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원시종의 정수에 혼원룡의 심장.
그리고 용혈까지 모았다.
시초룡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간 셈.
조만간 신체 개변을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다.
엘드리치 드래곤의 정수를 모두 포식한 후, 전장 외곽으로 빠진 일행을 불렀다.
“스승님, 진짜 인간 맞아요?”
“아마, 조만간 종족이 바뀔 것 같던데.”
“으으으, 농담이 아닌 것 같아.”
지영이가 혀를 내밀면서 질색했다.
실은 이미 용인(龍人)으로 바뀐 지도 좀 되었지.
바벨탑에서 특정 조건을 충족하면 상위 종으로 거듭나는 것도 가능하다.
승급과 조금 다른 개념.
특정 성좌의 축복을 받거나 바벨탑의 히든 미션 수행 보상으로 종족을 바꾸는 게 가능하다.
오크의 상위종인 하이 오크.
혹은 엘프의 상위종인 하이 엘프처럼 말이지.
“방해가 안 들어오게 막아 줘서 고맙습니다.”
난 일행을 둘러보며 감사를 표했다.
엘드리치 드래곤을 쓰러트리기까지는 2시간 이상이 걸렸다.
과거 비장의 한 수로 사용했던 악귀의 분노를 두 번 펼치고도 승부를 내지 못했으니.
일행은 타기리온 종파가 몰고 온 하이 오크와 트롤들을 격파한 후에도 인근을 지켰다.
다른 괴물들이 전장에 난입해서 변수가 생길 것을 차단해 준 것이다.
“미스터 유, 나야말로 엄청 호강한 거 알아?”
“정말이지, 후배님의 한계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네.”
“배울 게 더 많아졌군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일행의 눈동자 위에 아른거리는 경외감.
외지인이나 다름없는 골든 서클 팀원들조차 음울한 질투의 시선 대신 감탄과 경악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부, 돌아가면 성대한 파티를 벌이는 게 어떻소?”
“뭔 소리야, 돌아가긴.”
“다른 것도 아니고 드래곤이오! 그 어떤 플레이어도 사냥한 적이 없다던…….”
핑 레이 녀석 보소.
긴장 다 풀려가지고, 파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다 안 끝났거든? 우리가 애초에 여기를 왜 왔는지 잊어버렸냐.”
비무장지대에 진입한 표면적인 이유는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 해결.
타기리온 종파의 헛짓거리를 막으려는 게 숨겨진 목적이지만, 그걸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아, 저 괴물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잊고 있었소.”
“너는 가서 대련 5번이다.”
“아, 난 사부의 위업을 기념하려고!”
“그래도 안 돼.”
다른 건 몰라도 전장에서 긴장감을 놓는 건 용서할 수 없지.
얼빠진 모습을 보면 죽음의 손이라고 불리면서 중국 암흑가를 장악했던 녀석이 맞는지 의심스럽단 말이야.
“히히, 대련 축하해!”
“닥쳐라. 내가 혼자 죽을 성싶으냐!”
“그러니까 막 떠들면 안 된다는 거야. 스승님이 널 보고 파멸의 조동아리라고 하셨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핑 레이와 지영이가 아옹다옹했다.
내가 볼 땐 도긴개긴인데.
* * *
『비무장지대에서 관측된 이변!』
『게이트 브레이크로 나온 괴물들을 조종하는 집단, 클리포트는 누구인가?』
『클리포트, 바벨탑 내 NPC가 아니라 실존하는 세력이었다!』
『방치된 게이트 브레이크 지역. 각 국가에 경종을 울리다.』
서울로 돌아온 직후, 난 비무장지대 토벌 중에 촬영한 영상을 메이저 언론에 돌렸다.
골든 서클은 초소형 카메라로 게이트 토벌 과정을 늘 기록해 두었다.
덕분에 자료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이번에는 골든 서클의 준비성에 묻어가는군.
클리포트의 준동.
그리고 엘드리치 드래곤의 위용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미스터 유, 이래도 되는 거야?”
“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보냐.”
“엄청난 가치를 지닌 정보를 너무 쉽게 풀어 버렸잖아.”
아쉬움이 가득한 듯 미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엘렌.
정보가 힘인 시대인 만큼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큰돈을 벌 수도 있었다.
“사람 죽고 사는 문제다. 흥정할 마음은 없어.”
“호호호, 단순하긴. 내가 그 이유만 가지고 이럴 것 같아?”
엘렌이 부아가 치밀어 올랐는지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클리포트와 손을 잡은 플레이어가 있을 수 있다는 것 말인가.”
“끙, 그걸 짐작하면서도 정보를 푼 거야?”
“당연하지.”
난 태연하게 대꾸했다.
“알고 그랬다면 경솔했어. 그들이 경계하면 어떻게 하려고.”
현신한 상태로 케이크를 먹던 닉스가 오, 하는 탄성을 짧게 흘렸다.
“이 처자의 말도 타당하구나. 이번에는 그대가 경솔했도다.”
“우리나라에는 타초경사라는 속담이 있다.”
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한다.
클리포트의 존재를 공표하면 밀월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도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거다.
“미스터 유, 당신의 정보력으로는 음지에서 벌어지는 수작을 알아채기 어려울 거야.”
“이미 블랙 네트워크에 의뢰해 놨다.”
“Unbelievable! 그쪽에는 손을 언제 벌려 놓았어?”
“좀 됐지.”
블랙 네트워크.
전생에서는 삼합회를 포함한 중국 암흑가를 모두 장악한 핑 레이 때문에 자중지란을 겪었지만.
이번 삶에서는 악재가 될 만한 요소를 내가 미리 쳐 준 덕에 승승장구하고 있다.
뭐, 당사자들은 잘 모를 일이지만.
블랙 마켓의 운영자인 마담과 선을 만들어 둔 덕에 음지의 정보도 쏙쏙 들어왔다.
“한데 그대여, 이전에 즐겼던 유흥은 언제 다시 경험하게 해 줄 셈이더냐?”
아이고.
급히 쉿, 하고 손가락을 입가에 대었다.
블랙 카지노는 당연히 합법과 거리가 먼 사업이다.
벌건 대낮에 할 이야기는 아니란 말이야.
“걱정 마. 나라고 떳떳한 사람은 아니니 문제 삼을 생각은 없어.”
……엘렌이 호호, 하고 웃는데 참 거슬렸다.
“전에 준비해 달라고 한 건?”
“안 그래도 말해 주려고 했는데. 화물선이 이틀 안에 한국으로 도착할 예정이야.”
“생각보다 빠르네.”
“티라노사우루스의 화석을 구하면서 인맥을 여럿 만들어 놨거든.”
크흐흐.
난 웃음을 삼켰다.
레이던에 투자하고 남은 돈은 모조리 원시종의 정수를 매매하는 데 사용했다.
골드 문에 자금을 맡기고는 대행 구매를 요청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엘드리치 드래곤을 쓰러트려서 드래곤 블러드도 얻었겠다.
이번에 원시종의 정수를 하나 더 100%까지 채우면 시초룡의 모습을 어느 정도까지는 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디.
골드 문에서 준비한 화석의 양이 정수를 100%까지 채울 정도였으면 좋겠군.
화물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다리며 입맛을 다셨다.
* * *
클리포트의 발호.
그 소문은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유럽의 국가, 프랑스에도 금방 퍼졌다.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 교류 속도가 마법보다 더 빠른 지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금색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사내.
프랑스의 랭커이자 자랑, 르네 데이비스는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조소를 내뱉었다.
“클리포트라는 이름을 기사로 볼 줄이야.”
르네 데이브스는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에 새겨진 문신을 힐끗거렸다.
뒤집어진 나무의 형상.
인터넷 기사에 나온 [클리포트]의 상징이다.
똑똑—
“들어오라고 해라.”
르네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양쪽으로 밀려나면서 한 사람이 빠르게 걸어왔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
산뜻한 원피스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큼 아름다웠지만, 왠지 모르게 창백한 인상이 눈에 띄었다.
“타미엘의 묘목을 뵙습니다.”
묘목 계급.
르네 데이비스는 이미 클리포트와 접선을 마치고 그들의 섭리를 몸에 받아들인 상태였다.
회귀를 경험한 진호조차 모르는 사실!
그가 언제 인류를 배반했는지 알 수 없기에 생긴 정보의 공백이었다.
“내가 연락하기 전에는 나서지 말라고 하였을 텐데?”
르네 데이비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스슷!
날카로운 살기가 여인의 심령을 마구 찔렀다.
언뜻 보기에는 현대인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브레이크를 일으킨 게이트를 타고 넘어온 클리포트 추종자였다.
타미엘 종파의 가지.
르네 데이비스는 눈앞의 여인을 통해 클리포트 휘하에 들어갔다.
“네 존재가 드러나면 위험하다. 이 세계에 적응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고 했건만.”
어깨를 움찔거리는 여인은 이내 입술을 질근 깨물더니 재차 입술을 떼었다.
“묘목이시여, 저희의 존재가 예상보다 빨리 알려졌나이다.”
게이트 너머의 존재.
[타미엘의 가지]는 살기를 받아 내며 곧장 본론을 꺼냈다.
“인생은 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상부에 보고해야 합니다, 묘목이시여!”
[타미엘의 가지]가 르네의 명령을 어기면서 길드에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탑으로 연결된 차원의 파편.
게이트를 넘어오면서 허수 세계에 존재하는 클리포트 종파와 소통할 수 없어진 것.
여인은 지구 출신이 아니기에 바벨탑에 접속할 수도 없다.
혈혈단신인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건 클리포트와 연결되어 있으면서 바벨탑에 출입할 수 있는 존재, 르네뿐이다.
“그 문제는 알아서 할 터이니 물러나라.”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르네.
여인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타미엘 종파에 발을 디뎠지만, 정작 르네는 클리포트의 뜻을 퍼트리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묘목에 어울리는 행동을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물러나는 여인.
르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아직 어리구먼.”
그의 관심사는 허수 세계의 질서가 아니다.
오로지 힘.
누구보다 강해지는 것.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클리포트와 손을 잡은 것도 그 이유.
허수 세계의 집단인 클리포트는 고신족과 밀월 관계다.
바벨탑 운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진 못하지만.
고신족들은 탑 제작 과정에서 은밀하게 만들어 둔 장치들로 르네를 도와주었다.
그가 [올마이티]로 승급하면서 성명 절기나 마찬가지인 [융합기공]을 얻게 된 것도 그 이유.
르네의 길드인 [레 루쥬(붉은 군대]도 고신족들과 클리포트의 은밀한 지원 덕분에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길드로 성장했다.
“클리포트가 원하는 혼란 따위는 알아서 만들어질 것이다.”
르네는 이미 유럽 전역에 분란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그게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즈음이면…….
동방의 나라, 한국에서 벌어진 [클리포트 준동] 사태는 어린아이 장난으로 여겨질 만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난 그 대가를 받기만 하면 되지.”
르네는 웃음을 삼켰다.
클리포트도.
고신족도.
그의 입장에서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