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모두 운이 좋지는 않았다.
폰(Pawn)이 5명.
그리고.
“스승님, 전 룩(Rook)이래요!”
성벽 위에 올라선 지영이가 환한 목소리로 외쳤다.
직선으로 이동 가능한 기물.
“흥, 운이 좋군.”
“아저씨야 그렇다 쳐도 누님도 좋은 거 뽑았네?”
핑 레이와 엔리케가 입을 모아 투덜거렸다.
지영이가 두 사람의 반응을 보더니 쿡, 하고 짧게 웃었다.
“너희 체스 룰 잘 모르지?”
“장기와 비슷한 게임이지 않나. 난 알고 있다.”
“비슷하긴 한데 달라. 폰은 가장 약한 대신 필드 끝까지 가면 원하는 기물로 변할 수 있어.”
프로모션.
체스와 장기의 차이점 중 하나다.
핑 레이와 엔리케의 눈빛에서 이채가 감돌았다.
“누님, 끝까지 가면 여왕으로도 될 수 있다는 거 맞지?”
“운 따위가 아니라 내 실력으로 쟁취할 수 있다니. 최고의 포지션이군!”
……저기요.
두 사람. 체스에 대해 심대한 오해를 한 것 같다.
지영이가 입을 가렸다.
안면 근육이 움직이는 걸 보니 웃고 있군.
핑 레이와 엔리케의 불만을 잠재웠으니 된 건가.
“방어는 너한테 맡기마.”
“맡겨 주세요. 스승님!”
룩(Rook)에는 체스에 몇 없는 특수 이동 규칙이 있다.
캐슬링.
왕과 룩의 위치를 바꾸는 규칙.
선행조건이 까다롭지만 왕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기술이다.
마침 지영이의 능력이 방어에 특화되어 있으니 걸맞은 포지션을 잡은 셈.
“영수 형님은 살아남는 데 치중하십쇼.”
“면목이 없군요.”
필드에서 체스 데몬과 자리가 겹쳐지면 별개의 공간에서 싸운다.
영수 형님의 지휘 능력이 무효화 되는 전장.
돈 들여서 인형 병기도 바꿨으니 1인분 몫은 해낼 것이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조기에 탈락해서 미션 보상을 못 받는 거지.
“여왕 포지션에 있는 사람. 유진호 아니야?”
“향신료 제도의 영웅!”
“유진호와 미션을 같이 진행하면 보상도 좋아진다고 하던데?”
“성좌가 미션에 개입했잖아.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봐.”
다른 기물을 맡은 플레이어들이 수군거렸다.
팀 매칭 범위는 전 세계.
플래티넘급 15명을 국내에서 동시에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세계 각지의 플레이어들이 모인 상황.
토마스 분석관이 미리 귀띔이야 해 줬지만 이 정도의 반응일 줄은 몰랐다.
“각자 알아서들 사십쇼.”
내 명령에 따를 거라고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방해나 하지 마라.
난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 * *
체스의 규칙과 흡사하게 구현된 전장.
세세하게 뜯어보면 원 모델과 차이점이 꽤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여러 기물이 각자 판단하고 움직인다는 것.
한 턴에 기물 하나를 움직이는 체스와 달리.
“가자!”
핑 레이의 외침을 신호탄 삼아 최전선에 있는 폰들이 제각각 앞으로 나아갔다.
뒤를 따르는 나이트.
기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특수능력이 있으니 원하는 전장을 선택할 수 있다.
반면 여왕은 대각선과 직진 모두 누비는 것이 가능하지만 기물을 뛰어넘을 수 없으니 팔짱 끼고 기다려야지.
맞은편에 있는 체스 데몬들도 행동을 개시했다.
[데스 룩 데몬이 마릴린(폰)과 전투를 벌입니다]
[데스 룩 데몬이…….]
성좌들의 개입으로 모든 헬 폰 데몬이 뒤에 선 기물로 바뀌어 버린 상황.
양 끝에 있는 헬 폰 데몬들은 룩으로 변형.
직진 거리에 있는 플레이어에게 공격을 시도했다.
-흐응, 저러면 공격의 의미가 없지 않느냐.
“왜?”
-공격과 방어라는 입장 차이만 있을 뿐. 어차피 필드에서 승부가 나지 않느냐.
“공격 측에 어드밴티지가 있지.”
체스의 룰대로라면 상대의 영역에 침범한 기물이 승리한다.
근데 원본 게임처럼 턴 단위로 움직이는 게 아니고 각 플레이어의 재량도 감안하니 전개가 조금 다르다.
“공격자는 모든 스텟이 100% 상승해.”
-꽤나 파격적이구나.
“5분 안에 승부를 내지 못하면 공격 측이 패배하고.”
나름대로 변형한 체스 룰이라고 봐야지.
-하면 기동력에서 우위가 있는 상대측이 더 유리할 것 같구나.
“악마들의 전투력 차이도 있어.”
제노사이드 킹 > 프리즌 퀸 > 데스 룩 > 다크 비숍 > 섀도우 나이트 > 헬 폰
다행(?)인 건 왕과 여왕이 복사가 안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체스 데몬들의 전투력이 급격하게 올라가 버린 건 변하지 않았다.
-공격 측의 전투력이 100% 강화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응, 맞아.”
-하면 굉장히 불리한 상황 아니더냐?
“언제는 불리한 적 없었나.”
나는 팔짱을 낀 채 전장을 훑어보았다.
* * *
[아군 측 폰이 패배했습니다.]
[아군 측 폰이 패배했습니다.]
강화된 데스 룩 데몬 둘은 플레이어를 쉽게 격파했다.
“저, 스승님.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너는 가만히 있어. 내 범위 안에 들어왔으니까.”
대각선으로 직진하면 데스 룩 데몬을 공격할 수 있다.
그게 체스 데몬의 계획이라는 것도.
공격하는 입장은 전투력 버프를 무려 100%나 받는다.
방어 측이 불리한 상황.
여기서 내가 데스 룩 데몬을 노리면 시작 지점에서 대기 중인 또 하나의 데스 룩 데몬이 움직일 것이다.
-그 의도를 알면서도 움직이려는 이유는 무엇이더냐?
“지들이 세져 봐야 얼마나 강하겠어.”
무적 판정도 아니고.
기껏해야 두 배로 강해지는 수준이다.
내 스펙이면 마스터 등급에서도 먹히는데 고작(?) 플래티넘에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나.
대각선으로 이동해서 데스 룩 데몬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플레이어 유진호(여왕)가 데스 룩 데몬과 전투를 벌입니다.]
서로의 공간이 포개지는 순간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밟고 있는 새카만 판이 수백 배로 확대.
이종격투기에서 승부를 겨루는 링 같은 형태로 변했다.
맞은편에는 탑처럼 생긴 기다란 몸체에 문어처럼 흐느적거리는 다리 8개를 단 악마가 음흉하게 웃었다.
“크후후, 인간. 너는 함정에 빠졌다.”
“알면 더 이상 함정이 아니지.”
“두 배로 강해진 내 동료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악마 새끼들은 하나 같이 시끄럽구먼.
바알만 해도 그렇고.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재채기를 합니다.』
하여간 감은 좋아 가지고.
두 배로 증폭된 신체 능력.
한달음에 [축지]로 거리를 좁히고는 손을 꽉 쥐었다.
괴력.
그리고 손등을 폭마기로 휘감으면서 주먹을 내지르자 데스 룩 데몬이 반응도 못 하고 펑, 터져나갔다.
-시시하구나.
“다음이 진짜야.”
원래대로 돌아온 필드.
뒤에 있는 두 번째 데스 룩 데몬이 기다렸다는 듯이 전진했다.
겹쳐 지는 필드.
첫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필드가 확대되었다.
[데스 룩 데몬의 모든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5분 동안 상대의 공세를 버티면 자동으로 승리합니다.]
이번에는 방어 측이 되었다.
“크후후, 5분 동안 잘 도망쳐 봐라. 가능하다면 말이지.”
두 번째 데스 룩 데몬이 다리를 넓게 펼쳤다.
다리 8개에 달린 갈고리가 빛을 반사시키면서 번뜩거린다.
전후좌우.
사방을 점한 다리들이 조금씩 간격을 좁혔다.
“넌 도망칠 수 없다.”
“뭔가 착각을 한 것 같은데.”
이번에는 축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100% 강화된 데스 룩 데몬의 전투 능력을 시험해볼 기회.
일정한 간격을 유지 중인 다리들 한가운데로 파고드니 섬뜩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촉수 다발.
[기가 임팩트를 사용합니다.]
빈 공간에 주먹을 내질렀다.
전신 근육을 쥐어 짜내자 막대한 에너지가 빚어진다.
말아 쥔 주먹에서 퍼져 나간 진동.
노란색 파동이 30미터까지 퍼져나갔다.
잠잠하던 호수에 파문 하나를 일으킨 것처럼.
전신의 근육에서 발생시킨 에너지가 데스 룩 데몬의 다리들을 밀어낸다.
“이 정도로는 나를 쓰러트릴 수 없다.”
갈고리들이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정작 다리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바로 되지는 않네.”
-무엇을 시험하는 게냐?
“폭마기를 체술에 섞으려고.”
오러, 그리고 오러 블레이드는 체술과 결합할 수 있다.
폭마기도 비슷한 감으로 사용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아까 사용했던 괴력이야 힘 발현 원리가 단순해서 어렵지 않게 폭마기와 동시 운용했지만.
오우거의 정수에서 추출한 [기가 임팩트]는 사용 난이도가 높아서 한 번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해 볼 만해. 방금 걸로 감 잡았어.”
“뭐라 떠드는 거냐. 도전자!”
촤라라라락!
8개에 달하는 다리가 데스 룩 데몬의 일갈과 함께 날아들었다.
[기가 임팩트를 사용합니다.]
[폭마기를 사용합니다.]
근력에 비례해서 방출하는 충격파.
폭마기가 섞이면서 검붉은색이 노란 파동을 뒤덮는다.
데스 룩 데몬의 다리가 파동에 닿는 순간 수백 갈래로 찢겨 나갔다.
허공을 물들이는 피 안개.
“말했잖아. 이미 감 잡았다고.”
“이게 무슨?”
“덕분에 너희 수준도 알았고 몸도 풀렸다.”
데스 룩 데몬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두 눈을 좌우로 굴렸다.
구태여 이 상황을 납득시킬 필요는 없지.
모든 다리가 터진 채 멀뚱멀뚱 서 있는 데스 룩 데몬의 몸통을 가격했다.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화한 악마.
망설이지 않고 놈의 정수를 포식했다.
[포식한 정수 : 2.7% → 4.5%]
-흐응, 이 속도라면 100% 완성은 무리이지 않겠느냐?
“그거야 반복 도전하면 되지.”
53층 미션은 정수의 보물 창고 같은 곳이다.
기물들마다 정수를 토해 내니 총 6종이나 얻을 수 있다.
반복해서 도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스텟과 정수를 모두 얻을 수 있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원래의 전장으로 돌아온 직후.
막 쓰러트린 데스 룩 데몬이 원래 머물렀던 자리, 그러니까 체스 필드 끄트머리로 이동했다.
옆에 있는 섀도우 나이트 데몬이 나를 노려본다.
두 칸 전진 후 좌우로 이동해야 하는 기물, 나이트.
이동 룰 때문에 공격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눈빛이다.
-큰 의미가 있진 않아 보이는구나.
“그렇지.”
-하면 이 행위는 갈라테아의 도면과 연관이 있다고 보면 되느냐?
“도면을 얻으려면 선행조건을 충족시켜야 해.”
체스 필드의 각 모서리.
그러니까 룩(Rook)의 시작점을 모두 들르는 것이 [갈라테아의 도면]의 출현 조건이다.
적을 압박할 겸 조건도 충족시키니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셈이지.
-그대를 주시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만.
“알고 있어.”
1차 대침식 이후.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탑 미션 수행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마담이라면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을 터.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모조리 체크를 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말이야.
내 밑천을 털어가는 건 쉽지 않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