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하랍 세라펠 종파.
놈들의 주특기는 ‘공간’이다.
“성스러운 땅을 짓밟은 사특한 자다.”
“제물로 바치자.”
갈색 피부에 하얀 터번을 쓴 이슬람 신자들.
정확히는 신자로 분장한 [하랍 세라펠의 가지] 여럿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우웅!
보라색 빛이 지면에서 솟구친다.
하랍 세라펠 종파의 주특기인 연성진이 발동되었다.
[위상 봉인 이계 신전의 영역에 강제 편입됩니다.]
[당신은 현실의 인물입니다. 대칭 세계에서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40% 감소합니다.]
[원소 마법 재배열 속도가 20% 감소합니다.]
[신성 주문의 효과 및 사용 속도가 30% 감소합니다.]
…….
무수한 메시지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오래간만이군.
하랍 세라펠의 특기인 이계 신전.
이 영역에 진입할 때 전신을 휘감는 더러운 기분은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세계를 분리시키는 결계라니.”
“분리보다는 덧씌운다는 표현이 맞을 거야.”
“심상을 구현하는 건 봤지만, 이런 건 들어보지 못하였구나.”
“참, 기운 거둬줘. 놈들이 저걸 사용했으니 바깥에서는 뭔 상황인지 알 수 없을 거야.”
닉스는 사방으로 펼쳤던 극야의 힘을 모조리 거두었다.
일그러진 주위의 풍경.
방금 전까지만 해도 쨍쨍한 빛을 흩뿌리던 태양이 온데간데 사라지고, 황혼이 드리웠다.
꺼져가는 빛 사이로는 온갖 이계의 괴물들의 실루엣이 비쳐지고.
스산한 붉은 안광이 사방에서 아른거린다.
“범인이라면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 영혼의 색을 잃어버리겠구나.”
“원래 있어서는 안 될 이면 세계를 구현한 거니까.”
불완전한 거지만, 이라고 뒷말을 붙였다.
“저 이단자를 보라.”
“두려운 마음을 감추고 애써 의연한 척하는구나.”
“새 질서의 발판이 되어라.”
[하랍 세라펠의 가지]들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으으음.
저 녀석들.
탑에서 소환된 존재가 아니었네.
“알라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사교와 손을 잡은 건가?”
“흥, 알라께서는 우리의 곤경을 외면하셨다.”
“타락한 세계 대신 새로운 법을 쓰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인가!”
하아-
난 짧게 한숨을 쉬었다.
민족 해방 전선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어떤 식으로 타락시켰는지 곧바로 이해가 되었다.
“네 피를 양분 삼아주마.”
터번을 쓴 ‘가지’들이 손을 펼쳤다.
손아귀에 들린 붉은 돌.
“피 냄새가 너무나도 강하구나.”
닉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혈석이라고, 생명을 갈아서 만든 거다.”
“그 생명이라는 것은…….”
“사람이겠지.”
“참으로 끔찍하도다.”
쓸 만한 정보가 이제야 나오는군.
혈석은 클리포트 10대 종파 중에서 ‘가아그셰블라’만 다룰 수 있다.
인신 공양과 저주가 특기인 종파.
다른 종파도 ‘인신 공양’을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가장 높은 효율을 자랑하는 게 가아그셰블라다.
현지에서 개종된 클리포트 신자들이 혈석을 사용한다?
알제리 곳곳에서 일어나는 행방불명 사건의 배후에 가아그셰블라 종파가 있을 지도 모른다.
“오시오소서, 빛을 먹는 어둠이여.”
“당신의 사냥개를 내려주소서.”
일그러진 풍경 사이로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체고 10미터 크기의 괴물.
새빨간 피부와 쭉 튀어나온 주둥이.
날선 이빨이 수백 개나 되는데 주황색으로 물든 빛을 반사시키면서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등 위에는 기다란 촉수가 달려 있는데 그 끝이 나를 가리켰다.
펠 비스트.
클리포트의 사냥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이아몬드등급 플레이어도 못 이기는 괴물이다.”
“불신자, 네 행위대로 심판당하라.”
컹! 컹!
펠 비스트 다섯 마리가 일제히 달려든다.
연성진의 효과로 뒤틀려버린 세계가 마구 흔들렸다.
“돌진하는 기세가 제법이구나.”
“S급 게이트에서나 볼 법한 괴물이거든.”
“그리 말하는 것 치고는 너무 태연한 것 아니더냐?”
S급이고 뭐고.
내 상대는 아니니까.
[용의 날개를 사용합니다.]
[암흑 투기를 부여합니다.]
등 뒤로 솟구친 붉은 날개.
검붉은 암흑 투기가 ‘용’의 인자로 만들어 낸 뼈대 아래를 꽉꽉 채워 넣는다.
붉은 날개로 홰를 치니 정면으로 달려오던 펠 비스트 무리가 쿠당탕- 소리와 함께 반대편으로 나뒹굴었다.
“깨개갱?!”
튕겨난 펠 비스트들이 당혹감으로 짖어댈 때.
용의 날개를 더 늘려서 휘감았다.
펠 비스트를 감싼 암흑 투기가 톱날처럼 돌아간다.
콰드드득!
섬뜩한 소리에 펠 비스트들의 비명소리가 삼켜졌다.
“크, 클리포트의 사냥개가!”
“말도 안 된다.”
“허상인 거야, 우리가 헛것을 보는 거라고.”
배신자들이 지껄이든 말든, 난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용의 날개를 관찰했다.
“실전에서 써 보니 괜찮네.”
펠 비스트 다섯 마리를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쓰러트릴 정도라.
마나 소모가 심하다는 단점 하나 빼고는 효율이 뛰어났다.
“알아볼 것도 다 봤으니, 이제 끝내자.”
날개 위에 맺힌 무수한 가시들.
탐욕의 가호가 암흑 투기와 쏜즈 미사일을 엮어낸다.
10미터 크기의 날개에 맺힌 가시는 수천에 달했다.
빗발치는 쏜즈 미사일의 비.
암흑 투기가 더해진 공세는 [하랍 세라펠의 가지]들을 휩쓸었다.
한 줄기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압도적인 화력.
놈들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가시의 비에 휘말려서 제 형태를 잃어버렸다.
“시시하구나.”
“하랍 세라펠 종파는 본연의 능력보다 연성진에 많이 의지하거든.”
이계화 된 공간에서 괴물을 소환하거나 클리포트의 힘을 구현하는 게 주 방식이다.
방금까지 숨을 쉬고 있던 [하랍 세라펠의 가지]들은 세례 의식으로 편입된 이들.
원래는 지구인이라는 거지.
“이면 세계의 구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놈들이 그 능력을 제대로 끌어올 수 있을까.”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인류의 배반자.
회귀 전, 세계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이들을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너덜너덜한 [하랍 세라펠의 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같은 종에게는 포식이 소용없다 하지 않았더냐?”
“이놈들은 영혼을 클리포트에게 넘긴 시점에서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하랍 세라펠의 가지.
세례를 받으면서 ‘가지’가 되었다는 건 탑, 혹은 게이트를 타고 넘어온 클리포트 종파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하랍 세라펠의 가지를 포식합니다.]
“포식도 가능하지.”
배반자들아.
너희는 시체도 남기지 못하게 될 거다.
내가 뼈 채로 씹어 먹어주마.
* * *
파팟!
한 번 발을 뗄 때마다 풍경이 빠르게 바뀐다.
-차량은 이용 안 하는 게냐?
“내 발이 더 빨라.”
사하라 사막 인근 도시들은 고층 건물이 별로 없다.
모래 섞인 바람이 수시로 불어닥치기 때문에 건물을 높게 올리는 것을 기피했다.
그 덕에 지붕을 타고 움직이기가 훨씬 수월했다.
-부정하지는 못하겠구나.
시속 150킬로미터.
혼잡한 시내에서 이만한 속도를 낼 수 있는 차량은 없을 거다.
-후훗, 이렇게 내려다보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구나.
“운치는 무슨.”
-더 속도를 올려 보아라.
“그러면 건물이 부서질 거다.”
도약이나 착지 과정에서 애꿎은 건물 지붕을 박살 낼지도 모른다.
발을 뗄 때마다 힘 조절을 하느라 얼마나 힘든데?
-한데, 그대 홀로 움직일 셈인가?
“연성진을 감지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하랍 세라펠이 설치한 연성진은 기운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게끔 특수한 파장으로 보호받는다.
전생에 놈들과 지겹도록 겨뤄 온 나조차도 요령으로 겨우 감지 가능한 수준.
연성진의 구조와 파장을 읽어 내는 방법을 전해 주기도 어렵고.
막상 알려 줘도 제대로 써먹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러니 내가 움직여야지.”
-쯔쯧, 부하들은 둬서 어디에 쓰는 건지.
“클리포트가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 알았나.”
마나 흐름에 예민한 지영이나 핑 레이한테 익혀두게 했으면 훨씬 편해졌을 텐데.
후회는 만년 지각생이라고 했다.
이 상황에서는 내가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잖아.
하루 동안 파괴한 연성진만 15개.
시 단위만 다닌 게 아니라 작은 마을도 들렀다.
연성진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전투를 세 번 더 겪었다.
[하랍 세라펠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 100%]
[정수 등급 : 고대]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메모라이즈가 추가됩니다.]
[메모라이즈]
등급 : ★★★
분류 : 액티브
마법을 저장한다. 메모라이즈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소량의 마나가 소모된다.
*6시간 마다 재사용 가능.
*저장 횟수 – 0/3
“생각보다 빨리 얻었어.”
나는 히죽 웃었다.
클리포트의 침략이 앞당겨지면서 생긴 의외의 소득이다.
괜찮은 스킬도 얻었겠다.
곧장 메모라이즈를 사용했다.
[솔라 익스플로전을 메모라이즈합니다.]
[마법의 규모가 큽니다.]
[최대 보관 시간은 144시간입니다.]
“쯧, 7일인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
“재사용 시간이 6시간이잖아. 조금 아쉽지.”
대단위 파괴 마법.
동급 스킬인 아발란체도 메모라이즈 유지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을 것이다.
예비가 하나 생긴 것에 만족해야겠지?
-꽤 즐거워 보이는구나.
“인류를 배반한 쓰레기를 처단하는데 보상이라도 있어야지.”
[마법의 지배자]를 얻으면서 마나 재배열 속도가 월등하게 증가했다지만.
사전 준비 없이 강력한 마법을 터트릴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장점이다.
블링크처럼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마법을 저장해 두는 것도 괜찮겠어.
띠링~♬ 띠리링~♬
유행을 한참 지난 벨소리가 주머니에서 흘러나온다.
도착 직후, 마담이 준 휴대전화다.
“무슨 일이지?”
-당신의 조언이 맞았어요.
“벌써 놈들의 꼬리를 잡은 건가.”
-우리가 누구인지 잊었나요?
“블랙 네트워크, 알고 있어.”
난 웃음을 흘렸다.
동맹이 유능하면 나한테도 득이 되는 법.
이 근방에 설치된 연성진은 모조리 파괴했다.
행방불명자, 다른 말로는 인신 공양 제물의 흔적을 찾아내는 건 마담에게 일임해도 될 것 같다.
-미스터 유는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
“이웃 마을로 놀러왔다.”
-예?
“클리포트의 흔적을 발견했거든.”
[하랍 세라펠의 가지]들을 쓰러트리면서 몇 가지 증거를 챙겨놓았다.
이런 게 있어야 밥값 정도는 한다고 알려줄 수 있잖아.
-우리한테 말 안 한 거 있죠?
“나도 영업 비밀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뭐, 좋아요.
“잠깐 개인 시간 좀 가지려고 하는데 괜찮나?”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드릴게요.
밥값도 했는데 이 정도는 이해해 줘야지.
통화 종료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사막.
저 곳이라면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겠어.
닉스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무얼 하려는 게냐?
“백수제왕무 후반부 초식을 익혀야지.”
나는 사막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