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캬오오오오!”
트윈 헤드 오우거를 쓰러트린 직후.
관객이 된 화랑 길드원들을 한 번 노려보고는 크게 포효했다.
수목을 뒤흔드는 강렬한 소리.
나는 흡족한 표정과 함께 오장우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에 대한 권리는 제게 있습니다.”
“그러게, 우리의 완패이니.”
오장우가 쓰게 웃었다.
의외군.
공동 공략까지 언급한 마당에 군말 없이 물러날 줄은 몰랐다.
망설일 이유는 없다.
곧장 발아래에 깔린 트윈 헤드 오우거에게 포식을 사용했다.
[트윈 헤드 오우거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오우거의 시체가 가루로 변하고 있어.”
“트윈 헤드 오우거잖아. 그런 건 확실히 해야지.”
“가죽을 가공하면 최소 유니크 등급 방어구를 만들 수 있을 텐데.”
“놈의 힘줄은 어떻고? 활시위로 쓰면 엄청 좋을걸.”
화랑 길드원들이 삼삼오오 떠들었다.
일행이야 내 기행에 꽤 적응했지만 저들은 아니니까.
이런 분위기는 오래간만이군.
-금을 쓰레기로 만드는 능력 말이더냐?
아 좀.
그런 이야기는 내 귀에 안 들리게 해 주시죠. 여신님.
난 화랑 길드원들이 당혹감을 드러내든 말든 무심하게 정수를 포식했다.
[정수를 100% 포식했습니다.]
[정수 등급 : 고대]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부동심이 추가됩니다.]
[부동심]
등급 : ★★★
분류 : 액티브
어떤 충격을 받거나 움직여도 마법 사용이 취소되지 않는다.
부동심을 사용하는 동안 마법 발현 속도가 50% 감소한다.
전투 마법사에게 필요한 스킬.
육탄전과 마법 모두 사용하는 트윈 헤드 오우거다운 정수다.
회귀 전에도 꽤 쏠쏠하게 사용한 기술이지.
-이제는 근접전을 벌이면서 마법도 사용이 가능하겠구나.
“그렇기야 한대. 이제는 선법도 있으니까.”
내 역량으로는 박투를 벌이는 중에 선법과 마법까지 동시 전개는 어렵다.
-호오, 웬일로 겸양을 떠느냐.
“겸양은 무슨, 난 원래 자기 객관화에 충실한 사람이거든?”
-스스로를 돌아보면 그런 말은 하지 못할 터인데.
뭐.
왜요.
억울하다는 듯이 닉스를 바라봤지만 침묵이 돌아왔다.
부동심.
회귀 전에는 마력 수치가 높지 않아서 마법을 전투 보조로 사용했다.
이제는 상황이 반대다.
[공허 비추기]로 스텟이 꽤 깎였는데도 여전히 마력이 제일 높다.
그렇다고 선법을 놓치기는 아깝잖아.
선법은 마법보다 상성에서 우위에 있다.
반쯤 신력에 걸쳐 있는 능력.
둘 다 전투에서 활용하려면 ‘그 녀석’의 정수를 포식해야 한다.
이거야 원.
쉴 틈이 없네.
[오우거 요새의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렸습니다.]
[게이트를 닫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데몬의 도끼가 주어집니다.]
[데몬의 도끼]
등급 : 레전드[L] / 분류 : 도끼
내구도 : 7,000/7,000
사용자의 마나를 오러나 마법으로 치환해 주는 도끼입니다.
마나 증폭 효과가 있어서 여러 방면으로 사용이 가능한 무기입니다.
*근력 + 100
*마력 + 100
*오러 / 마법 효과 50% 증폭.
서리검의 하위 호환급 장비.
트윈 헤드 오우거의 성질을 닮은 아티팩트가 나왔다.
“레전드라니.”
“증폭 조건이 까다롭지만 효과가 엄청 좋잖아.”
“100억은 넘겠지?”
“최소가 100억 단위야. 이 정도 무기면.”
화랑과 역천.
두 길드에 속한 플레이어들은 진형도 잊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으음.
확실히 이 시기의 사람들은 눈이 좀 낮구나.
이렇게까지 감탄할 일인지 잘 모르겠다.
위장에 보관 중인 상위 호환급 아티팩트도 있으니 말이야.
“공략, 축하하네.”
오장우가 다가오자 일행의 눈가에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이번 공략 제안이 화랑의 술수인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보스를 쓰러트려도 게이트가 바로 폐쇄되지는 않는다.
무슨 수를 쓰려고 한다면 지금이 적기란 말이지.
“화랑 길드 덕분이죠.”
“겸손이 과하군. 우리는 한 일이 없다만.”
“그렇습니까?”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적막해진 전장.
트윈 헤드 오우거를 공략할 때보다도 더 긴장감이 넘쳤다.
수라마령심공으로 운기한 내공이 전신을 흐른다.
진여의주의 힘으로 운용하는 선기도 꿈틀대면서 언제든지 발현될 때만을 기다렸다.
자, 뭘 선택할 거냐.
오장우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게이트 공략에 협력해 준 것은 잊지 않도록 하지.”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겁니까?”
“화랑 길드가 역천을 국내 1위 길드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꽤 협조적이군요.”
“이제부터는 국내 3대 길드의 위치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나.”
후련한 목소리로 오장우가 대꾸했다.
역천 길드가 화랑보다 위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발언.
전생에는 국내에서 정상에 서기까지 오장우의 방해를 얼마나 받아왔던가.
회귀 전과의 공기 차이가 너무 커서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과거의 그림자에 너무 매여 있지 말거라.
닉스의 한 마디가 뇌리에 파고든다.
그래.
핑 레이나 엔리케, 그리고 영수 형님의 운명이 바뀌었듯.
오장우의 가치관이나 생각도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번 게이트 공동 공략 제의를 받았을 때만 해도 화랑의 기반을 뿌리 뽑을 생각이었지만.
“그 말, 믿겠습니다.”
나는 오장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 * *
화랑 길드와 전면전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오장우는 게이트 공략 직후, 협회와 화랑 길드 사이의 중재를 부탁했다.
“중재를 왜 저한테?”
“역천 길드, 아니 진호 길드장이 플레이어 협회와 긴밀한 사이라는 건 공공연한 이야기이지 않나.”
“꽤 직접적이시군요.”
“패배를 시인한 마당에 무슨 말을 못 할까.”
“상황 봐서 신경을 써 보죠.”
“내 말을 잊지 않아 주면 된다.”
화랑 길드가 하는 걸 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적응이 안 되는구먼.
“뱀사골에 생성된 오우거 게이트 폐쇄. 확인했습니다.”
밖에서 기다리던 한수창 팀장은 웜홀이 닫히는 것을 지켜본 후에 공략 성공을 선언했다.
“길드장님.”
“왜 그렇게 조용히 말씀하십니까. 토마스 분석관님?”
“게이트를 공략하기 전, 기자 몇 명을 미리 섭외해 두었습니다.”
“너무 과장하지 않는 선에서 푸세요.”
“길드장님의 활약이 워낙 압도적이라 사실을 이야기해도 믿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부가 많이 느셨습니다?”
토마스 분석관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번 일이 알려지면 한국 길드의 판도가 달라지겠군요.”
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국내라.
이미 회귀 전에도 걸었던 로열로드이기에 큰 감흥이 없었다.
내 목표는 고신족의 파멸.
그리고 다가올 파멸의 미래를 막는 것이다.
흠- 토마스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가끔 보면 길드장님께서는 더 멀리 보시는 것 같습니다.”
“착각입니다.”
짧게 토마스의 의혹(?)을 부정했다.
서울로 돌아오니 반갑지 않은 손님이 내 방에 들어와 있었다.
“네 마음대로 들락날락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지시는 아직 받지 않았습니다.”
영.
블랙 네트워크에서 내 수하로 붙인 인물이자, 감시역이기도 한 플레이어다.
“이제부터는 그렇게 해.”
“뜻대로 하겠습니다.”
“갈라테아의 도면을 추궁하러 왔나 본대. 마담이 시키지는 않았을 거고.”
“제 의지입니다.”
“충성을 바치는 건 좋지만.”
스스스슷!
단전에 깃든 내공이 의념에 반응해서 꿈틀거린다.
수라마령심공의 성취가 높지 않아 심검을 펼치지는 못하지만.
뚝- 뚝- 영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비 오듯 떨어진다.
가까스로 몸이 떨리는 것을 참고 있군.
“선을 넘지는 마라.”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경고도 없을 거다.”
제 주인을 해하는 칼 따위는 필요 없다.
유능한 건 둘째 문제거든.
마담.
이왕이면 명령에 충실한 놈을 붙여줄 것이지.
-그대가 웬일로 자비를 베푸는구나.
“다음 기회는 없다고 했잖아.”
-솔직하지 못하긴.
이 여신님이.
나는 진심인데 왜 이러는 거요.
“딱 1주일 후에 갈라테아의 도면을 전해 주마.”
“한국 지부장님의 말씀을 믿겠습니다.”
“이럴 때만 지부장이래. 참, 조건이 하나 있어.”
“상부에 전달하겠습니다.”
“너희 보스, 직접 받으러 오라고 전해.”
“마담께서는 이미…….”
“그 윗선 말하는 거 알잖아.”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는다고.
갈라테아의 도면이 필요한 건 어둠의 인형사다.
본인이 직접 찾으러 오는 정성은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영은 의외로 군말 없이 대답했다.
“나가 봐.”
푹 꺼지듯 사라지는 영.
-한데 그 도면은 어디에 있느냐?
“53층.”
-후후훗, 당장이라도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었구나.
“그걸 말해 주면 블랙 네트워크에서 층수까지 짐작할 수 있잖아.”
갈라테아의 도면을 50층대에서 얻을 수 있다는 정보.
그걸 흘린 것만으로도 손해가 컸다.
1주일이라는 시간을 제시한 것도 도면을 얻을 수 있는 층이 어디인지 가리려고 한 말이다.
“정보는 금이야.”
-흐응, 그대는 참으로 피곤하게 사는 것 같도다.
“인간은 손해 보는 걸 싫어합니다. 여신님.”
친절하게 대꾸해 주고는 바벨탑 접속 어플을 꾹 눌렀다.
[바벨탑 접속 어플리케이션을 실행합니다.]
[현재 사용자가 머무는 공간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접속됩니다.]
[도전 가능한 층계는 51 - 53층입니다.]
[53층에 도전하시겠습니까?]
[Y/N]
Y 버튼을 누르자, 화면 중심부에 생긴 원이 빙글빙글 돌았다.
* * *
[바벨탑 - 53층]
[불멸의 게임장에 입장했습니다.]
[미션 - 불멸의 게임]
체스 기물에 깃든 악마들이 게임을 제안합니다.
킹 데몬을 쓰러트리면 승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능력은 게임의 룰에 맞춰 제약을 받습니다.
▶목표 : 제노사이드 킹 데몬 파괴
8 x 8칸으로 된 필드.
아군 플레이어는 ‘왕’을 제외한 15명이 무작위 기물로 선정된다.
[당신의 역할은 ‘여왕’입니다.]
[직선 / 대각선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이동하면 60초 후에 재이동이 가능합니다.]
운이 좋군.
체스에서 가장 뛰어난 기물, 여왕이 되었다.
어디 보자.
성좌님들께서는 어떤 식으로 개입하려나.
[몇몇 성좌가 미션에 개입합니다.]
[헬 폰(Hell Pawn) 데몬이 섀도우 나이트 / 다크 비숍 / 데스 룩 데몬으로 업그레이드됩니다.]
53층 미션은 단순히 체스 룰로 겨루는 게 아니다.
기물에 깃든 악마는 그 계급에 따라 강해진다.
이동 룰은 체스를 따르되,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면 개별 공간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공격하는 측에는 강력한 버프가 주어지기에, 체스 룰에 맞춰서 틈을 노리는 게 적합했다.
-그 도면이라는 건 어디에 숨겨져 있느냐?
“이제부터 얻으러 다녀야지.”
폰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여왕으로 시작했으니, 첫 도전으로 [갈라테아의 도면]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친김에 53층 미션에 같이 참여한 길드원들의 포지션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