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숲의 폭군.
오우거의 이명이다.
덩치는 트롤보다 더 큰 주제에 원숭이처럼 나무를 타고 다닐 만큼 민첩성도 뛰어나다.
고밀도로 압축된 근육에서 솟구치는 힘은 집채만 한 바위도 쪼갤 수 있다.
평범한 50층대 플레이어는 1대1조차 어려운 괴물.
화랑 길드가 괜히 오우거 요새 공략을 진행하지 못하고 애를 먹은 게 아니었다.
“우리가 뭘 보고 있는 거지?”
화랑 길드원 한 명이 중얼거렸다.
바벨탑이 생긴 후, 단 한 번도 정상을 빼앗긴 적 없는 길드.
국내 3대 길드라고 불리지만 화랑 길드가 다른 두 길드보다 더 높다는 것에 누구도 이견을 가지지 않았다.
흔들린 적 없었던 자긍심은…….
“쿠어어어!”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있어라.”
퍼어어억!
한 사람의 무력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푸른 피를 분수처럼 흩뿌리며 나가떨어지는 초록색 물체.
화랑에서 연계 플레이로 사냥했던 괴물, 오우거가 진호의 팔에 맞더니 힘없이 땅바닥을 뒹굴었다.
진호가 오우거 무리를 향해 질주했을 때만 해도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20마리나 되는 오우거를 상대로.
진호는 누가 사냥감인지를 철저하게 알려 주었다.
[백수제왕무 - 6초식]
[봉황각(鳳凰脚)]
발을 한 번 내지를 때마다 폭풍이 휘몰아치고.
주먹을 뻗으면 공기가 파르르 떨린다.
깨달음이 동반되어야 펼칠 수 있다는 기 발현을 자유자재로 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솔라 익스플로전]
오우거와 전투를 벌이는 도중에도 마법을 전개했다.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빛.
“맙소사, 화염 마법이 오우거의 피부와 근육을 녹여버렸어!”
“저 위력 플레임 헬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근접전을 벌이면서 마법까지 사용한다고? 말도 안 돼.”
화랑 길드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법이란, 외부의 마나를 사용자의 의지대로 비틀어서 이상 현상을 만드는 기예다.
급격한 환경 변화에서는 사용하기 힘들다는 단점.
러시아의 랭커인 세르게이 이외에는 명성 있는 마검사나 마투사가 없다는 게 단편적인 예다.
진호는 그 상식을 가볍게 깨트렸다.ㅣ
멀티 캐스팅.
그리고 마법의 지배자.
최근 얻은 능력 덕분이지만 화랑 길드원들이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진호의 기행은 마법에서 그치지 않았다.
[토둔 - 토룡출수]
지면에서 솟구친 커다란 토룡.
동양의 ‘용’을 닮은 바위가 돌진하면서 오우거들을 물어뜯는다.
쉴 새 없이 나오는 기술들의 향연.
‘어떻게 한 사람이 저런 기예를 모두 다룰 수 있는 거지?’
오장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꽉 닫힌 입술이 열리는 순간, 비명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였다.
혼신의 힘으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지만 마음에 드리운 열등감마저 떨쳐 내지는 못했다.
자신이라면.
국내 1위 랭커인 오장우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면 오우거 20마리도 홀로 상대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상대’하는 정도.
그 과정에서 팔이나 다리 하나 정도는 내줘야 할 각오를 해야 하는 게 오우거라는 괴물이다.
진호는 그만한 강적을 장난감 가지고 놀 듯 가볍게 쓰러트렸다.
‘그때 느꼈던 절망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장우는 떠올렸다.
다이아몬드 승급 전에서 마주친 오크들을.
원시적이면서도 흉포한 힘 앞에 무릎을 꿇었던 굴욕적인 순간.
진호는 당시 마주친 오크들보다도 훨씬 강했다.
‘아직 패배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플레이어 개인의 역량만 놓고 보면 오장우의 완패다.
그러나 ‘조직’ 전체를 살펴보면 역천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화랑 길드의 결속력은 10년 동안 쌓아 올린 금자탑이다.
무극과 옐로우 스톰.
두 팀은 각자 호흡을 맞춰 왔으니 물과 기름처럼 잘 섞이지 않을 것이고.
진호가 섭외한 이들은 플래티넘 등급에 머무르는 중이다.
‘우리 능력을 더 보여줘야 해.’
화랑이 국내 3대 길드라는 위치를 유지하려면 역천과의 기세 싸움에서 버텨야 한다.
이 전투에서 진호가 보여 준 능력은 등급을 훨씬 넘어섰다.
하지만.
화랑 길드 정예 50명이 합을 맞추면 이기지 못할 정도까진 아니다.
‘적어도 길드 운영에서 도움을 준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오장우의 상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막 10마리째 오우거의 몸통이 통째로 증발했을 때.
돌연 진호는 몸을 돌이키면서 일행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왔다.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
격렬한 전투를 벌인 직후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외형이다.
“포기하는 건가?”
“설마, 우리 길드원들에게도 기회를 줘야죠.”
진호의 말을 신호탄 삼아 역천 길드원들이 앞으로 나섰다.
“사부, 이런 기회는 얼마든지 주십쇼.”
“이번에 새로 얻은 거 제대로 보여줄게. 아저씨!”
자신만만한 이들.
무극과 옐로우 스톰 팀원들은 팔짱을 낀 채 구경만 했다.
“쿠어어어어!”
동료들의 죽음으로 분개한 것일까.
남은 오우거들이 격앙된 고함을 내지르면서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메카닉 컨트롤]
[콜 메카닉 - 거신의 왼팔]
태앵!
허공에 맺힌 마법진 위로 강철의 주먹이 튀어나왔다.
짓쳐들던 오우거 하나가 타이탄의 정권에 두들겨 맞고는 돌진하던 것보다 배 이상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갔다.
“엔리케야. 작전대로 해야지!”
“미, 미안. 누님.”
지영이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엔리카 꼬리를 말았다.
여기서 말한 ‘작전’이란.
[군단 지휘의 효과로 투지가 상승합니다.]
[군단 지휘의 효과로 고통 내성이 적용됩니다.]
[백인 장이 통솔 중입니다. 투지가 대폭 상승합니다.]
…….
김영수의 지휘 능력이었다.
펄럭-! 그는 낡은 깃발을 꺼내 들었다.
바람의 흐름대로 움직이는 하얀 천.
언뜻 투박해 보이지만 깃발에 실린 기묘한 힘이 길드원들을 감싸는 순간, 그 진가가 드러났다.
[성스러운 깃발을 휘두릅니다.]
[지휘 중인 이들의 능력치가 30% 상승합니다.]
[지휘 능력의 효율이 20% 상승합니다.]
오로지 지휘 계통에만 투자된 성유물.
전투 능력은 없지만, 김영수에게는 최고의 아티팩트였다.
핑 레이의 몸이 수십으로 늘어난다.
천고성의 선장.
[수호지] 전설의 등장인물로 중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성좌인 노지심의 무장이다.
무공과 선법 양쪽 모두에 특화된 흔치 않은 성유물.
배 이상 증폭된 선기와 내공이 봉대를 타고 어우러지면서 증폭된다.
수십으로 늘어난 핑 레이가 천고성의 선장을 뻗자.
콰아아! 광풍이 몰아치면서 달려들던 오우거들을 패대기친다.
“쳇, 내 힘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는데.”
엔리케는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메카닉 컨트롤]
[콜 메카닉 - 킴바야 유물]
[동조화]
[일제사격]
비행기 형태의 작은 유물.
일명 ‘오파츠’ 성유물이 수십으로 늘어났다.
분신하고는 다른 형태.
성유물에 깃든 힘을 개방 및 증폭시키는 것으로 복사가 가능한 것이다.
“가라!”
비행기를 닮은 유물 수십 개가 일제히 분홍색 빛을 토해 냈다.
레이저 포격.
과거 엔리케가 총기를 동조화시킨 것과 비슷한 원리지만, 위력은 천지 차이였다.
태생적으로 마법 저항력이 강한 오우거의 피부를 데이게 할 정도.
혹자는 고작 그 정도냐? 라고 하겠지만.
그 마력 레이저가 초당 수십 발씩 쏟아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쿠어어어어!”
포격을 뚫고 나온 오우거.
누런 이를 훤히 드러내면서 살기 어린 눈빛으로 역천 길드원들을 노려보지만.
타이밍 맞춰 나온 지영이가 양손에 겹친 진동 결계를 충돌시키는 순간.
쩌어어엉! 반탄력과 함께 튕겨 나갔다.
살상력보다 대상을 밀어내는 데 특화된 충격파.
진동 결계의 또 다른 응용 방법이다.
화랑의 연계 공격에 밀리지 않는 사냥 속도.
남은 오우거들이 제압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공략 주도권을 넘겨줘야 한다.’
오장우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 * *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공략 시작 후 반나절이 조금 넘어간 시점에서 오장우가 손을 펼쳤다.
“꽤 넓군요. 오우거 요새의 그림자도 못 볼 줄은.”
본 것이라고는 울창한 숲과 무리 지어 행동하는 오우거들 뿐이다.
게이트 면적이 넓다 보니 오우거 요새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화랑 길드 녀석들.
전생에는 용케도 이런 곳을 공략했군.
본래 오우거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는다.
10이나 20마리 단위로 움직이는 건 게이트의 영향이다.
“제법 수를 줄여 놨으니 내일은 요새 공략도 가능할 거다.”
난 하루 종일도 할 수 있는데.
일행도 그다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굳이 오장우의 지시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화랑의 꿍꿍이다.
단순하게 길드끼리 서열을 정리하려고 한 거라면 별일 없이 게이트 공략을 마치겠지.
다른 생각이 있다면…….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 거라.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닉스의 음성이 절묘한 부분을 찔렀다.
이래 봬도 살기 조절하는 건 자신 있는데 친절이 과하시구먼.
게이트에서 벗어난 후에는 근처 팬션에서 휴식을 가졌다.
“아니, 그러니까 이 타이밍에는 그 선법 대신 이거를 해야 한다니까?”
“흥. 어리석군, 여자. 상대의 진형을 무너트리는 데는 이게 제일이다. 지휘관도 별말 없지 않는가.”
“타이밍 잘 맞춰줘. 둘 다 반 박자 느려.”
“카를라야. 얘 좀 혼내 줘!”
다소 격렬한 의견 교환.
일행은 반나절 동안 벌인 전투를 피드백했다.
표현이야 과격하지만 나름 동료애가 쌓여서 저러는 거니까 괜찮…….
“야! 핑 레이! 나와!”
“좋다. 이번에야말로 결판을 내자.”
지는 않은 것 같군.
옐로우 스톰과 무극 팀도 일행의 활약상을 분석하기에 바빴다.
“이 정도면 우리 팀에 밀리지 않겠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지영 씨는 각성 2년 차라고 하지 않았나? 엄청나군.”
“길드장도 마찬가지다.”
“에이, 진호 길드장은 예외로 둬야지.”
왁자지껄 떠드는 길드원들.
여전히 세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비무장지대 공략 이후 서로에 대한 벽이 하나 없어진 분위기다.
-모두 그대의 계획대로 흘러가는구나.
“갈 길이 멀지.”
무극과 옐로우 스톰.
국내 1, 2위를 다투는 바벨탑 공략 팀이다.
지금이야 신준석과 홍윤수라는 두 랭커를 주축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역천 길드에 완전히 동화시키려면 조금 더 계기가 필요하다.
다이아몬드 등급.
그러니까 60층대에 들어서서 같이 공략을 진행하면 달라지겠지?
조금씩 서로에 대한 벽을 허물어가는 길드원들을 흘겨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오우거 요새] 게이트 앞으로 가니 화랑 길드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의 숫자가 늘어났구나.
“그러게?”
100명.
어제보다 두 배로 뻥튀기된 화랑 길드원들이 일행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