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화랑 길드.
바벨탑이 나타난 지 얼마 안 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국내 정상의 위치를 지켜 왔던 굴지의 플레이어 길드다.
LS 그룹의 지원을 받은 백호.
화랑과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어 줄곧 국내 정상의 자리를 두고 경쟁했던 불사조.
그 외에도 여러 길드들이 화랑의 아성을 넘어서려고 노력했지만 10년 동안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국내 정상의 자리.
그 입지를 흔드는 게 각성 1년 차 플레이어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빌어먹을.”
오장우. 화랑 길드 마스터는 초조한 기색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텅 빈 회의실.
1시간 뒤로 예정된 길드 정기회의 때 할 말을 미리 정리하려고 내려왔지만, 실타래처럼 뭉친 생각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유진호…… 유진호!’
꾸드드득.
책상 모퉁이가 으스러졌다.
진호가 화랑 길드의 앞을 막아선 것은 튜토리얼 때부터였다.
화랑 길드에서 거액을 투자한 신예, 박종원이 튜토리얼에서 망신을 당한 것.
그뿐이랴.
진호는 당시 제 몸값으로 1천억이라는 현실성 없는 금액을 불러서 모든 이슈를 짓눌러 버렸다.
‘그 금액을 줘서라도 섭외하는 게 정답이었나?’
당시만 해도 국내 3대 길드에서는 진호의 선언을 귀 기울이지 않았다.
LS 그룹에서 만든 백호 정도나 관심을 가졌지.
그마저도 관심 수준에서 멈췄지, 실투자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데 진호의 위상은 1년 남짓한 시간 만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아 올랐다.
1차 대침식 초기에는 고위험군 게이트들을 모조리 공략했고.
외국에서도 처치 곤란해하는 게이트를 폐쇄하면서 향신료 제도의 영웅이라는 호칭까지 얻었다.
그뿐이랴. 10대 마경 중 하나를 조사해서 구체적인 자료를 넘기기까지.
탑에서는 각 층의 신기록을 모조리 갈아 치우는 기염을 토해 내고 있다.
화랑 길드를 위협하는 건 진호 본인의 활약상만 있는 게 아니다.
‘무엇으로 두 사람을 포섭한 거지.’
랭커 중 길드에 들지 않은 유이한 인물.
홍윤수 그리고 신준석을 끌어들여서 길드를 설립했다.
국내 제일의 길드인 화랑만 해도 랭커가 셋뿐.
수년 동안 바뀌지 않았던 3강 구도를 흔들어 놓을 변수가 된 것이다.
“길드장님, 안녕하십…… 허업!”
막 회의실에 들어온 임원 하나가 숨을 몰아쉬었다.
공간을 가득 메운 살기.
한발 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오장우가 기운을 갈무리했다.
“미안하군.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하하, 아닙니다, 길드장님.”
임원은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냈다.
금세 채워지는 회의실.
상석에 앉은 오장우가 임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럼 시작하지.”
“예, 오늘 안건은 역천 길드에 대한 방침입니다.”
비서는 미리 준비한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최근 역천에 러브 콜을 보내는 길드들이 늘었습니다. 원인은 미션 보상 강화로 추정됩니다.”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진짜인가?”
“그렇습니다. 유진호와 미션을 같이 치른 국내 플레이어들의 증언을 확보해 두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성좌들이 개입했다는 문구를 봤다고 합니다.”
“믿기지 않는군. 난 성좌님들의 음성을 듣기도 힘들구먼.”
임원 하나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플레이어다.
플래티넘에서 다이아몬드 사이.
탑에서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베테랑들이기에, 화랑 길드의 임원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저 소문을 믿기 어려워했다.
“흐음, 중요한 건 성좌의 개입 유무가 아니오.”
오장우의 묵직한 말이 임원들의 수군거림을 잠재웠다.
“화랑이 어떤 식으로 대응하느냐가 문제지.”
“구룡방의 투자 건도 무효가 되지 않았습니까.”
장 우페이의 허무한 죽음.
구룡방은 둔황 사막에서 벌어진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 이후 내리막길을 쭉 걸었다.
길드의 주요 전력이 몰살당한 사태!
중국 제일의 길드에서 밀려난 것은 물론이요.
구룡방의 남은 이들도 파벌을 갈라서 자기 지분을 찾기에 바빠서 완전히 사분오열되었다.
“길드장님께서 승인하신 일입니다. 이제 와서 뭐라 한들…….”
임원 하나가 오장우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과거였으면 벌어질 수 없는 일.
오장우는 진호와 관련된 일에서 연이은 실책을 저지른 탓에 길드 내 영향력을 꽤 잃은 상태였다.
“협회에서도 게이트 분배에서 화랑 지분을 조금씩 빼고 있습니다.”
“그쪽도 유진호와 커넥션이 있었죠?”
“특무대원 아닙니까.”
“하, 그놈의 특무대원.”
플레이어 협회는 구룡방과 화랑의 밀월 관계를 알아채자마자 알음알음 페널티를 부과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유명무실했던 조직이지만.
게이트 사태가 벌어지면서 협회의 위상은 하늘 높이 올라갔다.
플레이어 협회가 영향력을 크게 키울 수 있었던 건 진호의 도움이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이제는 유진호와 척을 져서는 안 됩니다.”
“불사조나 백호를 밀어내게끔 지원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군요. 특히 백호의 전력은 둘로 나뉘어 있으니까요.”
“아, 서정민 플레이어라고 했죠?”
“내부에서 세력을 꽤 키운 모양입니다. 서현민 길드장을 밀어낼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회귀 전에는 흑호의 난을 일으켰던 서정민.
백호는 내부 갈등 때문에 국내 3대 길드에서 추락하는 불명예를 겪게 된다.
하필이면 진호를 판에 끼워서 서현민의 입지를 줄이려고 했다가 미래가 틀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3대 길드 중 입지가 제일 불안정한 건 여전했다.
“하나 묻지. 우리가 손을 건넨다고 해서 유진호가 잡을 것 같나?”
오장우의 목소리가 회의실 전체에 감돈다.
높지 않은 음색.
큰 힘을 싣지 않았는데도, 임원진 전원의 목소리를 가릴 정도의 존재감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역천이 더 기세를 타기 전에 한 번 눌러 줄 방법을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오장우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저, 길드장님. 차라리 우리의 힘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힘을 보여 준다?”
“예, 화랑 길드의 저력을 보여 줘서 유진호가 스스로 손을 내밀게끔 말입니다.”
오장우의 입술이 씰룩였다.
막 발언을 꺼낸 임원은 그의 흥미를 끄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뒷말을 이었다.
“지리산에 있는 오우거 요새 공동 공략을 협회에 건의하는 겁니다.”
“오우거 요새는 우리도 전면전이 힘든 곳 아니던가.”
“홍윤수와 신준석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오우거 요새.
협회에서 A등급으로 분류하는 고난이도 게이트다.
화랑 길드는 그 게이트를 배당받은 후 정면으로 공략하기보다 괴물들의 숫자를 줄여 주면서 임계에 도달하지 못하게끔 막고 있었다.
오장우는 팔걸이를 툭툭 건드렸다.
‘역천 길드에 우리의 저력을 보여줄 겸, 골치 아픈 게이트도 같이 치워 버릴 수 있겠군.’
협회에 중재를 요청하면 화랑의 주가도 하락할 것이다.
그렇지만.
“김우성 협회장한테 연락을 넣어라. 내가 찾아갈 터이니.”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오장우는 임원 회의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갑작스럽게 나를 찾아온 한수창 팀장.
그는 뜻밖의 소식을 전달했다.
“지리산에 있는 게이트를 공동으로 공략하자, 라.”
“오장우 길드장님이 협회장님께 직접 제안했다고 합니다.”
“화랑 길드가 협회에 빚을 달아 두다니. 의외네요.”
플레이어 협회는 늘 길드보다 한 수 모자라는 취급을 받았다.
1차 대침식 이후에 협회의 영향력이 커졌다지만, 여전히 국내 3대 길드에 비해서는 한 수 모자랐다.
한수창 팀장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모두 진호 대원님 덕분입니다.”
“그거야 말씀 안 하셔도 알죠.”
-후우, 그대는 조금 더 겸손해야 할 필요성이 있느니라.
난 여신님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렸다.
“그런데 지리산 쪽에 열렸다는 게이트는 뭡니까?”
“이름은 오우거 요새. 말 그대로 오우거들이 출몰하는 A급 게이트입니다.”
흐음.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 봐도 떠오르는 게 없다.
원 역사에서는 화랑 길드에서 잘 폐쇄를 한 모양이다.
“오우거라면 난이도가 꽤 있군요.”
“플래티넘 등급 플레이어에게도 위험한 장소입니다.”
“아직 클리어를 못 했다는 건 임계가 되지 않게 관리를 한다는 뜻이고요.”
“맞습니다. 그래서 협회를 통해 역천 길드와 공동 공략을 진행하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냄새가 나는군.
오장우가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우리를 호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랑 길드에는 다이아몬드 등급 플레이어도 꽤 있으니까.
게이트 내부에서 변수가 없으면 꾸준히 시간을 들여서 공략이 가능하단 말.
“진행하죠.”
“괜찮으시겠습니까? 화랑 길드의 노림수가 있을 겁니다만.”
“뭘 준비하든 저한테는 안 될 겁니다.”
전력은 넘치고도 남았다.
내 기량은 회귀 전을 기준으로 30% 이상 회복했다.
당장 60층 너머로 가도 압살할 정도의 수준까지 강해졌다.
날 따르는 동료들은 또 어떤가.
하나같이 멸망의 시대에서도 이름을 떨쳤던 이들이다.
그때의 기량을 찾으려면 갈 길이 멀지만.
현 등급 이상의 전투 능력을 지닌 건 사실이다.
랭커 둘도 있고.
“그리고 좋은 기회잖아요.”
“어떤 기회 말입니까?”
“역천이 국내에서 제일가는 길드라는 것을 알릴 기회요.”
세계 최고의 길드는 골드 문 길드, 그리고 윌리엄 록펠러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국내 1위 정도는 내가 가져가도 되잖아?
역천의 유명세가 올라가면 다음 계획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소수정예라고 해서 명성이 필요 없는 건 아니지.
“무덤에 제 발로 기어들어 오겠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있습니까?”
화랑 길드가 뭘 준비하는지는 알 수 없다.
공동 공략에서 힘 싸움을 할지.
아니면 구룡방처럼 함정을 팔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공략에서 경쟁을 하자고 하면 지그시 눌러 주고.
구룡방처럼 사생결단을 벌이려고 한다면 그 목숨을 거두어 주면 그만이다.
화랑 길드가 건재했던 미래.
멸망의 시대 때에도 큰 도움은 되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놈들을 치우는 걸 망설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 공동 공략 건은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한수창 팀장님.”
바뀌어 가는 미래.
나는 그 흐름을 쥐면 쥐었지, 흘러가는 대로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