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뒤로 기울어진 엘드리치 드래곤의 몸뚱이.
미간에 붙어 있던 [타기리온의 묘목]이 철푸덕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엘드리치 드래곤의 심장이 파괴되기 직전.
용케 하나가 된 몸을 분리해서 제 목숨을 건진 것이다.
“고작 필멸자 따위한테!”
“보는 눈이 없네. 여신님을 앞에 두고 뭐라는 거야.”
“흥, 어리석은 필멸자들의 세속적인 표현 따위.”
하이고, 이놈 보소.
내가 말한 ‘여신’은 비유나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란다, 개자식아.
극야의 힘을 최대로 구현, 타기리온의 묘목을 감쌌다.
처음에는 코웃음을 치는 노인.
시간이 지나자 극야에 실린 ‘격’을 느끼고는 점점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네 녀석의 저주가 왜 안 통했는지 이제는 알겠지?
“한낱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을 깊이일진대!”
“옆에 계신 여신님이 줬다.”
절망으로 물드는 노인의 눈동자.
풀어놓았던 극야의 힘으로 타기리온의 묘목을 쥐어짰다.
“끄윽!”
“너한테는 자비로운 죽음도 아까워.”
회귀 전.
엘드리치 드래곤이 벌인 학살극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사태의 원흉인 타기리온의 묘목.
내 입장에서는 씹어 먹어도 모자란 새끼라고.
“대의를 위한 희생 어쩌고 하더니. 그 와중에도 제 목숨은 소중한가 봐?”
“아무것도 모르는 필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지. 내 목숨은 더 가치 있는 곳에 소모해야 한다.”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 절규하는 타기리온의 가지.
가치는 무슨.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지?
제 수하들을 갈아서 엘드리치 드래곤을 소환한 놈이 할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절망하면서 죽어라.”
욕망의 주머니에서 아르스 게티아를 꺼냈다.
숨은 아직 붙어 있잖아.
[아르스 게티아 - 내장 스킬 : 단탈리온의 환영을 사용합니다.]
마음속에 깃든 끔찍한 형상을 보여 주는 저주.
타기리온의 묘목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픽, 고개를 떨어트렸다.
“오늘은 평소의 그대답지 않구나.”
“정수 포식만 아니었으면 숨만 붙여 두고 두고두고 고문했을 거다.”
못마땅한 기색으로 놈의 사체를 뒤적거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검은 책자였다.
사이한 기운을 품고 있는 책.
겉표지를 살짝 건드리자 재가 되면서 사방으로 흩날린다.
……뭐지?
날 멕이는 건가.
“아까 그 용종과 하나가 되는데 촉매로 사용한 것 같구나.”
“그걸 어떻게 알아?”
“감이라고 해 두마.”
여신의 감.
그것보다 더 정확한 설명이 어디 있을까.
입고 있던 옷은 넝마가 되어버렸고, 품 안에 있던 보석이나 값진 것들도 모두 부서졌다.
그나마 수확이 있다면 놈의 지팡이가 멀쩡하다는 것?
[타기리온의 인도자]
등급 : 레전드
분류 : 지팡이
내구도 : 2,496/5,000
허수 세계의 힘을 인도할 수 있는 지팡이입니다.
섭리에 어긋난 힘에 특화되어 있으며, 암흑 마나와 상성이 좋습니다.
*마력 + 120
*암흑 마나 기반 스킬의 효과 200% 증폭.
레전드 등급이라기에는 허전한 옵션.
내장 스킬 하나 없는 게 모자라 보이지만 유일한 옵션인 [암흑 마나] 200% 증폭 효과가 엄청났다.
“팔지는 못하겠네.”
“호오, 그대가 지팡이를 쓰는 모습은 상상이 가질 않는구나.”
“뭐, 쓸데가 있을걸.”
타기리온의 인도자를 욕망의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혼원룡의 심장 덕에 암흑 마나도 쓸 수 있겠다.
두 번째 삶에서는 [용아병의 정수]를 일찍 취하면서 마력 스텟도 엄청나게 올려놓았다.
암흑 투기와 레이즈 데드.
그리고 [아르스 게티아]도 있으니 어딘가에는 쓸 수 있을 거다.
전생에는 암흑 마나와 관련된 스킬을 쓸 일이 거의 없었는데.
프레데터로 승급하면서 언데드까지 포식할 수 있게 된 게 변수가 되었다.
두 번째 보상은 용의 영혼석.
산산조각을 내긴 했어도 여전히 강력한 촉매다.
“모르스.”
-부르셨습니까요.
“용의 영혼석. 수리할 수 있나?”
-야무지게 박살을 내셨군요. 시도는 해 봅죠.
차원상인 모르스가 수십 조각으로 쪼개진 용의 영혼석을 하나하나 수거했다.
온전한 형태로 복원이 가능하다면 정수를 포식하면 되고.
안 되어도 CP로 치환해서 팔면 그만이다.
용의 영혼석은 강력한 촉매니까.
볼일도 다 봤겠다.
숨이 넘어간 노인의 머리 위에 오른손을 얹었다.
외모는 사람과 흡사하지만 실은 종족도, 가치관도 완전히 다르다.
놈의 정수를 포식하는데 거리낌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다.
[타기리온의 묘목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정수 등급 : 전설]
[포식한 정수 : 100%]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언령이 추가됩니다.]
[언령]
등급 : ★★★★
분류 : 액티브
사용자의 의지를 담아 섭리를 비튼다.
“호오, 필멸자에게는 과분한 힘이로구나.”
“거참, 여신님도 필멸자 타령이야?”
“여의 계약자에게는 해당이 없는 말이니라.”
필멸자 타령에 투덜대면서도 내심 닉스의 말에 동감했다.
언령(Power Word).
세계의 규칙에 간섭하는 힘은 초월의 경지에 든 존재에게 허락된 힘이다.
나야 변칙으로 초월의 영역에 한 발자국 들이밀었지만.
언령의 힘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갈 길이 멀다.
타기리온의 묘목이 뱉은 정수가 초월의 영역에 있는 온전한 ‘언령’도 아니고 말이야.
“4성급이잖아. 활용에 제약이 많아.”
기껏해야 대상을 지정해서 멈추거나 속도를 빠르게 하는 정도.
말은 거창하지만 실 용도는 버프 · 디버프 스킬이다.
마나를 엄청나게 잡아먹지만 말을 외치는 즉시 발동되고 음속의 속도로 발현되니 일장일단이 있다고 해야겠지?
“흐응, 아쉽구나. 여는 그대가 이번 기회로 별에 이름을 새길 줄 알았건만.”
“걱정하지 마. 시너지 효과를 주는 정수들이 더해지면 여신님이 생각하는 언령급이 되니까.”
아직은 먼 미래의 일.
나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전생과 비교하면 이미 10년 이상 시간을 절약했다.
“자, 그럼 메인 디시다.”
가볍게 손을 비비면서 엘드리치 드래곤의 몸뚱이에 손을 얹었다.
[엘드리치 드래곤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막대한 기운이 접촉면을 타고 몸으로 흡수되었다.
* * *
엘드리치 드래곤의 정수.
반 정도는 언데드에 걸쳐 있는 괴물이기에, 전생 때는 포식하지 못했다.
놈이 강북을 초토화시키던 시절에는 사체의 권리를 주장할 정도로 강하지도 않았었고.
하지만
그 미래는 이 자리에서 끝났다.
김우성 플레이어 협회장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을 해한 괴물은 이 자리에 쓰러졌고.
회귀 전에는 흡수할 수 없었던 정수가 오른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중이다.
바뀌는 미래.
엘드리치 드래곤의 정수를 포식하니 새삼 그 변화가 실감 났다.
[정수 등급 : 신화]
[포식한 정수 : 100%]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드래곤 블러드가 추가됩니다.]
[드래곤 블러드]
등급 : ★★★★★
분류 : 패시브&액티브
용족의 강인한 피가 스며듭니다. 용의 힘이 담긴 피는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뿐만 아니라 진정한 힘을 일깨울 수 있게 해 줍니다.
*모든 능력치 10% 상시 증가.
*드래곤 폼 사용 가능.(지속 시간 10분)
“후욱.”
진한 고양감에 심장이 뛴다.
용혈의 힘은 엘드리치 드래곤의 정수를 모두 빨아들이는 순간부터 바로 적용되었다.
“괜찮으냐?”
“응. 멀쩡해.”
“죽다 만 녀석을 포식하니 걱정되는구나.”
오른손을 닉스의 정수리에 뻗었다.
의문 가득한 눈빛.
“걱정이 과하십니다, 여신님.”
허리까지 닿은 머리를 마구 헝클이자, 닉스가 분통을 터트렸다.
“감히! 이건 신성모독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 그렇게까지 걱정 안 해 줘도 된다고.”
“계약자의 모자람은 여가 채워 줘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그렇게까지 못 미더웠나.
하기야.
굳이 동료들을 물리고 엘드리치 드래곤과 1대1 상황을 만들기도 했으니, 걱정됐겠군.
엘드리치 드래곤을 포식하면서 얻은 새로운 힘.
시험 삼아 곧바로 사용했다.
“드래곤 폼.”
[용인 형태로 변화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30% 추가로 상승합니다.]
[용족과 마주할 경우 당신을 동족으로 인식합니다.]
[두 날개와 꼬리가 신체에 추가됩니다.]
[드래곤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브레스 사용 시 모든 마나를 소모하고 드래곤 폼이 해제됩니다.]
공허의 거울을 사용했을 때처럼 변화하는 육체.
원시종의 정수를 받아들였던 것과 달리 극적으로 달라지진 않았다.
검은 비늘이 전신을 뒤덮고 머리 위에 뿔이 솟구친다.
견갑골에서 튀어나온 날개에는 피막이 붙었고.
꼬리뼈가 길어지면서 툭 튀어나왔다.
“이런 느낌이군.”
더 날카로워진 감각.
용족의 이명이 ‘마나의 지배자’인데, 변신하니 기감이 몇 배로 늘어났다.
“공허의 거울을 왜 사용하였느냐?”
“아니. 이 변신은 엘드리치 드래곤의 정수에서 얻은 능력이야.”
“흐으응, 이스메니오스와 같은 기척이라.”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튜토리얼 히든 미션에서 튀어나온 용아병의 주인이자, 아레스의 부하 드래곤이다.
용족 중에서는 1세대인 ‘엘더’ 계급인 존재.
지속 시간 동안 용종으로 인식된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이 능력이 있으면 탑 히든 미션에서 혜택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마지막으로 브레스를 시험해봐야겠어.”
“후후훗, 이스메니오스처럼 불이라도 뿜어 보아라.”
예예. 눈물의 차력 쇼 한번 보여 드리죠.
두근- 두근-.
[혼원룡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면서 보유 마나를 마구 방출했다.
목이 근질근질하다.
호흡으로 빨아들인 공기가 마나와 뒤섞이면서 막대한 에너지를 품기 시작했다.
막 개봉한 탄산음료를 목구멍에 들이부은 것 같은 감각.
달아오른 호흡을 참다가 끝내 입을 벌리는 순간.
콰콰콰!
혼원룡의 심장이 품고 있던 마나가 호흡과 일체화되어서 직선으로 뿜어져 나왔다.
닿는 것을 모조리 분쇄하는 죽음의 광선.
비무장지대에 있는 야산이 브레스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굉음과 함께 산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미친.”
솔라 익스플로전과 아발란체의 반발력을 끌어낸 것보다 조금 더 강한 위력.
엘드리치 드래곤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