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체스 룰을 변형한 미션.
성좌들이 개입하면서 난이도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체스 악마들의 전투력이야 그렇다 쳐도.
공격 측이 모든 능력치 100% 추가 보정을 받는 룰상, 기동력이 승부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했다.
[아군 측 폰이 패배했습니다.]
[아군 측 나이트가 패배했습니다.]
앞장섰던 폰 중 반 가까이가 패배.
빈 진형을 파고든 체스 데몬들은 상위 기물도 하나둘씩 쓰러트렸다.
“전투 능력 2배 보정?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막 필드로 돌아온 핑 레이가 새빨개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손상된 갑주.
곳곳에는 생채기와 핏방울이 묻어 있다.
“힘드냐?”
“무슨 말이오. 사부! 나는 이 정도로 쓰러지지 않소!”
“난 또, 벌써 지친 줄 알았지.”
“두고 보시오, 사부. 내가 반드시 저 끝까지 도달할 테니!”
-참으로 다루기 쉬운 사내로다.
“쉿.”
진실이 알려지면 곤란하다.
첫 교전을 마친 길드원들이 하나둘 돌아왔다.
2배로 강화된 악마를 상대하느라 힘겨운 기색이지만 모두 생존했다.
다들 무사히 버텨냈군.
폰 포지션에서 유일하게 전투를 안 벌인 영수 형님만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길드원들을 둘러보았다.
“엔리케랑 핑 레이는 영수 형님 앞과 옆을 지켜줘.”
“아저씨, 우린 직진밖에 못 하는데?”
“폰의 공격 포지션은 대각선이다. 근처로 오면 막아줘.”
“알겠소. 조건만 맞으면 사부가 말한 대로 하지.”
길드원들의 전투력은 2배 버프를 받은 적을 상대로도 버틸 만했다.
더 상위 계급.
그러니까 여왕이 들이닥치면 버거울지 모르겠지만, 놈은 왕 근처에서 잘 움직이지 않으니 괜찮을 거다.
빠르게 줄어드는 아군 기물.
무작위로 매칭된 플레이어들한테 큰 걸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아니.
오히려 방해만 안 되면 다행이다.
“살아남아야 보상도 받지. 이대로는 안 돼!”
비숍이나 룩 같은 기동력이 뛰어난 기물들이 뒤로 물러난다.
돌출된 길드원들.
첫 교전 때 다른 폰들이 몰살당해서 전장 한가운데에 훤히 노출되었다.
“스승님, 제가 나서야…….”
“아직 대기해.”
대각선으로 이동.
아군을 노리던 체스 데몬들을 하나하나 제거했다.
그때.
기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병종, 섀도우 나이트 데몬이 아군을 돌파하면서 왕의 지척에 도달했다.
“지금이다.”
[캐슬링을 사용합니다.]
[플레이어 이지영(룩) – 왕의 위치가 변경됩니다.]
전장 구석으로 이동된 왕.
위치를 바꾼 지영이는 체스 데몬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스, 스승님? 데몬이 좀 많은데요?”
“어그로 좀만 끌어줘.”
나는 지영이를 믿었다.
전투 능력이 2배로 강화된 체스 데몬이라도 그녀를 돌파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플레이어 유진호(여왕)가 섀도우 나이트 데몬을 격파했습니다.]
[플레이어 유진호(여왕)가…….]
나는 여왕의 압도적인 기동력을 최대한으로 살렸다.
적 기물을 덮치거나.
혹은 공격을 유도하거나.
전장을 뒤덮었던 체스 데몬이 하나둘 제거된다.
체스 필드를 누비는 와중에 모서리들을 밟아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체스 데몬의 숫자가 반 이하로 줄었습니다.]
[프리즌 퀸이 전장에 난입합니다.]
[프리즌 퀸은 가장 많은 기물을 쓰러트린 대상을 향해 움직입니다.]
제노사이드 킹 데몬 옆에서 가만히 있던 여왕이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그대는 참 인기가 많구나.
“능력 많은 사람의 비애 아니겠어?”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프리즌 퀸을 흘겨보았다.
피곤하구먼.
인기가 많은 것도 고려해 볼 일이야.
* * *
프리즌 퀸 데몬은 일반적인 체스 데몬과 조금 다르다.
첫 번째 차이는 공격 우선 목표를 정해 두고 움직인다는 점.
그리고.
“퀸 데몬이 선공을 잡으면 스텟이 4배로 늘어난다는 거?”
-오호통재로다. 조금 과한 수치로구나.
“정석은 어그로가 끌린 플레이어를 내준 뒤에 공격하는 거다.”
여왕 기물은 1분마다 한 번씩 움직일 수 있다.
타깃을 정해 놓고 움직이는 프리즌 퀸 데몬의 특성에 맞춰 플레이어를 하나 던져주면?
막 이동을 마친 프리즌 퀸 데몬은 4배 스텟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여태 움직인 것은 헌신적으로 희생하려는 것이었구나.
“농담이 많이 느셨습니다?”
-후훗, 그대의 품성이 희생과 거리가 멀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노라.
정석을 굳이 따를 필요는 없다.
몇 배로 강해 지더라도 이기면 그만이잖아?
[프리즌 퀸 데몬이 유진호(여왕)와 전투를 벌입니다.]
[프리즌 퀸 데몬의 모든 능력치가 300% 상승합니다.]
[5분 동안 상대의 공세를 버티면 자동으로 승리합니다.]
넓어진 전장.
맞은편에 선 악마가 눈을 번뜩인다.
팔과 다리를 휘감은 사슬 다발이 허공을 부유하며 차르릉, 금속음을 퍼트렸다.
수십을 넘어서는 사슬들.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프리즌 퀸 데몬은 사슬 하나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구속시키는 게 취향인가?”
“너도 곧 이해하게 될 거야. 사슬의 매력을.”
홍조를 띄우는 프리즌 퀸 데몬.
그런 말 하면서 분위기 잡지 말아주었으면 한다만.
-흐으응. 저 처자, 묶이는 것을 좋아하나 보구나. 이해가 가지 않도다.
그런 쪽은 알려고도 하지 마십쇼. 여신님.
이상한 물들까 봐 두렵습니다.
“네 입에서 비명을 듣고 싶구나.”
차르르릉!
사슬 수백 개가 날아든다.
마디마디에 감도는 검은 기류.
-저 기운이 다 암흑 투기인 게냐?
닉스가 비명을 질렀다.
원래보다 4배로 강해진 프리즌 퀸 데몬.
사방을 점한 흑색 사슬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오러, 혹은 검기와 비슷한 격.
파괴력은 기 발현보다 조금 아래지만 그 수가 백 단위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공기가 암흑 투기의 흐름에 짓눌린다.
쯔아아아악!
눌린 공기가 비명을 지르듯이 괴이한 소리를 내고.
동시에 사슬들이 모든 공간을 점하면서 뱀처럼 다가온다.
나는 시커멓게 물든 정면으로 한 발을 내밀었다.
꽉 말아 쥔 주먹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권기.
응룡황권으로 공간의 틈을 파고들자 사슬 수십 개가 파르르 떨었다.
권기 대 암흑 투기.
위력은 권기가 조금 더 앞서 지만 출력에서 원체 차이가 났다.
정면으로는 볼 것도 없는 승부이지만.
팔을 살짝 틀면서 응룡황권을 더 내지르자 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조금씩 궤도가 틀어지는 사슬들.
채채채챙!
응룡황권이 만든 작은 변화가 프리즌 퀸 데몬의 공세를 일그러트렸다.
-호오, 제법이지 않느냐.
엉켜버린 사슬의 흐름.
프리즌 퀸 데몬이 양팔을 휘저었다.
응룡황권으로 흐름을 비틀어서 엉키게 만든 사슬들이 실타래처럼 풀리면서 금세 자유롭게 움직인다.
훨씬 더 넓어진 공격 범위.
그 대신 사슬의 이동속도가 느려졌다.
[아발란체를 사용합니다.]
사슬들을 덮친 눈보라.
지금 같은 상황에는 선법보다 마법이 유효하다.
극저온의 냉기가 사슬들을 붙드는 동안 앞으로 더 나아가면서 백수제왕무를 펼쳤다.
힘의 총량은 프리즌 퀸 데몬이 나보다 한 수 위.
녀석은 사슬이라는 매개체를 백 넘게 다루면서 암흑 투기 구현이 가능하다.
반면에 난 기를 발현하거나 폭마기, 혹은 암흑 투기를 구현할 수 있는 범위가 육체에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프리즌 퀸 데몬의 힘이 집약되지 못하게끔 일그러트리면 된다.
-과연, 흐름을 읽어 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구나.
빗발치는 암흑 투기의 공세.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놓았다가는 사슬이 몸뚱이에 휘감긴다.
메탈 반사 장갑으로 방어해도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등골이 오싹해 지는 느낌.
“오래간만이야. 이런 느낌.”
미소가 지어진다.
날카롭게 벼려지는 전신 감각.
최근 들어서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짓누르기만 해 왔지.
기교와 감각으로 상대의 호흡을 끊어 내며 거리 싸움을 벌인 적이 없었다.
너무 강해 져도 곤란하구먼.
-여유를 너무 부리면 곤란하니라.
“왜, 재밌잖아.”
-그대가 저 악마에게 발이 묶여있는 동안 아군이 몰살이라도 당하면 어찌하느냐.
“버텨주겠지, 그리고 금방 끝낼 수도 없어.”
-연유가 있나보구나.
“갈라테아의 도면을 얻으려면 5분을 버텨야 하거든.”
체스 필드의 각 모서리를 찍고.
프리즌 퀸 데몬의 공세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갈라테아의 도면을 얻는 숨겨진 조건.
모험가 로렌트가 발견한 건데, 그 녀석은 이런 괴이한 조건을 어떻게 알아낸지 모르겠다.
실은 회귀라도 경험한 게 아닐까.
“귀찮구먼.”
프리즌 퀸 데몬을 쓰러트리는 건 어렵지 않다.
이클립스로 기와 폭마기의 반발력을 극대화시키면 일시적으로 힘의 총량을 압도할 수 있다.
사슬을 모조리 지워 버린 후 선법을 먹이면 끝.
축지로 순간 이동해서 급소를 가격하는 방법도 있다.
-말과 표정이 다르구나.
“응?”
-퍽 즐거워 보여서 하는 말이니라.
오른손을 입가에 대었다.
씰룩거리는 뺨.
이거 참.
변태도 아닌데 아슬아슬한 감각을 즐길 줄이야.
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폭마기 컨트롤이 제법 익숙해졌어.”
1분, 2분, 그리고 3분.
내 감각이 날카로워졌듯, 프리즌 퀸 데몬의 공세도 한층 더 교활해졌다.
“제법이잖아, 인간!”
모든 공간을 장악하면서 동시에 쏟아지는 공격.
이번에는 흐름에 간섭해도 벗어날 틈이 보이지 않았다.
[기가 임팩트를 사용합니다.]
[폭마기를 사용합니다.]
폭풍처럼 날아들던 사슬들이 파동 위에 덧씌워진 검붉은 에너지에 튕겨 나간다.
쇄애액!
노란 파동을 뚫으면서 파고드는 몇 가닥의 사슬들.
폭마기 제어가 완벽하지 않아서 암흑 투기를 휘감은 공격을 모두 막아 내지 못했다.
나는 왼손에 기를 둘렀다.
산군파랑조를 펼치니 사슬 가닥 몇 개가 손가락에 걸려서 찢겨 나갔다.
근질거리는 복부.
[백수제왕무의 성취가 올랐습니다.]
[5성 → 6성]
[백수제왕무 후반부 초식을 익힐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 동반되면 백수제왕무로 강기를 펼칠 수 있습니다.]
“이 타이밍에 6성이라니.”
나는 쓰게 웃었다.
전신의 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6성에 올랐다.
이건 무공 성취나 숙련도의 문제가 아니다.
거 참.
스펙이 너무 뛰어난 게 오히려 독이 된 건가?
“인간, 어떻게 버틸 수 있는 거냐!”
프리즌 퀸 데몬이 초조한 기색으로 외쳤다.
“1분 남으니까 쫄리나 봐?”
“크으으읏, 인간 따위에게 질 수 없다!”
“탑이 만든 가짜 주제에.”
파츠츠츠!
권기보다 한층 짙은 기운이 팔뚝을 휘감는다.
강기.
깨달음과 내공이야 충분했다.
모자란 건 성취뿐.
백수제왕무가 6성에 도달하자마자 강기를 구현, 사슬 다발을 쳐냈다.
[전투 개시 후 5분이 지났습니다.]
[플레이어 유진호(여왕)이 승리했습니다.]
[53층 미션에서 숨겨진 요소를 달성했습니다.]
[갈라테아의 도면이 주어집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두루마리.
가볍게 낚아챈 후 아이템 내역을 확인했다.
[갈라테아의 도면]
등급 : 레전드
분류 : 잡화
내구도 : 100/100
전설의 인형 갈라테아의 제작 방법이 적힌 도면입니다.
도면 내용을 분석하면 강력한 인형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마담이 의뢰했던 아이템.
블랙 네트워크가 간절히 원하는 도면이 내 손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