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모든 인원이 보상을 선택했습니다.]
[황혼의 제단이 닫힙니다.]
전설에서 초월급을 오가는 강력한 성유물.
일행의 전력이 한 단계 상승했다.
다이아몬드, 아니 마스터 등급까지도 통용될 정도의 장비들이니.
“스승님, 그 항아리는 뭐예요?”
“나도 잘 몰라.”
“에이, 좋은 성유물 혼자 드셔 놓고 모르는 척하는 거 있기 없기?”
“넌 돌아가서 대련이다.”
“우씨!”
하여간 저 파멸의 조동아리.
원조답게 핑 레이보다 한 수 위의 말발(?)을 자랑했다.
가만히 앉아서 매를 버는 재주가 있어.
현실 세계로 돌아와서는 훈련장을 통으로 비워 놓았다.
“아싸! 훈련 안 한…….”
“하기는. 2시간 뒤에 내려와라.”
지영이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나는 훈련장 정중앙에 섰다.
투박한 그릇 안에 담긴 은빛 액체.
살짝 건들자 파도치듯이 그릇 안쪽에서 찰랑거린다.
과학 시간 때 본 수은 같네.
-그걸 시험해 볼 생각이로구나.
“응, 이왕 얻었으니 바로 사용해 봐야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
회귀 전 지식을 뒤져 봐도 본 적이 없는 스킬이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항아리를 붙들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사용합니다.]
[사용자의 기억이나 경험에서 마주한 상대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대상의 이름을 떠올리거나 언급해 주십시오.]
히페리온.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이다.
내 가슴팍에 창날을 꽂아 넣은 성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분노와 힘은 시간을 거스르는 이적을 가능케 해 주었다.
얼마나 고마운 놈이야?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성좌조차 구현 가능한 스킬이 있을 리가.
이른바, 테스트인 거지.
그 순간.
찰랑거리던 은빛 액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공중으로 솟구쳤다.
두근- 두근-
혼원룡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
잠깐만.
이건 뭔가 잘못되었…….
“쿠허헉!”
목을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액체.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벌리는 순간 핏방울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대여!
닉스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들려온다.
마나 폭주.
그리고 주화입마.
몸 안에 깃든 마나와 내공이 제어를 잃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대상이 사용자의 마력에 비해 너무나도 강합니다.]
[히페리온 구현에 실패했습니다.]
진한 상실감과 고통.
늘 혼원룡의 심장을 충만하게 채워온 마나가 바닥 가까이 떨어졌다.
스킬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급격하게 소모된 마나.
그 과정에서 제어력을 상실.
컨트롤에서 벗어난 마나 일부가 전신을 날뛰고.
그 파장에 맞춰 내공도 단전을 벗어나 몸 곳곳을 들쑤셔 놓았다.
나는 가부좌를 틀었다.
외부로 향하는 감각을 모조리 차단.
오직 내부를 관조하며 폭주 중인 내공과 마나를 원위치 시켰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대여, 이대로 쓰러지면 곤란하니라!
-이 세상에서 그대가 사라지면 여 혼자 어찌하라고…….
닉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사방팔방 날뛰는 마나와 내공을 모조리 휘어잡자, 일부러 꺼트렸던 외부 감각도 하나둘 살아나기 시작했다.
“괜찮아.”
-그대, 정신을 차렸느냐!
“여신님 덕분에.”
눈을 슬며시 뜨자 닉스가 보였다.
영체로 내 곁을 빙글거리며 돌아다니는 닉스.
불긋불긋해진 두 눈을 보니 방금 전의 급박했던 상황이 떠올랐다.
-다신 그런 위험한 시도를 하지 말거라!
닉스의 엄한 목소리가 고막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작은 몸체로 말해 봐야 귀엽기밖에 더 하겠냐 만은…….
“미안, 조심할게.”
난 빠르게 사과했다.
위험한 짓을 한 것도 맞았고.
닉스에게 괜한 걱정을 안겨 주었으니까.
-한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구나. 어서 설명해 보아라.
“스킬은 성공했어.”
-다른 건 몰라도 피 분수를 뿜어내는 데는 성공하였구나.
“…….”
방금 전에 저지른 일이 있다 보니 할 말이 없군.
한 템포 쉬고는 다시 입술을 떼었다.
“스킬을 발동시키려면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해. 마나, 금속의 수준, 그리고 상대의 구체적인 이미지.”
금속 수준.
그리고 대상을 연상하는 ‘경험’은 충족시켰다.
“모자라는 건 마나였다.”
탑이 세계를 침식하는 순간부터, 고신들은 전성기의 힘을 펼칠 수 있다.
성좌를 구성하는 힘.
그러니까 타인의 ‘추종’으로 생기는 존재력을 해당 차원의 에너지로 충당하는 것이다.
히페리온은 등급으로 치면 S급 성좌.
내 마나로 S급 성좌를 구현하려고 했으니 탈이 날 수밖에.
-참으로 값진 교훈을 얻었구나.
닉스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어지간히도 못마땅한 모양이군.
실제로 위험하기도 했다.
본래 마나 폭주만 일어나는 게 정상이지만 진(眞)여의주의 공능이 독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쏘진 마. 나도 잘못한 건 아니까.”
히페리온을 구현 대상으로 삼은 건 두 가지 이유다.
첫 번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한계를 알아보기 위해서.
스킬 설명을 보면 내 경험이 구체적일수록, 빚어낸 대상의 능력치도 원본과 가까워진다.
두 번째는 히페리온 녀석이 그만큼 내 기억에 남아 있어서다.
생각해 봐라.
결과적으로야 놈의 막대한 신력을 이용했지만, 어쨌든 내 가슴에 대못……. 아니지, 창을 쑤셔 박은 놈이다.
“좋아, 그러면 적당한 걸 구현해 볼까.”
혼원룡의 심장이 마나를 채우는 동안 핏자국을 닦아 냈다.
스킬 실패의 반동으로 찾아온 충격.
훈련장 결계도 이런 상황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피를 모두 닦아 낼 때쯤, 바닥까지 떨어졌던 마나가 대부분 회복되었다.
-또 시도할 셈이더냐?
“이번에는 무리 안 할게.”
-그래, 믿어 주는 척하겠노라.
닉스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나도 각혈하는 취미는 없거든요?
불굴의 금속을 담아 둔 항아리를 신중하게 잡은 후.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사용합니다.]
스킬을 발동했다.
내가 이번에 구현할 존재는…….
촤라라락!
기억 속의 존재를 떠올리자, 불굴의 금속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대여, 이 모습은?!
놀란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 * *
백옥같이 하얀 피부.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
그리고 붉은 눈동자.
은색 금속은 뭇사람들의 시선을 홱 잡아당길 정도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다.
-설마 여를 구현한 것이더냐?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밤의 여신을 구현했습니다.]
[구현도 - 100%]
“정답이야.”
크크크, 나는 웃음을 삼켰다.
가장 이해도가 높은 성좌.
아이러니하게도 그 존재는 내 옆에 있었다.
닉스와 동일한 모습을 띤 금속 인형.
차이점이 있다면 머리카락이 은색이라는 것이다.
-한데 이상하구나.
“왜, 여신님 닮아서 싫은 건 아닐 테고.”
-여를 구현했다고 하면 만전의 상태를 빚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느냐?
“그러면 내 심장이 터졌겠지.”
밤 자체인 여신.
닉스가 본신의 힘을 지니고 있을 땐 신왕급인 제우스도 한 수 접어 줘야 했다.
신왕보다도 위에 선 개념신.
다른 신화들을 뒤져봐도 닉스에 견줄 만한 성좌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언을 했구나. 미안하도다.
“크크, 정확히는 하고 싶어도 못 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구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험’해 본 것이다.
닉스라는 성좌를 떠올려도.
내가 본 건 전성기 시절의 그녀가 아닌 고신족들의 흉계에 휘말려 힘을 모두 잃어버린 모습이다.
그러니까 구현도 100%가 나오지.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만만치 않군.”
-무슨 의미더냐?
“여신님을 구현하는 데 마력을 반이나 사용했어.”
내 마나 보유량은 규격 외다.
아크만 해도 [아크 리치 군주]의 보정을 받아서 마력 스텟이 엄청 높은데, 나보다 낮다.
다이아몬드.
아니지, 마스터급 마법 계열 플레이어는 되어야 마나 보유량이 나랑 비슷할 거다.
그 막대한 마나를 무려 ‘절반’이나 소모해서 구현한 게 약화된 여신님이라면?
“제대로 된 성좌를 구현하려면 마나가 엄청나게 들어갈 거다.”
튜토리얼에서 용아병의 정수를 포식한 뒤로 느껴 본 적 없던 마나 부족 현상.
의외의 상황에서 맞닥뜨리니 새삼 신기했다.
『창조자여, 그대는 언제까지 여를 관찰할 생각이더냐?』
낭랑한 목소리.
설마.
“네가 나를 부른 거냐?”
『그러하다. 여를 빚어낸 존재는 배려심이 부족하구나.』
닉스와 동일한 말투를 사용하는 자.
아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구현한 ‘닉스’가 대꾸했다.
생김새만 똑같은 줄 알았는데 성격까지 비슷하네.
-흐응, 그대의 눈에는 여가 이런 식으로 비추어졌다는 말이로구나.
“……그건 또 무슨 말인데.”
-아무것도 아니니라.
사람 찝찝하게 하기는.
“여신님, 얘랑 한판 붙어 볼래?”
『호오, 여의 원전과 상대할 기회라니. 흥미롭구나.』
닉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현신했다.
뭐야, 한번 던져 본 건데 이걸 바로 받는다고?
“가짜여, 후회하지 말거라.”
『창조자의 앞에서 망신살을 뻗칠 수는 없는 법.』
두 여신은 신호라도 준 것처럼 동시에 극야를 펼쳤다.
닉스의 근원인 밤의 어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빚어낸 극야는 은색을 띠었다.
성질 자체는 원본과 동일하지만 ‘기계장치’ 본연의 개념에서 떨어질 수는 없는 모양.
“제법이구나. 여의 능력을 이만큼이나 흉내 내다니.”
『창조자가 원본에 대해 그만큼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니라.』
몇 분 동안 이어진 전투.
놀랍게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닉스를 상대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버텨 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부여한 마나가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아쉽구나. 여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되었으니.』
철퍽-
은색 닉스의 형상이 무너지면서 항아리 안으로 되돌아갔다.
내구력을 확인해 보니 절반 이상 깎여 있었다.
“상대해 보니까 어때?”
“흥, 불쾌하구나. 여를 따라 하는 존재라.”
닉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입장 바꿔서 내가 저런 상대를 만나면 기분 나빴을 거다.
그나저나.
“쓸 만한 걸 얻었군.”
닉스를 대상으로 시험해 본 결과.
내 ‘기억’이나 ‘경험’만 확실하다면 성좌조차 100%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사용 조건과 마나 소모가 엄청나지만.
위급한 상황을 뒤엎을 역전의 카드로 쓸 비장의 수단이 하나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