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51층에서 취할 건 다 얻었겠다.
다음 층계로 올라가려는데.
-마스터, 혹시 바깥으로 나오실 수 있습니까?
길드 분석관인 토마스 밀러의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CP 1,000을 소모하는 전언.
길드원끼리는 탑 바깥에서도 전언을 주고받을 수 있다.
메시지값이 좀 비싸서 문제지.
의아함에 탑 접속을 종료했다.
미션을 연달아 도전한다고 해서 하루 도전 횟수가 차감되는 것도 아니니.
방을 나서자 토마스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갑자기 호출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마스터와 동행을 원하는 플레이어들의 연락이 왔습니다.”
나는 두 눈을 껌뻑였다.
토마스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잠깐 동안의 침묵.
한발 늦게 입술을 어렵게 떼었다.
“왜요?”
“마스터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요새 묘한 소문이 났습니다.”
토마스 밀러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마스터와 같이 참여하면 미션 난이도가 올라가지만, 대신 보상도 엄청 좋아진다는 소문입니다.”
“아, 그거 사실이에요.”
“믿기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좌들이랑 계약을 했거든요.”
“허허, 저도 플레이어로 꽤 오래 활동했지만 금시초문입니다.”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는 토마스 밀러.
사실은 나도 처음 겪는 일이다.
회귀 전후를 통틀어서 이런 적이 없었거든.
그나저나.
“이상하군요. 저랑 같이 미션에 참여한 친구들은 재미를 크게 못 봤을 텐데.”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턱을 만지작거렸다.
난 미션을 진행할 때마다 초월적인 능력으로 기여도를 독차지했다.
더 좋은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짓인들 못 할까.
“경험자들의 말에 의하면 참여만 해도 일반적인 미션보다 5배 이상의 CP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대량의 CP.
아이템이나 촉매 같은 보상도 따라온다고 한다.
“살아남기만 해도 보상이 업그레이드된다고 하더군요.”
“그런 부분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길드원들 사이에서도 이야기가 있었는데, 전혀 모르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말 많은 지영이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제 딴에는 날 배려하려고 일부러 말을 안 한 모양이다.
“그 연락이라는 거, 팀이라도 같이 맺자는 제안이겠군요.”
“맞습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길드들이 러브 콜을 보냈습니다.”
성좌들의 개입으로 강화된 미션.
다른 플레이어들도 반사 이득을 누릴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알아챘으면 길드원들 위주로 미션을 진행했겠지.
아니다.
내 성격상 독식을 하려고 할 게 뻔하니 그렇지도 않았겠구나.
여러 길드의 러브 콜.
잘하면 이용해 먹을 수 있겠어.
“일단 보류해 주세요.”
“마스터의 뜻을 전달하겠습니다.”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 좀 해 봅시다. 분석관도 아이디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참, 말 나온 김에 애들 데리고 52층이나 공략할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길드원들도 기뻐하겠군요.”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는 법이래잖아.
-흐응, 행복을 나누어주는 자치고는 표정이 기묘하지 않느냐.
“공짜는 없는 법이지.”
난 히죽 웃었다.
* * *
[바벨탑 - 52층]
[요새 페르나지에 입장했습니다.]
[미션 - 페르나지 공성전]
이세계의 침략자인 종족 연합은 차원의 원주인을 몰아내려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페르나지는 원주민들의 마지막 요새.
상대 진형의 진군을 막아 내십시오.
▶목표 : 12시간 동안 방어.
▶서브 미션(1) : 포탑 강화.
▶서브 미션(2) : 수성 병기 제작.
▶서브 미션(3) : 지원군 징발.
▶서브 미션(4) : 영웅 출현.
▶서브 미션(5) : 지원군 각개격파.
지면에서 100미터 높이로 솟아오른 커다란 벽.
52층의 무대인 페르나지 요새다.
온갖 마법과 축복을 끼얹어서 어지간한 공격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 성벽.
벽 곳곳에는 길쭉한 마법 포탑이 서 있다.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플레이어.
플래티넘에 머무르는 길드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작위로 매칭된 사람들이다.
“어? 유진호다!”
“대박. 소문은 들었지만 벌써 플래티넘 미션을 수행할 줄이야.”
“조만간 우리나라 랭킹 순위가 바뀔 거라는 이야기가 헛소문이 아니었어.”
[요새 방어군 - 30/30]
[공격자 - 150/150]
[모두 입장을 마쳤습니다.]
5 대 1.
압도적인 인원 차이.
52층 미션은 전 세계를 매칭 범위로 둔다.
180명 중 무작위로 방어군에 30, 그리고 나머지 인원은 공격 측으로 배치한다.
저 높은 성벽과 마법 포탑은 수적 불리함을 감안한 밸런스 패치라고 봐야지.
그럼에도 요새 방어 측이 불리한 건 사실이다.
다른 차원에서 벌어진 원 역사대로 미션이 진행된다고 하는데.
무작위 팀 구성까지 생각하면 밸런스가 좋은 미션은 아니다.
자, 성좌 나으리들. 이번에는 어떤 수작질을 벌여 놨으려나?
[다수의 성좌가 미션에 개입합니다.]
[공격 측 플레이어의 매칭 범위가 전 차원입니다.]
[다차원 혼성 플레이어 군대가 공격군으로 선정되었습니다.]
[플레이어 유진호와 같은 팀, 혹은 같은 길드 소속 인원을 제외하고는 다른 미션으로 매칭됩니다.]
[방어 측 인원이 6명으로 조정됩니다.]
[공격 측 서브 미션 중 3개가 클리어된 상태로 시작됩니다.]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서브 미션 2개가 자동으로 취소됩니다.]
▶서브 미션(3) : 지원군 징발.
▶서브 미션(5) : 지원군 각개격파.
미션 시작과 동시에 빗발처럼 쏟아지는 메시지.
“스승님이 벌인 일이죠?”
“몰라, 내가 한 건 아니지.”
엄밀히 말하면 계약을 맺은 성좌들이 저지른 짓이다.
핑 레이가 한숨을 쉬었다.
“쉽게 가나 했더니, 역시 꿍꿍이가 있었구려.”
“아저씨, 그 소문이 진짜인가 봐요?”
엔리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좌들이랑 계약을 했다.”
나는 오딘을 위시한 신왕급, 그리고 S급 성좌들과 나눈 계약을 짧게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길드원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대박, 우리 성좌님은 말도 거의 없던데.”
“사부의 담대함은 참 따라갈 수가 없구려.”
“더 강해질 기회. 좋아.”
“아저씨, 다음에는 저 부르지 마요.”
“전 길드장님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반응은 제각각 달랐다.
엔리케를 제외하면 다들 긍정적이군.
시간이 맞으면 탑 공략을 같이 진행해도 되겠어.
쿵! 쿵!
성문이 들썩인다.
“벌써 공격이 시작된 건가?”
지면을 가볍게 차자, 시야가 확 넓어졌다.
한 번의 도약으로 50미터에 달하는 성벽에 올라타고는 요새 밖을 훑어보았다.
“미친.”
성벽 아래에 있는 건 180명의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52층의 서브 미션에서 등장하는 엘프 침략군.
원래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나오는 NPC들이지만.
성좌들의 개입으로 미션이 클리어된 것으로 취급, 전장에 열려 있는 차원 문 너머로 쉼 없이 나타났다.
한발 늦게 뒤따라온 길드원들도 헉, 하고 소리를 질렀다.
“스승님, 52층 미션 원래 이래요?”
“그럴 리가.”
성벽 아래에 있는 엘프는 약 100기.
문제가 있다면 공격에 합류하는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으음.
공격대의 핵심인 플레이어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군.
180 대 6.
인원수도 압도적으로 불리했지만, 상대가 다차원 혼성 플레이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뭐,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쇄애애액!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엘프의 화살.
정령력을 실어서 강철도 뚫을 수 있는 공격이다.
“이래서 귀쟁이들이란.”
쯧, 혀를 차면서 손을 휘둘렀다.
메탈 반사 장갑을 두를 필요도 없었다.
[페르나지 요새의 방어 마법이 발동됩니다.]
[투사체 공격의 속도를 70% 감소시킵니다.]
괜히 요새가 아니라는 말.
확연하게 느려진 화살을 가볍게 낚아채고는 툭, 부러트렸다.
“이런 걸로 나를 해하려면 100년도 모자랄 거다. 하긴, 오래 사니까 상관없으려나.”
화살을 쏜 엘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꽤 먼 거리인데 귀는 밝구먼.
성문을 공격하던 엘프들도 나를 알아채고는 공세 방향을 바꾸었다.
빗발치는 화살비.
진동 결계가 내 앞을 막았다.
수 겹으로 겹쳐서 강화시킨 방어막은 엘프들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튕겨 냈다.
“결계를 겹치는 솜씨가 제법 늘었군.”
“헤헤, 다 스승님 덕분이죠.”
지영이는 검지와 중지로 V 자를 그렸다.
“사부, 엘프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소. 그렇다고 성문을 열 수도 없는 일인데 어찌하면 좋소?”
“그러게, 소모전은 나도 생각 안 했는데.”
서브 미션 클리어라.
51층에서 아크 리치와 둠 나이트들을 강화시킨 건 애교라고 느껴질 정도다.
엄청난 악조건.
어느 성좌가 개입한 지는 모르겠지만 영성을 엄청나게 소모했을 것이다.
내가 패배하는 걸 그만큼 보고 싶어 할 녀석이 있던가?
제우스, 세트, 로키 등…… 생각보다 많아서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엘프 군대의 숫자는 금세 1천을 넘어섰다.
요새에 설치된 방어마법 덕분에 투사체 공격의 위력이 급격하게 감소했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지영이의 결계가 조금씩 연해졌다.
“전 괜찮아요. 스승님!”
“무리하지 마. 길게 싸워야 하니까.”
쉼 없이 리필(?)되는 엘프 군대를 상대로 힘을 너무 빼는 건 현명하지 않다.
소모전으로 가면 숫자가 적은 우리가 불리하다.
음, 소모전이라…….
“개쩌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후우, 계약자여. 그 천박한 표현은 무엇이더냐.
닉스가 타박했지만, 나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회귀 전에는 불가능했던 언데드 포식.
그렇기에.
이런 짓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공허 비추기를 사용합니다.]
[대상은 아크 리치 군주의 정수입니다.]
[전설 등급 정수를 구현합니다. 마력 스텟 200이 영구적으로 소모됩니다.]
[구현한 정수의 원주인이 사용자보다 월등하게 강합니다. 레벨과 능력치가 하향 조정됩니다.]
[180일 후에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렉시를 구현한 지 6개월이 지났기에, 흡수한 정수를 생물체로 구현하는 게 가능해졌다.
안 그래도 어떤 정수를 실체화시킬까 고민했는데.
집단전, 혹은 소모전에서는 이만한 녀석이 없지.
쭉 늘어난 그림자에서 해골바가지가 몸을 일으켰다.
『죽음의 군주가 위대한 분을 배알합니다.』
아크 리치 군주는 형형한 안광을 불태우면서 충성을 맹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