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우지지직!
미스릴보다도 단단한 헬 나이트의 갑주가 찢겼다.
투구에 아른거리는 귀화가 사그라지고.
[헬 나이트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곧이어 니플헤임의 한기가 깃든 풀 플레이트 메일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꽤 강력해 보이는 마법 무구이지만 [헬 나이트]의 일부로 취급된 탓이다.
아쉽군.
꺼억.
정수는 맛있었다.
늪지대에서 허우적대던 헬 나이트 집단.
진형이 무너진 놈들을 하나씩 처치하던 중, 저저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니플헤임의 냉기.
일반적인 죽음의 기운이라면 상성 상 선법에 불리했지만.
여신 헬이 부여한 냉기 섞인 죽음의 힘은 늪지를 천천히 잠식했다.
말발굽에 스며든 한기가 늪을 얼리면서 무너진 자세를 제어한다.
『산 자여, 죽음을 거부하지 마라.』
검푸른 기운이 쭉 뻗은 기병창 주위를 핑그르르 회전한다.
황천소의 효과로 속도가 느려졌지만, 마냥 무시하기 어려운 힘이 실려 있다.
헬 나이트 집단은 저승의 냉기로 늪을 얼리면서 재차 돌진했다.
“그렇게 죽는 게 좋으면 내가 두 번 죽여 주마.”
발을 구르는 것과 동시에 토룡이 헬 나이트 집단 선두에게로 쇄도했다.
한풀 꺾인 돌진 공격.
그럼에도, 황천소의 기운을 휘감으면서 강화된 토룡을 찢어발겼다.
정면 승부는 고대 용족의 정수로 강화되었는데도 엄두가 안 나네.
[피할 수 없는 죽음 돌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동속도가 30% 감소합니다.]
[헬 나이트 집단에서 멀어질수록 이동 제약이 더 강해집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 돌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빨라집니다.]
구룡방 길드에서 펼친 검진과 비슷한 효과.
헬 나이트 집단은 푸른 귀화를 거세게 태우며 달려왔다.
좋아.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드래곤 폼을 사용합니다.]
쭉 늘어난 꼬리.
등에는 피막으로 덮인 날개가 튀어나왔다.
『날아가도 피할 수 없으리라!』
“누가 피한대.”
후으으으읍!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폐부가 몇 배로 확대되었다.
만화책에서나 볼 법한 광경.
흉곽이 확장되면서 가슴팍도 크게 늘어났지만 몸에 피해는 없었다.
고대 용족의 모습을 일부 재현한 형태.
용족의 비기인 ‘브레스’를 사용하는 데 최적화된 모습이라서 기형으로 부풀어 올랐는데 고통 하나 없었다.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이 모든 마력을 폐부에 흘려보냈다.
입을 여는 순간.
콰콰콰콰!
보랏빛 광선이 돌진 중인 헬 나이트 집단을 덮쳤다.
『두려워하지 마라, 돌진!』
『앞으로!』
검푸른 기운이 보랏빛 광선을 뚫어 내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치이이이익! 양옆으로 갈라진 브레스가 땅거죽에 기다란 상흔을 남긴다.
사방으로 튀는 에너지 파편.
충돌의 진원지를 중심으로 얼어붙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며 진한 수증기가 삽시간에 일어나면서 주위를 하얗게 물들였다.
정면으로는 브레스.
발밑은 황혼소의 기운이 헬 나이트 집단을 옭아맸다.
현저하게 느려진 돌진 속도지만, 브레스를 뚫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크억!』
『저자에게 죽음을 내려야…….』
브레스를 정면으로 받던 헬 나이트 일부가 사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앞서 난전에서 10기가량이 전사.
브레스에 휘말려서 가루로 변한 게 40기가량이다.
놈들의 정수가 아깝군.
쩝, 하고 입맛을 다실 때 육감이 강렬한 경고를 울렸다.
브레스를 돌파하면서 날아드는 검푸른 창날.
입에서 솟구치는 힘은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하게 줄어들었지만, 헬 나이트들의 암흑 투기는 한층 예기를 끌어올렸다.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으니 대응은 불가능할 터.』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라.』
뭐라고 떠드는 거니.
내 힘이 고작 ‘마력’에만 국한되어 있는 줄 아나?
브레스를 쏟아 낸 직후.
약간의 무기력감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운신에 불편함은 없다.
지친 몸을 채찍질하며 진여의주에 깃든 선기를 발현.
축지를 다시 한번 펼쳤다.
파팟!
순식간에 바뀌는 시야 풍경.
『돌진 대상이 되었는데 사라졌다고?』
『아티팩트의 효능인가.』
『돌진의 효과는 유효하다. 멀리 가지는 않았을 터!』
알아서 떠들어 주니 전략을 알아낼 필요가 없어서 좋구먼.
헬 나이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축지로 이동한 곳은 헬 나이트 집단의 후미.
[데모닉 파워를 사용합니다.]
[모든 능력치를 극야로 치환합니다.]
[어둠의 육체를 사용합니다.]
올 스텟을 마력으로 치환했을 때하고는 다른 감각.
극야와 혼연일체가 되니 어둠 자락이 닿는 곳이 모두 느껴진다.
푸른 심장석과 태양석을 합칠 때도 느꼈던 감각.
난 그 전능한 감각에 취하는 대신 극야를 컨트롤하는 데 오감을 집중했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극야의 힘이 헬 나이트 집단의 뒤를 그대로 뒤덮었다.
『워, 워.』
『당황하지 마라. 산 자의 함정이다.』
『잔꾀를 부린다는 건 돌진을 정면으로 막아 낼 수 없다는 것!』
『말머리를 돌려라.』
남은 헬 나이트 집단은 침착하게 돌진 방향을 선회하려 했다.
만만치 않은 적.
고대 용족의 힘을 일깨우지 않았으면 진땀깨나 뺐겠는걸.
종족이 용인 → 고대 용족으로 변하면서 모든 스텟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 덕분에 스텟 전체를 하나로 몰아넣는 [데모닉 파워]도 효과가 극대화되었으니.
“여신님 솜씨는 못 따라 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반경 수백 미터를 어둠으로 물들인 극야가 헬 나이트에게 달라붙는다.
동시에.
콰득! 극야의 힘이 헬 나이트들을 짓눌렀다.
『우, 움직일 수가 없다.』
『늪지대도 그렇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을 다루는구나!』
『이 어둠을 떨쳐 내라.』
너희 뜻대로는 안 될걸.
내공까지 모두 극야로 치환되어서 암영추혼검을 펼치지는 못했다.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데모닉 파워로 강화된 극야가 헬 나이트들을 하나하나 으스러트렸다.
지속 시간이 끝났을 때는 두 발을 지면 위에 딛고 선 헬 나이트가 약 40기만 남았다.
[악귀의 분노를 사용합니다.]
너덜너덜해진 헬 나이트 집단.
비장의 돌진도 이미 기세를 잃은 지 오래다.
경신법으로 접근하자, 헬 나이트들이 창을 마구 내질렀다.
사방에서 쇄도하는 검푸른 암흑 투기.
이제는 흘려보내거나 피할 이유가 없어졌다.
암영추혼검과 응룡황권을 동시에 전개.
내공이 깃든 칼날이 냉기를 거침없이 베어 내고.
용의 기세를 실은 주먹이 삿된 기운을 그대로 뭉개 버렸다.
『산 자여, 당신은 대체 누구이기에…….』
“왜, 근접전으로 끌고 가면 너희가 이길 줄 알았어?”
『위대한 분께서 하사하신 힘을 받고도 이렇게 비참하게 패배할 줄이야!』
마지막으로 남은 헬 나이트를 쓰러트리고는 놈의 정수도 마저 포식했다.
[헬 나이트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정수 등급 : 전설]
[포식한 정수 : 100%]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폭마기가 추가됩니다.]
[폭마기]
등급 : ★★★★
분류 : 액티브
암흑 마나를 사용자의 의지대로 구현한다.
폭마기.
암흑 투기의 상위 개념에 해당하는 힘이다.
무공으로 치면 검기가 암흑 투기, 폭마기는 검강급이다.
위력이 100% 동일한 건 아니고 동일한 힘을 실으면 강기가 폭마기를 이기지만.
데스 나이트의 정수에서 추출한 능력의 상위 호환이다.
“쓸 만하겠는데?”
회귀 전에는 정수를 포식해서 오러와 오러 블레이드도 사용했다.
위력은 내공으로 구현한 기예보다 한 수 아래라서 내공이 떨어졌을 때만 사용했었지.
이젠 다르다.
회귀의 여파로 마나와 내공을 치환해 주는 [진(眞)여의주]가 생겼고.
용아병의 정수로 마력 스텟도 꾸준하게 쌓아서 어느 쪽이든 모자랄 일이 없었다.
잠깐.
폭마기와 오러 블레이드, 그리고 강기를 융합기공으로 합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당장은 오러 블레이드를 익히지 못해서 의미가 없지만.
실험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나는 전장을 흘겨보았다.
아크 리치 군주의 시선을 끌어주기 위해 앞으로 나선 닉스.
헬 나이트 집단의 돌진력 하나는 엄청났기에, 주 전장의 상황까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런데.
“허어.”
나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 * *
진호가 황천소로 헬 나이트 집단의 다리를 묶어 놓고 있을 때.
“렉시, 앞으로 가자꾸나.”
“카오오오!”
닉스는 렉시의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크 리치 군주의 눈동자, 아니 푸른 귀화가 닉스의 움직임에 고정되었다.
『어리석은 자여, 만용을 부리는구나!』
허공에 재배열되는 암흑 마나.
[고유 능력 - 멀티 스펠]
[게헤나의 불꽃]
[룬 슬레이어]
[나락의 손길]
…….
진호가 즐겨 사용하는 주문, 솔라 익스플로전에 준하는 강력한 마법이 연달아 쏘아졌다.
“호오, 계약자만큼은 아니지만 꽤 강하구나.”
닉스의 손짓에 맞춰서 넓게 펼쳐지는 극야의 장막.
『그 어둠에서는 어떤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구나. 단순한 눈속임으로 어찌할 수 없…….』
아크 리치 군주의 말문이 막혔다.
시커먼 벼락도, 암흑 마나로 빚어낸 검붉은 불꽃도.
니플헤임의 냉기를 구현한 냉기도 극야의 힘 앞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무슨 짓이냐!』
“왜 그리 놀라느냐.”
『어찌하여 내 마법이 분해되었냐고 묻는 것이다!』
“여의 본질은 밤. 그 어떤 어둠보다도 상위에 있도다. 순리를 거스른 힘이야 원래대로 돌리면 그만인 것을.”
암흑 마법과 저주에 한해서는 완벽에 가까운 디스펠.
닉스가 밤의 여신이기에 가능한 기예다.
암흑 투기나 폭마기처럼 사용자의 의지를 강하게 실어 낸 힘이라면 모를까.
마법처럼 재배열 과정을 거친 이능은 극야로 간섭, 무효화가 가능했다.
“타기리온의 묘목이라고 하였던가? 그자 덕분에 알게 되었지.”
닉스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는 후후훗, 하고 웃었다.
아크 리치 군주에게는 그야말로 하드 카운터!
『내 군대여, 어서 가서 저 건방진 것을 무릎 꿇려라.』
언데드 군대가 전진하자, 렉시가 발을 세게 굴렀다.
콰앙! 충격과 함께 사방으로 튕겨나가는 언데드 군대.
언데드의 숫자가 원체 많아서 티도 나지 않았다.
‘계약자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겠구나.’
‘헬 나이트들이 돌아오면 내 승리다.’
닉스와 아크 리치 군주는 비슷한 판단을 내렸다.
그 끝에 웃는 것은 닉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