 인신 공양은 그쪽에 맡기고.
난 알제리에 설치된 연성진을 파괴해야겠다.
-알겠어요. 무운을 빌죠.
“그쪽도.”
통화를 끊은 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의 검격으로 구름마저 개인 덕에 뜨거운 햇볕이 여과 없이 피부에 닿는다.
“충분하겠어.”
어떤 변수가 생겨도 백수제왕무와 용의 날개를 전개하면 이길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