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아크 리치 군주]
나이 : 1
레벨 : 300
종족 : 언데드(공허)
직업 : 대마법사
*능력치
근력 : 220
민첩 : 193
체력 : 274
맷집 : 300
마력 : 3,000
*사용자의 레벨에 맞춰 하향 조정되었습니다.
엄청난 마력 스텟.
……이어야 하는데, 명색이 대마법사 클래스인데도 마력이 나보다 낮았다.
원본인 아크 리치 군주는 400레벨대의 괴물.
70층대, 그러니까 마스터 등급이다.
스텟은 낮아도 아크 리치 군주의 격과 무수한 스킬들, 그리고 부속된 장비들은 그대로라서 깎인 전투력이 크진 않았다.
“네 실력을 보여 줘라.”
『주인님의 명예에 걸맞은 힘을 보여 드리겠나이다.』
아크 리치 군주는 앙상한 손가락을 뻗었다.
손끝이 가리키는 건 막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있는 엘프 전사.
『산 자가 공기를 낭비하고 있구나.』
스산한 암흑 마나가 앙상한 뼈마디를 붉게 물들였다.
[데스 핑거]
적중한 대상의 생명력을 증발시키는 죽음의 광선.
-호오, 아까는 못 본 기예로구나.
“그러게, 헬 나이트들이 쓰러진 게 꽤 충격이었나 봐.”
아크 리치 군주의 기량은 생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떨어진 레벨 때문에 마력 총량이나 재배열 속도가 이전보다 못할 뿐.
손가락에 깃든 죽음의 기운은 ‘궁극’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강력한 마법이었다.
몇 초 후.
아크 리치 군주의 손가락을 휘감던 붉은 에너지가 요사스러운 빛을 흩뿌리며 엘프 군대를 향해 떨어졌다.
얽히고설키면서 극대화된 죽음의 기운.
[대정령술]
[네이처 가드너]
엘프들이 미리 불러낸 정령들은 서로의 기운을 조화롭게 엮어서 붉은 빛을 막아 냈다.
충만한 자연의 기운.
아크 리치 군주가 다루는 죽음의 기운과 대척점을 이루는 힘이다.
『버러지 같은 것들. 내가 주인님 앞에서 추태를 보일 거라고 생각하느냐!』
붉은 빛이 가늘게 변한다.
엘프들을 집어삼킬 것처럼 꿈틀대던 죽음의 기운이 자연의 방패를 비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대정령술이 변화한 데스 핑거의 성질에 대응하면서 파고든 죽음의 빛을 짓눌렀지만.
붉은 빛 일부가 튀면서 엘프 군대 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노출된 건 그야말로 한순간.
그 결과는 사뭇 섬뜩했다.
“끄으으윽!”
목을 부여잡으면서 쓰러진 엘프.
생기가 넘치던 귀쟁이들은 생명력을 강탈당한 채 고목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일어나서 나의 주인님께 충성을 맹세하라.』
충만한 죽음의 기운이 엘프의 사체에 스며든다.
들썩거리면서 다시금 일어나는 엘프.
아니, 그 사체로 만든 헬 나이트가 두 눈을 흉흉하게 빛냈다.
『주인님께 충성을!』
헬 나이트들은 병기에 폭마기를 불어넣었다.
약 20기.
엘프 군대에 비해서는 적은 숫자다.
그럼에도.
지옥의 기사들은 두려움 하나 없이 정면으로 엘프 군대에게 달려들었다.
“저 역천의 존재가!”
“부정한 것을 순리대로 돌려주어라.”
빗발치는 화살.
소환된 정령들이 불덩이와 물, 바람을 쏟아 냈다.
정령력을 가득 실은 공격.
인근의 지형지물을 바꿀 정도의 위력이 실린 공격이지만.
헬 나이트들은 암흑 투기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간 힘, 폭마기로 온갖 속성 공격을 무로 되돌렸다.
아크 리치 군주도 손가락만 놓고 있지는 않았다.
[다크 아머]
[다크 웨폰]
『너도 죽어서 주인님을 섬겨라.』
흉포한 기세로 솟구치는 폭마기.
핏방울이 허공으로 비산한다.
엘프의 목숨이 사그라지는 순간, 아크 리치 군주의 턱이 들썩거렸다.
[소울 포제션]
[크리에이트 언데드]
영혼이 죽음을 맞이한 육체를 떠나가기 전.
섭리에서 벗어난 힘이 그 혼을 부정한 몸뚱이에 붙여서 새로운 힘을 부여한다.
고위급 언데드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존재.
막 죽은 혼이 떠나가는 것을 억제시키면서 언데드의 육신까지 제작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사령술] 관련 재능을 보유한 플레이어도 시간을 들어야 할 만큼 섬세한 작업.
아크 리치 군주는 급박하게 바뀌는 전장에서 태연하게 헬 나이트들을 추가로 제작했다.
-제법이지 않느냐. 그대의 소환수.
“실력은 죽지 않았어.”
-한데, 그때는 왜 저런 언데드를 다루지 않았던 게냐?
“영혼과 육체 모두 필요하니까.”
강한 언데드를 만들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술자의 실력.
제작하려는 언데드와 궁합이 맞는 시체.
그리고 강한 영혼.
“헬 나이트에 집중하는 건 좋은 판단이다. 죽음의 기운은 상성에서 불리하니까.”
『감사합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헬 나이트의 숫자가 늘어난다.
반면에 엘프 군대는 주춤주춤 물러나는 중이었으니.
공허 비추기로 아크 리치 군주를 불러내길 잘했다.
“스, 스승님, 뭘 소환하신 거예요?!”
“아크 리치 군주.”
“그것보다 저기 좀 보세요! 데스 나이트가 우글거리잖아요!”
『주인님 앞에서 언동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버릇없는 계…….』
퍼억!
오른손으로 아크 리치 군주의 뒤통수를 어루만져 주었다.
강한 충격에 빠져 버린 턱뼈.
“내 제자한테 험한 소리 하지 마.”
『죄송합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아크 리치 군주는 허리를 푹 숙였다.
턱뼈가 빠졌어도 애초에 정신력을 음파로 변환시켜서 말하는 것이라서 대화에 지장이 없었다.
지영이가 떨어진 아크 리치 군주의 턱뼈를 주워들었다.
“해골 아저씨, 여기요.”
『주인님의 제자여, 마음이 따뜻하구나.』
“작업 멘트도 하지 말고.”
『…….』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보는 아크 리치 군주.
그나저나.
“언제까지고 아크 리치 군주라고 부를 수는 없겠군.”
아크 리치 군주란 어디까지나 ‘존재’의 명칭.
고유명사가 아니다.
렉시와 마찬가지로 이름을 붙여 주는 게 좋겠어.
너무 길기도 하고.
“이제부터 네 이름은 아크다.”
『오, 영혼이 울리는 훌륭한 이름입니다, 주인님이시여.』
-실은 앞에 있는 명칭만 따온 게 아니느냐?
난 대답을 회피했다.
엘프가 증원되는 속도보다 쓰러지는 게 더 빨라졌다.
탑이 만든 NPC답게 원본에 비하면 한 수 모자라는 전투 능력.
저 귀쟁이들은 탑 상층부, 그러니까 다이아몬드 너머에서도 꽤 잘 나가는 종족이다.
아크가 학살을 벌일 수 있는 것도 미션 층수에 알맞은 정도로 하향된 반푼이라서 가능한 일.
“이번 미션, 시시해.”
카를라가 낫 끝을 땅에 대었다.
“너희 차례가 곧 찾아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네.”
단답형으로 말한 카를라는 다시금 전의를 가다듬었다.
쟤는 여전히 대하기가 까다롭단 말이지.
“카를라야, 이번에 그거 갈까?”
“싫어.”
“아아앙, 효과 좋았잖아!”
“번거로워.”
재잘거리는 지영이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카를라.
카를라는 의외로 지영이의 말을 귀찮은 척하면서도 다 받아 주었다.
친한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네.
“긴장감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모두 길드장님을 의지하는 겁니다. 평소에도 이렇진 않습니다.”
김영수가 철없는 길드원들을 비호했다.
어쩌다 보니 영수 형님한테 저 철부지들을 모두 맡겨 버린 셈이 되었네.
지휘 능력 덕에 내 부재 시 길드원들을 이끄는 역할을 맡고 있다.
섭외할 때부터 계획했던 거지만 저 자유분방한 놈들이 형님의 말에 반발 없이 따른다는 건 그 능력을 인정한다는 거겠지.
복작거리는 일행들을 뒤로하고 다시 전장을 바라보았다.
반으로 줄어든 엘프의 숫자.
헬 나이트는 100기까지 늘어나 있었다.
51층보다 약화되어 있는 능력치.
공허 비추기로 구현한 아크가 전보다 약해졌듯, 헬 나이트의 스펙도 뒤처졌다.
그럼에도.
엘프 군대를 압도했다.
-이대로 가면 금방 정리하겠구나.
“과연 그럴까.”
-또 다른 변수가 있단 말이더냐?
“이 미션, 엘프 군대를 처리하는 게 아니잖아.”
콰르르릉!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극도로 압축된 마력탄.
헬 나이트 집단 한가운데로 떨어진 푸른 구체가 대지를 진동시켰다.
「죽다 만 시체들이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날뛰고 있나!」
쿵! 쿵!
지축을 흔드는 발걸음.
연기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강철의 거인들이었다.
* * *
타이탄.
필멸자들이 거신의 힘을 동경하여 만들어 낸 마도 병기.
탑승자의 마력을 증폭, 그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부여하는 강력한 전투 골렘이다.
「이번 상대, 지구인인가 뭔가 하지 않았나?」
「저 뼈다귀, 소환수로구먼.」
「소환수가 소환수를 다뤄? 말세네, 말세야.」
증폭된 음성이 사방에서 튀어나온다.
아오, 머리가 아프군.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큰 목청, 그리고 타이탄을 다루는 종족은 하나밖에 없지.
“우리 상대는 드워프다.”
“와, 진짜 다른 종족이랑 매칭이 되다니.”
“기대되는군요. 사부, 제 성좌께서 알려 주신 선법이 놈들에게 얼마나 통할지……!”
“괜히 깝치다가 죽지 마라.”
핑 레이의 호승심을 가볍게 눌러주고는 타이탄을 세 보았다.
연기 사이로 비치는 타이탄의 숫자는 모두 10기.
-15명당 1기꼴이로구나.
“그러게, 대진 운 한번 더럽군.”
-모두 탑승하지 않은 게 어디더냐?
“타이탄은 드워프들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병기야.”
마도 공학으로 성좌의 힘을 구현하겠다는 발상.
드워프들은 그 오만한 생각으로 필멸의 한계를 넘어서는 병기를 만들어 냈다.
탑 30, 40층에서 볼 수 있는 워 골렘은 타이탄의 초기 버전.
최종 결과물인 타이탄에 비해서는 훨씬 모자란 성능인데도, 증폭률이 엄청났다.
-오호라, 생각보다 굉장한 물건이로구나.
30미터에 달하는 강철의 거신.
타이탄 한 기가 헬 나이트 집단 사이로 뛰어들었다.
『고철 따위가, 죽어라.』
폭마기가 타이탄의 갑주를 찢어발겼다.
너덜너덜해진 타이탄의 발.
「흥! 죽다 만 놈들치고는 제법이군!」
타이탄은 등에 장착한 검을 분리해서 양손에 쥐었다.
파츠츠츠츠!
검 위로 솟구치는 푸른 기운.
강기(罡氣)와 동급으로 놓는 기예, 오러 블레이드다.
폭마기도 힘의 질만 놓고 보면 오러 블레이드에 밀리지 않았지만.
「압도적인 출력이 뭔지 알려 주마.」
오러 블레이드가 지면을 훑고 지나가니 헬 나이트 5기가 소멸해 버렸다.
폭마기를 최대치로 방출했지만 타이탄의 마력 코어에서 솟구치는 파워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좋아.”
나는 히죽 웃으면서 엔리케를 흘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