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전라북도 남원.
회귀 후 세 번째 지리산행이다.
첫 번째는 민담이나 전설과 관련된 정수를 포식하려고 무작정 산을 올랐었다.
그때 포식한 게 괴력.
튜토리얼이나 탑 저층에서 유용하게 사용했고.
지금도 여러 정수를 하위 개념으로 종속시키면서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스킬이다.
두 번째는 이매망량의 구덩이 공략.
미스틸테인에 지배당했던 플레이어, 조승철이 [유부의 열쇠]를 얻었던 게이트를 공략할 때다.
그 덕분에 정수 포식 시 모든 스텟을 올릴 수 있게 되었지.
나름대로 인연이 깊은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곳.
“스승님, 이번에는 구례가 아니라 남원으로 왔네요?”
“지리산이 생각보다 넓거든.”
전남, 전북, 그리고 경남에 걸쳐 있는 산.
이번에 공략할 [오우거 요새]는 남원 쪽으로 올라가야 가깝다고 한다.
“민족의 영산이라 그런가. 참 공기가 좋구먼.”
신준석은 허허로이 웃었다.
“나이 들어 보이게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길드장님, 내버려 두십쇼. 저 친구는 무도의 길이라고 주장하는데 겉멋이 든 겁니다.”
홍윤수가 아무렇지 않게 정곡을 찔렀다.
잠깐만.
저 선배님, 원래 저런 말투가 아니었나.
마뜩잖은 시선으로 흘겨보니 신준석의 눈빛이 좌우로 흔들렸다.
“큭, 자네. 그러긴가?”
“무협 소설로 언어 공부를 하면 저렇게 되니 조심하시죠.”
“커흠, 무공 사용자라면 모름지기 말투와 행동거지부터 달라야 하는 법. 심기 일체가 되어야 한다네!”
“원래부터 저런 게 아니라 컨셉이었다니.”
내 입이 쩍 벌어졌다.
회귀 전, 후를 통틀어서 처음 밝혀지는 충격적인 진실!
전생에도 무공 사용자라는 동질감으로 나름 신준석과 가까이 지냈기에 더 임팩트가 컸다.
“후배님, 궁금한 게 하나 있네만. 이번 공동 공략, 어딘가 수상하지 않나?”
“엄청 수상하죠.”
“그런데도 제안을 받아들이다니.”
“함정은 알면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요.”
난 느긋하게 대꾸했다.
화랑 길드의 술수를 정확하게 짐작할 수는 없다.
구룡방처럼 게이트를 죽음의 함정으로 개조해 놨거나.
아니면 단순히 힘 싸움을 걸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국내에서 역천 길드의 위명을 높일 기회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한데 블랙 네트워크 건은 미뤄놔도 되느냐?
“어차피 공략이라고 해 봐야 하루 이틀이면 끝나. 그 정도는 자기들도 이해해 줘야지.”
-흐응, 제멋대로인 남자로구나.
“새삼스럽기는, 몰랐던 것처럼 말하네.”
-후훗, 마침 저들도 오는구나.
닉스가 웃음을 흘렸다.
검은 밴이 줄지어 뱀사골 초입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10월 초.
공기를 답답하게 채우던 습기가 많이 가신 탓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요란 떨기는.”
후우웅!
한 줄기 바람이 뿌연 먼지를 걷어 낸다.
스킬 시동어 없이 자연스럽게 바람을 조종한 홍윤수.
의지만으로 바람에 간섭하는 경지라니. 마스터 등급에서도 먹힐 만한 실력이다.
회귀 전보다 더 실력이 빠르게 늘어나는 것 같은데?
줄줄이 멈춘 밴의 문이 열리면서 무장을 갖춘 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꿀꺽.
지영이가 침을 크게 삼켰다.
긴장될 만도 하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화랑이라는 이름 앞에 섰을 때 반사적으로 움츠러들 것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LS 그룹도 대규모 자본을 투자해서 백호 길드를 설립했지만, 화랑의 아성을 넘지 못 했다.
플레이어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화랑의 이름값을 의식할 수밖에.
“사부한테 시비 거는 걸 보면 자살 희망자들이군.”
“죽여 버릴까. 아저씨?”
핑 레이는 조소를 던졌고.
엔리케 녀석은 한술 더 떠서 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말조심 좀 해라. 이것들아.”
“저놈들. 일부러 먼지 풍기잖아요.”
“엔리케야, 힘 자랑을 하고 싶으면 형한테 덤벼라.”
“헤, 헤헤. 아닙니다. 아저씨.”
타이탄을 얻고 나서는 더 기고만장해졌단 말이지.
게이트 공략이 끝나면 기를 한번 눌러줘야겠다.
저벅- 저벅-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군. 역천 길드장.”
대한민국 플레이어 랭킹 1위.
그리고 화랑 길드의 장.
완전 무장을 갖춘 사내가 묵직한 발걸음을 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맞춤형으로 제작한 풀 플레이트 메일.
가슴팍 부근에는 화랑 마크가 떡하니 박혀 있다.
“국내 랭킹 1위를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영광까지야, 명성 드높은 향신료 제도의 영웅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
둘 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예를 표했다.
“화랑은 이번 공략에 다이아몬드 등급 20명, 플래티넘 30명을 동원하기로 했다네.”
“역천 길드가 나설 자리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 아닌가.”
오장우는 비장한 표정으로 몸을 돌이켰다.
화랑 길드의 최정예라.
바벨탑이 열린 지 약 10년.
이 시점에서 국내 정상의 자리를 고수한 길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까.
은근한 기대를 담은 채, 게이트에 입장하는 화랑 길드원들을 흘겨보았다.
* * *
[오우거 요새에 입장했습니다.]
[분류 - 개방형 / 필드형 게이트]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면 게이트가 닫힙니다.]
[게이트 안에서의 사망은 곧 현실입니다.]
화랑 길드 50명.
그리고 역천 길드 17명이 모두 입장을 마쳤다.
“이번 게이트 공략은 협력 체계라는 것을 명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협회에서 파견된 요원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담당인 한수창 팀장은 비 각성자라서 게이트에 진입할 수 없었다.
그 대신 파견된 부팀장이 이번 게이트 공략 과정을 참관한다고 한다.
말은 저렇게 해도.
화랑이 좋은 의도로 공동 공략을 운운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다 알고 있으니까.
우리보다는 화랑을 견제하는 멘트였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오장우는 무심하게 대꾸하며 가장 앞에 섰다.
“그래도 이 게이트를 경험한 입장이니. 선두에 서겠다.”
“뭐, 편하실 대로 하시죠.”
앞장서는 화랑 길드.
수풀이 무성하게 자란 숲을 천천히 나아간다.
사박- 사박- 허리까지 자란 초목을 밀칠 때마다 작은 소음이 났다.
[레서 사운드]
음향이 퍼져나가는 것을 낮추는 광역 결계.
“미리 자료를 보내 놨다만. 오우거는 소리에 민감하니 주의하게.”
오장우는 짧은 경고의 말을 남기고 다시 전진했다.
내 옆으로 다가온 지영이가 의문 섞인 표정을 지었다.
“오우거가 그렇게 위험해요?”
“난들 아냐.”
“스승님은 뭐든 다 아시잖아요.”
“플래티넘이라면 1대1이 조금 버겁고 다이아몬드면 둘까지는 상대할 수 있을 거다.”
“뭐가 그렇게 세요?”
“강하고 민첩하지. 마법저항력도 높으니까.”
“후배님의 말이 옳다네. 어지간한 마법은 통하지도 않으니 발을 묶고 고화력을 퍼붓거나, 아니면 근접전으로 제압해야 하지.”
신준석이 설명을 거들었다.
쿵! 쿵!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린다.
먼 곳에 있는 나무가 좌우로 밀려나면서 나뭇잎이 나풀거리고.
젖혀진 나무들 사이로 초록색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5미터에 달하는 신장.
보디빌더만큼이나 부풀어 오른 근육이 위협적으로 꿈틀거린다.
우락부락한 눈동자 위로 아른거리는 살기. 이 게이트의 주민인 오우거다.
숫자는 모두 12마리.
오우거들은 수십 미터 높이의 나무를 원숭이처럼 능숙하게 타면서 빠르게 접근했다.
[프로미넌스]
[라이트닝 볼텍스]
[윈드 캐논]
화염 기둥이 치솟고 번개의 소용돌이가 오우거들에게로 쇄도한다.
한발 늦게 솟구친 강렬한 바람은 화염과 번개를 아우르면서 파괴력을 증대시켰다.
범상치 않은 마법 연계.
오우거들은 양팔을 위로 올린 채 마법을 육신으로 받아냈다.
핑 레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괴물이구려.”
오우거들이라고 해서 멀쩡하지는 않았다.
마법 연계를 선두에서 받아낸 놈들은 피부가 녹아내리고 뼈가 드러나 있었다.
오우거들은 멈추지 않았다.
[분노의 인장]
[마그네틱 필드]
[불굴의 의지]
오우거들의 동선을 억지로 고정시키는 탱킹 스킬들.
선두에 있는 오장우가 방패를 치켜세우고는 오우거의 몸통을 들이받았다.
“넌 못 지나간다.”
탱킹과 딜링 모두 가능한 전천후 플레이어.
오장우의 검과 방패에 깃든 오러가 괴물을 마구 도륙했다.
화랑 길드원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탱커들의 활약으로 오우거 특유의 돌파력이 묶인 틈을 타 근거리 딜러들이 병장기로 난도질했고.
상대적으로 효과가 작지만, 원거리 딜러들도 마법을 욱여넣었다.
-꽤 합이 잘 맞지 않느냐.
“그러게, 수준급이야.”
2026년의 플레이어 수준.
너희 덕분에 잘 알았다.
“몸을 너무 사리지만 않으면 더 괜찮겠어.”
난 턱을 만지작거렸다.
스킬 운용이나 연계 자체는 나쁘지 않다.
아쉬운 점은 화랑 길드의 연계 자체가 안전 지향적이라는 건데.
최대 화력을 퍼붓기보다 어그로를 여기저기서 끌어 주면서 탱킹에 부담을 안 주는 식이었다.
“우리 애들은 저렇게 안 키워야지.”
멸망의 시대에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게 기본이다.
100%의 컨디션으로 전투를 벌인다?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상황이 아니니까.
화랑의 전투 스타일은 만전의 컨디션 때나 가능한 배부른 방식이다.
“쿠억…….”
마지막 오우거가 쓰러지자, 오장우가 다가왔다.
“어떤가?”
“오우거를 본 건 처음인데 꽤 강하군요.”
“놈들의 돌파력은 경이로운 수준이지. 조심하는 게 좋아.”
오장우는 엷은 웃음을 띄웠다.
멋있는 모습 보여줬다고 생각하나 보네.
“다음 전투는 역천에서 맡죠.”
“무리하지 않는 게 좋지만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양보하는 척하는 오장우.
수풀을 헤치면서 나아가다 보니 금세 다른 오우거 무리의 관심을 끌었다.
이번에는 20마리.
오우거 요새가 왜 아직까지 공략이 안 됐는지 이해가 갔다.
“저 녀석들은 나 혼자 처리합니다.”
어깨를 좌우로 풀면서 앞장서자 화랑 길드에서 한탄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무 무모하군.”
“아무리 잘나간다고 하지만 심하지 않나?”
다 들리거든요?
험담을 하려면 안 들리게나 할 것이지.
오장우가 짐짓 웃음기를 꾹 내린 채 내 앞을 막아섰다.
“봤지 않나. 오우거는 쉬운 상대가 아니다.”
“뭐, 주먹을 직접 부딪쳐보면 알겠죠.”
말리는 척하는 오장우를 가볍게 밀어내고는 나무 위로 도약했다.
선두 그룹에 있는 오우거가 커다란 눈을 부라리더니 아름드리나무의 밑동처럼 두꺼운 팔을 세게 휘둘렀다.
태산 같은 바위도 쪼개는 괴력.
처음부터 피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괴력을 사용합니다.]
근력 증폭률이 600%로 늘어난 괴력.
오우거의 주먹을 정면으로 받아치는 순간.
퍼엉! 놈의 근육이 바람을 한계 이상으로 담아낸 풍선처럼 터져 버렸다.
“쿠어어어?!”
“왜, 뭐가 잘 안 돼?”
당혹감으로 물든 오우거의 눈빛.
그 빛이 두려움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놈이 몸을 돌이키면서 도망치려는 순간.
[핏빛 도취를 사용합니다.]
악귀에게서 추출한 정수.
대상의 몸뚱이를 잡아당기는 스킬로 오우거가 이탈하려는 것을 막았다.
훤히 드러난 괴물의 가슴팍.
응룡황권으로 타격하자, 5미터의 거구가 들썩이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이건…….”
오장우의 입에서 쥐어 짜낸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벌써 놀라기는 이른데.
오우거는 많았다.
보여줄 게 한가득한데 잘 됐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