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고요해진 훈련장.
먼저 실력을 단련하던 길드원들이 옆으로 빠져서 나를 바라본다.
이러니까 꼭 밀어내 버린 것 같군.
-사실이지 않느냐.
“아니거든요?”
진심이다.
내가 훈련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구경하겠다고 저러는 거다.
훈련장 면적이 좁은 것도 아니고.
다른 건 몰라도 훈련장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단 말이다.
“후배님, 나는 전력을 다해도 되겠지?”
“우리 길드 건물 안 부서질 정도로만 해 주시죠.”
“손속에 여유를 둘 상대가 아니라서. 가능한 노력해 보지.”
적당하게 거리를 두고는 [용의 날개]를 사용했다.
견갑골에서 확장되는 감각.
공허의 거울로 비행 괴수 우르칸의 정수를 구현했을 때와 흡사한 느낌이다.
진짜 날개는 아니다.
마신의 피를 흡수하면서 생긴 능력이라서 그런가.
붉게 물든 암흑 마나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꽤 살벌한 모양새구먼.”
“성능도 보기만큼 흉흉할 겁니다.”
[용의 날개]를 펼치는 순간.
스킬의 매커니즘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탑 시스템 덕분이다.
물론 이론상으로 아는 것이지, 실전에서 활용하려면 숙달 과정이 필요했다.
용의 날개의 핵심 능력.
[쏜즈 미사일을 부여합니다.]
[암흑 투기를 부여합니다.]
…….
콰콰콰콰!
붉은 날개가 한층 더 거세게 타올랐다.
양쪽을 모두 재면 10미터에 달하는 용의 날개.
암흑 투기가 날개를 뒤덮으면서 매서운 기세를 내뿜는다.
“저, 후배님?”
“사양하지 않고 갑니다.”
나는 용의 날개를 그대로 휘둘렀다.
훈련장에 들이닥친 강풍.
암흑 투기로 이루어진 붉은 파도가 신준석을 덮쳤다.
“후배님에게는 ‘적당히’라는 개념이 없나 보구먼!”
주먹을 타고 회전하던 하얀 강기가 1미터 위로 넘실거리더니 붉은 날개의 흐름을 역으로 타면서 용솟음친다.
양쪽으로 밀려나는 용의 날개.
이 선배님.
강(强) 일변도인 폭호신권에 유(流)의 성질을 언제 추가한 거야?
신준석이 펼친 폭호신권은 이미 기초적인 틀과 이름만 남아있을 뿐, 원류를 초월한 지 오래다.
용의 날개를 퍼덕이자 암흑 투기가 넘실거리며 다시 한번 신준석을 덮친다.
-힘에 휘둘리다니 그대답지 않구나.
“출력이 너무 높아도 문제야.”
본신으로 낼 수 있는 출력의 몇 배에 달하는 엄청난 마력 양.
그 힘이 원체 강하고, 용의 날개가 내 몸 밖으로 구현된 개념이다보니 쉽게 다룰 수 없었다.
프리즌 퀸 데몬을 상대할 때랑 정반대가 되어버렸네.
“하압!”
[폭호신권 - 7초식]
[폭호층층권(暴虎層層拳)]
층층이 맺힌 강기가 암흑 투기의 파도를 쳐낸다.
찌릿- 거듭되는 충격이 견갑골까지 전해 진다.
시초룡의 인자로 구현해 낸 날개.
본래 인간에게 없는 신체 부위지만 용이라는 개념을 실어서인지 타격이 나한테까지 왔다.
큰 피해는 아니지만 대미지가 조금 돌아오니 날개를 소모품처럼 쓰지는 못하겠군.
“이건 어떻습니까?”
탐욕의 가호로 10미터에 달하는 날개를 휘감고.
그 위로 쏜즈 미사일을 구현한다.
사용하자마자 목표를 향해 날아가야 할 가시들을 탐욕의 가호로 붙들어놓고는.
암흑 투기로 쏜즈 미사일을 휘감았다.
흙빛으로 물든 신준석의 안색.
“좀 과한 것 같은데?”
“받아 보시고 판단해 주시죠.”
잠시 후.
훈련장 전체가 들썩이더니 항복-! 이라는 목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30분 후.
“선배님, 감사드립니다.”
“크, 으그그그.”
무도복.
아니, 이제는 넝마가 된 천 쪼가리를 걸친 신준석이 훈련장 바닥에 드러누운 채 꿈틀거렸다.
-꽤 익숙해진 것 같구나.
“선배님 덕분에.”
나는 등 뒤에 붙은 용의 날개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용의 날개 자체는 ‘개념’에 가깝다.
개념이라는 뼈대 위에 ‘정수’라는 살을 붙여서 현실에 구현한다고 해야겠지?
“암흑 투기가 깃털처럼 자리 잡은 것도 그 이유다.”
-그렇다면 다른 정수로도 날개를 채울 수 있다는 말이로구나.
“뭐, 폭마기도 이론상으로는 된다만.”
-된다만?
“컨트롤이 어려워.”
용의 날개는 실제로 존재하는 부위가 아니다.
정수로 채워서 만든 영적인 몸뚱이.
내 육신으로 기운을 제어하는 것보다 몇 배나 어렵고, 출력도 훨씬 높았다.
“지금은 마력이 흐르는 방향을 유도하는 게 최선이야.”
용의 날개를 구성하는 암흑 투기.
검붉은 기류가 노도와도 같은 기세로 흐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암흑 투기가 ‘깃털’과 ‘날개’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게 잡아 두는 정도.
극야처럼 마음대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
-자칫 잘못하면 그대를 찌르는 양날의 검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언젠가는 익숙해질 거야.”
난 태연하게 말했다.
용의 날개.
정수를 엮어내어 본신의 몇 배에 해당하는 마력을 방출하는 강력한 스킬.
이걸 내 의지대로 다루어낸다면.
“3년, 아니 2년 안에 회귀 전의 무력을 되찾을 수 있겠어.”
오른손에 힘을 꾹 쥐었다.
-한데 스킬을 사용하면서 부작용 같은 건 없느냐?
“날개를 구현하는데 불어넣은 정수는 쓸 수 없고, 너무 많은 정수를 부여하면 감당 못 하는 정도.”
용의 날개의 한계가 어디인지 안 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앞으로가 기대되는군.
* * *
용의 날개를 얻고 1주일이 지났다.
▶메인 미션 - 그레이트 라비린스를 통과했습니다.
▶클리어 시간 : 05:22:31
▶글로벌 팀(3)이 59층 클리어 최단 시간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59층 미션까지 클리어.
내 기량은 회귀 전을 기준으로 40% 정도까지 올라왔다.
마스터등급에서도 밀리지 않는 실력이니 50층대 미션이야 어렵지 않았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아낌없이 주던 성좌들이 다 사라졌단 말이야.”
후-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53층 미션을 기점으로 성좌들이 미션에 개입하지 않았다.
영성을 너무 많이 소모해서인지.
그게 아니면 날 골탕 먹이려다가 역으로 당해서인지 모르겠다.
-욕심이 과하구나.
“다 노력해서 얻었거든요?”
아무렴.
난이도가 올라가는 만큼 보상도 좋아진다.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을 흘려서 얻은 건데 욕심이라니!
-참으로 그리 생각하느냐?
나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54층부터 59층을 통과.
미션 수행 과정에서 정수도 몇 개 추가로 포식했다.
[빅 핸드의 정수]
등급 : 희귀
스킬 - 인핸스드 그랩
손아귀의 힘을 강하게 해 주는 패시브 스킬.
[사닉의 정수]
등급 : 고대
스킬 - 블링크
최대 30미터까지 공간을 도약하게 해 주는 액티브 스킬.
[썬버드의 정수]
등급 : 고대
스킬 - 프로미넌스
화염 기둥으로 대상을 타격하는 중위 마법 스킬.
[워터 라이온의 정수]
등급 : 희귀
스킬 - 스팀 게인
대량의 수분을 고열로 증발시켜서 화상을 입히는 액티브 스킬.
실전에서 활용할 만한 건 블링크 정도?
프로미넌스도 꽤 유용한 마법이지만 화염 속성에선 [솔라 익스플로전]이 있다.
트윈 헤드 오우거의 정수 덕에 근접 박투 중에도 마법을 전개할 수 있으니 시전 시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기에, 프로미넌스를 시전하려면 대체제로 [선법]이 있으니.
-한데 체스 데몬들의 정수는 취하지 않을 게냐?
“거기만 주야장천 공략하면 블랙 네트워크가 냄새를 맡을 거 아니야.”
-빈틈없는 사내로다.
정수를 100% 취하려면 30에서 40마리 정도를 포식해야 한다.
53층 미션을 20회 정도 수행하면 왕, 여왕 기물을 뺀 놈들의 정수를 다 먹을 수 있겠지?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곧바로 마담을 호출했다.
접선 장소는 길드 하우스 인근에 있는 카페.
약속 시간에 맞춰 가니 카페가 텅 비어 있었다.
“전세라도 낸 건가?”
“하루 정도는 어렵지 않죠.”
마담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드레스의 미인.
여전히 아름답지만, 닉스를 하도 보다 보니 큰 감흥이 오지 않았다.
“너무 냉정한 것 아닌가요?”
“보자마자 대뜸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만.”
“예나 지금이나 얼음장 같군요. 당신의 길드원들에게는 안 그러던데.”
“원한다면 역천에 자리 하나를 내줄 수 있다.”
“호호, 농담이 재밌네요.”
“그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면 본론으로 넘어가지.”
“좋아요. 이쪽도 꽤 오래 기다렸으니…….”
난 욕망의 주머니에 넣어 둔 갈라테아의 도면을 꺼냈다.
“그 도면, 진품인지 확인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마담은 오른손에 들려 있는 설계도를 차분하게 훑어보았다.
탑 시스템에는 이름이나 옵션을 현혹시키는 특수 아이템이 있다.
CP가 꽤 들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써볼 만하지.
그녀의 의심은 당연했다.
“정말이네요.”
“블랙 네트워크에 사기를 칠 정도로 강심장은 아니라서.”
“당신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라고 생각하는걸요. 한국 지부장님.”
“블랙 마켓 담당께서 꽤 후한 평가를 내려 주시는군.”
“자, 그럼 갈라테아의 도면을 넘겨주시겠어요?”
“아직, 조건이 하나 있다.”
난 갈라테아의 도면을 슬쩍 뒤로 뺐다.
“저를 곤란하게 하시다니.”
“뭐, 이쪽도 갈라테아의 도면을 입수하느라 고생을 좀 했거든.”
“이미 저희 사정을 알고 있으니, 제 권한 내에서라면 조건을 추가하셔도 좋아요.”
이 와중에도 말에 뼈가 있군.
블랙 네트워크가 큰 피해를 입으면 나한테도 손해라는 이야기를 잘도 둘러서 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것만큼은 나한테 꽤 중요한 부분이라서 양보할 수가 없네.
“내가 직접 어둠의 인형사에게 전해 주고 싶다.”
“그 말씀은…… 블랙 네트워크의 총수를 뵙고 싶다는 의미인가요?”
“알면서 떠보기는.”
마담의 미간 위로 주름이 잡혔다.
카페 내부를 잠식한 침묵.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흘흘. 감이 좋은 건가, 아니면 무모한 건가?”
툭- 툭-
카페 위층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진동음이 울렸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노인.
“총수님!”
“됐다. 저 청년이 대면을 원한다면 나서야 하지 않겠나.”
마담은 급히 자리를 박차더니 노인을 부축했다.
“당신입니까?”
“그래, 내가 블랙 네트워크의 주인, 어둠의 인형사라네.”
길가를 지나다 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
전 세계의 암흑가를 조율하는 범죄 조직의 수장 치고는 평범한 인상의 노인이다.
하지만.
저 인자해 보이는 눈동자 아래에 감추어진 냉정함과 잔혹함을 경험해 본 이들은 저 노인을 편하게 대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회귀 전에는 몇 번이나 데여 본 적이 있으니까.
“한국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진심인가?”
“아니, 사실 당신이 있는 줄 알고 조건을 걸었거든요.”
“당돌한 친구군.”
노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갈라테아의 도면으로 꾀어낸 거물.
전쟁을 대비하려면 이 양반의 힘과 능력이 필요했다.
“그럼 거래를 시작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