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에인 살라 공항.
북아프리카의 국가, 알제리의 국제공항 중 하나다.
블랙 네트워크에서 마련해준 전용기에서 내리자마자 바짝 마른 공기가 피부를 자극했다.
“건조한 환경은 피부의 적인데.”
내 옆을 나란히 걷는 여인.
마담은 작게 투덜거렸다.
“이 정도는 크게 영향도 안 받으면서.”
“호호, 플레이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잖아요.”
“당신의 실력이라면 이 정도 습도에서 피부를 지킬 정도는 되잖아.”
명색이 A급 성좌를 배후성으로 둔 플레이어다.
존 도 만큼은 아니지만, 습도가 낮다고 투덜거리는 건 엄살이다.
“미스터 유, 솔로죠?”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사람 마음을 사려면 조금 더 섬세해야 한답니다.”
“우리는 비즈니스 관계 아니던가?”
“제 호감을 사서 손해를 볼 건 없잖아요.”
마담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흐응, 꽤 신박한 도발이로구나.
-저 반응은 도발보다 유혹에 가깝지 않아?
-여에게는 도발이니라.
뭔 소린지 모르겠군.
“미스터 유, 불편하지는 않나요?”
“이물감이 있지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야.”
나는 턱을 긁었다.
[그림자 가면]
등급 : 유니크
분류 : 가면
내구도 : 70/100
사용자의 외모와 존재감을 감추는 가면입니다.
방어 능력은 전무하지만 [분석] 관련 능력이나 스킬의 대상이 되었을 때 사용자의 스텟을 가릴 수 있습니다.
착용하면 자동적으로 내구도가 감소합니다.
정체를 감춰주는 아티팩트.
한국에서 출발할 때, 이미 내 위장 신분까지 만들어주었다.
이런 데에서는 철저하구먼.
“클리포트와 손을 잡은 놈들은 누굽니까?”
“민족 해방 전선의 후예라고 하네요.”
“그게 뭡니까?”
“알제리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랍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탈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군.
“민족 해방 전선은 그 통치에 반발해서 나라의 주권을 되찾는데 앞장선 단체고요.”
“좋은 일을 해 놓고 왜…….”
“뭐든 일을 벌인 후가 중요한 거죠. 주권을 찾은 건 좋았는데 쿠데타가 일어났거든요.”
국방 장관의 쿠데타.
이후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당 독재가 이어졌고, 민족 해방 전선이 발을 내밀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독재가 영원했을 리는 없잖아.”
“사회주의도 무너졌으니까요. 문제는 그 다음이죠.”
다당 체제로 돌아선 후에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집권.
민족 해방 전선은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클리포트와 손을 잡은 건 그들의 후예랍니다.”
“비참한 일이군.”
난 쓴웃음을 지었다.
한때 숭고한 정신으로 움직였던 이들이 권력 싸움에 밀리더니 끝내 클리포트와 한 배를 탔다.
“조심하세요. 그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도 손을 잡았으니까요.”
“극단주의자들이요?”
“예,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도 있잖아요.”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동일한 신을 섬기면서도 파벌이 갈라지고.
반대 파벌을 무너트리려고 적성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말인가.
아니지.
손을 잡았다기보다는…….
“흡수한 건가.”
“네?”
“아니야, 아무것도.”
말끝을 흐렸다.
아직까지는 짐작 단계다.
알제리에 뿌리를 내린 클리포트 종파가 어디인지 알면 방금 품은 의구심도 금방 해결될 것이다.
“미스터 유, 어디부터 탐색하실 건가요?”
“일단 행방불명 사건 위주로.”
“그 부분은 이미 진행 중이랍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정보가 취합되는 동안에는 나도 개인행동을 하려고 하는데. 괜찮겠나?”
“네, 연락이 필요하면 이걸 사용해 주세요.”
투박한 디자인의 휴대전화.
20년 전에나 쓸 법한 구식 기기지만 실제 성능은 엄청나다.
통신망을 해킹해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통화가 가능한 블랙 네트워크 특제 전화기.
“이런 거 없어도 알아서 쫓아올 거잖아?”
“호호, 쫓아오다니요. 블랙 네트워크의 이사님을 지켜드리려는 거죠.”
“아무튼 이건 잘 쓰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쑥 넣고는 공항 밖으로 나섰다.
노란색으로 물든 건물들.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도시 아니랄까, 바위색도 대부분 노랗다.
-이제 어디로 갈 셈이냐?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아야지.”
나는 기감을 넓게 퍼트렸다.
우우웅!
기, 마나, 그리고 선기.
온갖 기운이 내 ‘감각’과 동화되어서 수 킬로미터로 퍼져나갔다.
-특이한 감지법이구나.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넓은 범위로 감각을 넓히는 건 처음 보느니라.
하긴.
혼원룡의 심장이 마나 생성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만큼 막대한 양을 쏟아 부었다.
단순히 마나와 기를 퍼트린 것만으로 주변 일대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라서 인근 풍경을 일그러트릴 정도였다.
2킬로.
5킬로.
그리고 10킬로미터까지 감지 영역을 넓혔을 때.
“찾았다.”
넓게 퍼트렸던 마나와 기를 거두었다.
* * *
둥글고 노란 돔형 지붕이 인상적인 건물.
하얀 터번을 쓴 사내 여럿이 모스크를 드나들고 있다.
-여기가 맞느냐?
“응.”
-여가 보기에는 평범한 예배당 같다만.
“클리포트 종파 중에는 기존의 종교에 스며드는 놈들도 있어.”
놈들이 꼭 제3세계에만 뿌리를 내리지는 않는다.
회귀 전에도 클리포트 세력이 준동한 곳 중에는 세계 최강 대국인 미국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음지의 사탄 숭배자들을 이용했었지.
이슬람은 사탄 숭배자 같은 사교(邪敎)가 아니지만, 극단주의자가 군부와 마찰을 일으키는 중이니 파고들 여지는 충분했다.
-성좌의 별빛이 직접 내리쬐는 시대에도 믿음이 흔들리다니.
“뭐, 믿음의 방향성까지 맞다고는 할 수 없잖아.”
성좌들은 바벨탑을 중계기 삼아 지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뭇 성좌들이 관심을 드러내는 필멸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회귀를 겪은 직후, 성좌의 정수를 포식하러 아테네에 갔을 때 올빼미 조각상을 만지작거리면서 기도하던 노인처럼.
보답 받지 못할 기도를 올리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저들도 그렇다는 말이더냐?
“그 이상은 신성모독이 될 것 같은데.”
여러 신화에 존재하는 신들이 현실에 드리운 시대.
한 성좌가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믿음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도 신자가 알 방법이 마땅찮다는 것이지.
과연.
민족 해방 전선인지 뭐인지 하는 녀석들이 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접촉했는지 알 것 같다.
“남의 절망을 이용하는 게 클리포트의 주특기니까.”
-참으로 기분 나쁜 족속이로고.
“설명하는 건 여기까지.”
[백수제왕무 - 10초식]
[백택군림각을 사용합니다.]
있는 힘껏 지면을 내리치자, 모스크가 크게 흔들렸다.
내공으로 섬세하게 범위를 조절.
선기를 추가로 운용해서 충격파가 엉뚱한 곳으로 번지지 않게끔 신경 써서 전개한 것이다.
닉스한테 설명해 주는 동안에도.
감각을 넓게 퍼트려서 클리포트가 벌여 놓은 수작질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방금 전, 진각으로 흔들어 놓은 건 모스크와 그 아래에 새겨진 클리포트의 연성진이다.
-마냥 놀고 있는 줄 알았건만.
“시간은 금이야.”
-한데, 연성진이란 무엇이더냐?
“클리포트 종파 중 하나인 하랍 세라펠이야.”
‘좀먹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종파.
하랍 세라펠은 연성진에 전문화되어 있다.
연성진의 특성상 사전에 준비가 필요하고 시간과 인적 자원이 소모되지만, 한번 갖춰지기만 하면 강력한 위력을 지닌다.
-적의 움직임이 없구나.
“여기에는 없나 봐.”
나는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연성진을 발견한 것만으로 큰 수확이다.
북아프리카에 뿌리를 내린 클리포트 종파가 무엇인지 안 것만으로도 앞서간 거니까.
“조금 바빠질 거야.”
-후후훗, 이미 각오한 바이니라.
갑작스러운 진동에 몰려든 인파.
나는 그 사이에 몸을 슬쩍 숨기고는 다시 한번 기감을 넓게 전개했다.
인지 범위를 10킬로미터까지 펼쳤지만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
-흔적을 못 찾으니 곤란하구나.
“도시 안에는 있어. 금방 찾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
인구 수 30만의 도시.
연성진이 발동했을 때 모든 사람들의 생기를 갈취하려면 최소 둘, 혹은 셋이 필요하다.
하나를 부쉈으니 남은 건 둘.
서쪽으로 이동한 후에 다시 감각을 퍼트렸다.
“빙고.”
이번에도 모스크 아래에 연성진을 새겨 놓았다.
백택군림각으로 하랍 세라펠의 연성진을 일그러트린 후, 마지막 장소에 도착했다.
여태 했던 것과 동일하게 발을 세게 내려치는 순간.
쩌어어엉!
강한 반탄력이 오른발을 밀어냈다.
자칫하면 내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충격을 옆으로 흘려보냈다.
-무슨 일이더냐?
“놈들도 멍청하지는 않네.”
세 번째 연성진은 이미 발동되어 있었다.
인근의 지기와 사람들의 생기를 끌어들여서 방어력을 강화.
백택군림각의 충격을 역으로 돌렸다.
연성진 두 개를 부수는 동안 이변을 알아챈 모양이다.
“누가 감히 연성진을!”
“연성진이 무너지지 않게 보호해라.”
“적을 찾아내는 게 우선이다.”
모스크에 머무르던 이들이 우왕좌왕거린다.
과연.
내 예상대로 기존의 신앙을 버리고 클리포트에 몸을 담고 있었군.
눈앞의 건물은 이슬람 예배당의 탈을 쓴 이교도의 성지로 타락한 지 오래였다.
-타초경사라. 그대가 뱀을 놀라게 하였구나.
“노린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어디로 가든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내가 연성진을 부수고 다닌 행위가 도시에 스며든 클리포트 종파를 자극한 듯했다.
“여신님, 여기 좀 가려 줄래?”
-쉬운 일이니라.
호문쿨루스의 육체로 현신한 닉스.
그녀가 손을 뻗자, 어둠의 장막이 모스크 일대를 모조리 휘감았다.
시야, 그리고 소리를 차단하는 밤의 막.
말 그대로 감각만 가릴 뿐, 출입까지 봉쇄하는 건 아니다.
“이러면 되겠느냐?”
“응, 충분해.”
나는 목을 좌우로 움직였다.
지금부터 벌어질 일은 신앙심이 투철한 이슬람인들이 보기에 조금 충격적일 거라서 말이야.
이를 갈며 모스크 앞으로 나오는 [하랍 세라펠의 가지]들을 보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