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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246화 (246/300)

246화

갑자기 확 낮아진 눈높이.

한발 늦게 찾아온 중압감이 어깨와 허리를 짓누른다.

“그대여! 갑자기 키가 작아지면 어찌하느냐!”

“땅에 묻힌 거거든?”

난 가까스로 대꾸했다.

엘드리치 드래곤의 앞발에 실린 힘은 내 예상을 넘어섰다.

산군파랑조로 받아쳤지만 모든 힘을 상쇄하지 못해서 허리까지 푹 땅 아래로 꺼졌다.

힘 싸움에서 일방적으로 밀린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

악귀의 분노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쥐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뭐, 나름대로 믿는 수가 있어서 저지른 일이지만.

새카만 영기가 머리 위로 쏟아진다.

완력으로는 상대가 안 됐지만.

공격의 예리함만 놓고 보면 내가 몇 수 더 위였다.

암흑 투기와 내공을 섞은 공격이 강철보다 견고한 비늘에 기다란 상흔을 남겼다.

“콰우우우우!”

괴성과 함께 앞발을 거두는 엘드리치 드래곤.

산군파랑조가 남긴 흔적이 꽤 깊다.

놈의 덩치가 원체 큰 탓에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괴력으로 가격한 때만큼이나 큰 피해를 입혔다는 게 중요했다.

암흑 투기와 내공의 결합.

전생에는 해 보지 않았던 에너지의 결합이 새로운 영감을 선사했다.

조금 더 고민을 해 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엘드리치 드래곤을 앞에 두고 사색하는 건 너무 큰 사치였다.

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허리가 땅에 절반 정도 박혀 있고, 아직 충격을 해소하지 못해서 몸을 움직이진 못해도.

[토둔 - 토룡출수를 사용합니다.]

다음 수는 이미 준비해 두었다.

지면을 들썩이면서 솟구친 토룡이 괴력으로 타격한 부위를 물어뜯었다.

“크핫!”

엘드리치 드래곤과 일체화된 타기리온의 묘목이 마른 고함을 외쳤다.

비늘에 들러붙은 삿된 불꽃이 토룡을 휘감는다.

닿는 것을 모두 부식시키고 태우는 강력한 저주의 화염.

난 선기를 추가로 불어넣어서 토룡에게 힘을 더 실어 주었다.

선법이란 자연의 기운을 내 뜻대로 다루는 기예.

법칙을 비트는 마법하고는 다르다.

언뜻 보면 마법 같지만 실제로는 신성 주문에 가깝다고 해야겠지.

“고작해야 필멸자의 기술 따위에 밀리다니!”

타기리온의 묘목이 펼친 저주의 화염이 토룡에 닿는 순간 힘을 잃고 빠르게 식어 간다.

토룡은 엘드리치 드래곤의 발목을 크게 물었다.

“콰우우우…….”

이미 누적된 충격.

토룡의 공격이 결정적이었는지, 엘드리치 드래곤이 뒷걸음질 치다가 뒤로 기울었다.

너덜너덜해진 발목으로는 몸을 지탱할 수 없다.

우지끈- 오른발이 부러진 소리가 천둥처럼 요란하게 울리고 뒤이어 누런 드래곤의 몸뚱이가 지면 위에 포개어졌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란하게 들썩이는 대지.

렉시가 엘드리치 드래곤의 동체 위에 올라타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한입에 들어가게끔 잘라 주마.”

닉스는 우아하게 손을 뻗었다.

촤라라락!

시커먼 칼날들이 누런 비늘을 할퀴고 지나간다.

하늘 위로 솟구치는 검은 영기.

렉시는 극야의 힘이 만들어 준 틈 사이로 이빨을 들이밀었다.

엘드리치 드래곤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지만 티끌 정도인 나보다는 훨씬 티가 났다.

무게와 힘.

원시종의 정수로 구현해 낸 렉시는 머나먼 옛날,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처럼 울부짖으면서 엘드리치 드래곤의 몸뚱이를 파헤쳤다.

“여의 축복이 그대를 가호하리라.”

오리하르콘을 추가로 흡수한 후, 밤의 축복도 재사용 시간이 줄어들어서 타인에게 걸어 줄 수 있다.

렉시의 움직임이 한결 더 과격해졌다.

“콰우우우우우!!”

엘드리치 드래곤이 다시 한번 괴성을 토했다.

용종의 포효.

만물 위에 군림하는 포식자의 존재감이 닉스를 제외한 일행의 몸을 일순간이나마 둔하게 만들었다.

아래로 쭉 튀어나온 꼬리가 민활하게 움직이며 렉시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배 위에 올라탔다가 땅바닥에 나뒹구는 렉시.

타격은 크지 않았다.

[축지를 사용합니다.]

“놈이 태세를 정비할 틈을 주면 안 된다.”

렉시의 활약 덕에 저릿거리는 몸을 수습할 시간이 생겼다.

몸을 움직일 만큼 충분한 컨디션까지 회복되었다.

거기에, 전투 속행 관련 정수들도 여럿 있어서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 말고는 만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진흙탕 싸움을 해 보자고.”

발목이 부러진 채 바닥을 구르고 있는 엘드리치 드래곤의 배 위에 올라타고는 세게 발을 굴렀다.

백택군림각이 엘드리치 드래곤을 마구 흔들었다.

* * *

엘드리치 드래곤과의 전투가 시작된 지 2시간이 지나갔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이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었다.

솔라 익스플로전과 아발란체의 반발력을 극대화사킨 열풍.

뒤이어 절대영도의 혹한이 들이닥쳤다.

그뿐이랴.

엘드리치 드래곤은 대부분의 권능을 잃어버렸음에도, 강인한 몸뚱이 하나만으로 주변 지형을 바꿀 만한 힘을 지녔다.

강인한 꼬리가 궤적을 그릴 때마다 지면이 들썩였고.

발을 내디디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일대가 크게 흔들렸다.

비무장지대를 뒤덮은 푸른 초목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멸망의 시대가 연상되는 황무지가 되어 버렸다.

“후욱, 훅.”

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악귀의 분노]를 2연속으로 사용하고 우라즈 베르세르크도 펼쳤다.

교전 초기에 발목을 부러트려 놓으면서 유리한 위치에 섰지만.

전생에서 무수한 플레이어를 살해한 괴물은 쉽게 쓰러트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온갖 버프로 떡칠을 해도 밀린다니까?

아파트 한 동 크기의 괴물과 정면으로 씨름을 했으니.

뼈가 시리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댄다.

아발란체나 솔라 익스플로전급, 그러니까 4성 미만으로는 비늘에 흠집을 낼까 말까 한 수준이고.

그나마 선법이 효과적이라서 다행이다.

“콰우…….”

엘드리치 드래곤이 포효를 내질렀다.

누런 비늘은 제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하게 일그러졌다.

몸뚱이 여기저기에 남은 상처에서 흘러나온 영기가 몸을 탁한 색으로 물들인다.

둔중해진 움직임.

놈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다.

“위대한 존재여, 일어나서 섭리를 거부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심판하라!”

“뭐라고 씨부리는 거냐.”

오른손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다 죽어 가는 애한테 심판은 무슨.

이쪽도 손해가 없진 않다.

전투 중에 한계 이상으로 피해를 입은 렉시가 역소환되었고.

기동력을 잃은 닉스는 후방으로 빠져서 지원 위주로 전술을 바꾸었다.

극야의 힘을 전신에 둘러도 엘드리치 드래곤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이제 끝이 보이는구나.”

“그러게. 이 정도면 쉽게 간 거지.”

“계약자의 수하들이 함께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터.”

“음, 그럼 인명 피해가 있었을걸?”

엘드리치 드래곤의 강점과 약점을 모조리 파악했는데도 고전했다.

길드원들한테는 회귀 전의 지식을 말해 줄 수 없으니.

정석적인 방법으로 레이드를 시도했다간 기껏 모은 전력을 허무하게 잃었을 거다.

“여신님.”

“여는 준비가 되었도다.”

“그러면 슬슬 끝내자.”

[공허의 거울을 사용합니다.]

[신의 분노를 사용합니다.]

우라즈 베르세르크와 악귀의 분노를 융합해서 만든 궁극 기술.

여태 아껴 왔던 공허의 거울도 전개했다.

렉시를 구현하는 동안에는 [공허의 거울]을 사용해도 원시종으로 변신할 수 없다.

[공허의 마주침]의 소소한 페널티라고 해야겠지?

공허 마력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면서 포식한 정수의 형태로 변화시킨다.

몇 번이고 경험한 변이.

내샨 대공에게서 추출한 정수는 언제나 그랬듯, 승부를 결정 낼 때만 사용하는 비장의 패로 사용했다.

“크라라라라!!”

있는 힘껏 포효하면서 엘드리치 드래곤에게 달려들었다.

엘드리치 드래곤은 재생과 파괴를 반복하면서 너덜너덜해진 발목을 이끌고 정면으로 맞섰다.

어떤 버프를 사용해도 형편없이 밀릴 만큼 압도적인 스펙 차이.

하지만.

[신의 분노]와 [공허의 거울]을 사용했을 때는 달랐다.

“콰우우우?”

충돌하는 순간 뒤로 크게 밀리는 엘드리치 드래곤.

당황한 듯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인 몸뚱이가 버텨 내질 못했다.

몸 여기저기에 난 상흔에서 검은 영기가 드라이아이스처럼 사방으로 흘러나온다.

“이렇게 해야 할 만하다니.”

난 쓴웃음을 지었다.

회귀 전에는 엘드리치 드래곤을 상대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서울을 건 결전에 낄 정도의 급이 아니었지.

황금을 똥으로 만드는 능력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시절이라, 놈의 위용을 소문으로만 접했다.

직접 싸워 보니 그 이상이야.

엘드리치 드래곤이 소환된 직후에 이클립스로 한 방 먹이지 않았더라면 고전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백수제왕무 - 2초식]

[산군파랑조를 사용합니다.]

오크의 정수를 섞어서 길게 늘어난 팔로 엘드리치 드래곤의 몸뚱이를 할퀴었다.

이족보행 괴물의 정수가 오크만 있진 않지만, 원시종과 밸런스가 잘 맞는 게 오크여서 여전히 두 정수를 구현하는 중이다.

서거걱!

엘드리치 드래곤의 비늘이 우수수 깨어지고 썩은 살점이 드러났다.

훤히 드러난 갈비뼈.

그 사이로 엘드리치의 심장 역할을 하는 용의 탄생석, 드래곤 소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급하게 주문을 외우는 타기리온의 묘목.

언령 저주가 고막을 강타하지만 극야의 힘이 금세 마음의 평온을 찾아주었다.

“저치는 여에게 맡기어라.”

내 머리 위로 올라탄 닉스가 저주를 모조리 흡수했다.

엘드리치 드래곤이 본능적인 위기감에 앞발을 마구 휘둘렀다.

두려움에 젖어서 날카로움을 찾아볼 수 없는 공격.

그럼에도.

저 앞발에는 태산을 부수고 바다조차 가르는 거력이 실려 있었다.

산군파랑조를 사용하느라 숙여진 허리.

원시종 - 오크의 정수를 엮어서 구현해 낸 육체로는 초식을 연달아 펼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무어버이언 외이(물어 버리면 되지).”

티라노사우루스의 자랑.

막대한 치악력으로 엘드리치 드래곤의 앞발을 물어서 잘근잘근 씹었다.

훤히 빈틈을 드러낸 괴물.

앞발을 끊어 내고는 퉤, 하고 뱉으면서 상체를 들었다.

“안 돼!!!”

“돼.”

말아 쥔 주먹으로 엘드리치 드래곤의 가슴팍을 가격했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그 안에서 맥동하던 용의 탄생석이 수십 조각으로 쪼개졌다.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엘드리치 드래곤의 최후를 알리는 시스템의 음성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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