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엘드리치 드래곤.
허수 공간에서 빚어낸 인공 용종은 두 눈을 부라렸다.
서울에 강림했던 때와 비교하면 1/10 정도의 능력이지만, 그래도 얕볼 상대는 아니다.
아니,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놓았다가는 저 이빨에 찢어발겨질 만큼 강한 적.
“크하하하! 압도적인 힘 앞에 전율하라!”
타기리온의 묘목은 엘드리치 드래곤의 미간에 달려 있다.
“저치의 하반신이 사라졌구나.”
“엘드리치 드래곤과 일체화한 거다.”
“참으로 흉측한 모습이로구나.”
“제 목숨 하나 살리려고 저 짓거리를 하는 거지.”
쯔쯧, 나는 혀를 찼다.
위대한 뜻이니 어쩌니 해도 결국 관심사는 제 목숨을 보전하는 것뿐이다.
50미터의 거구가 반 이상 무너진 제단을 밟으면서 앞으로 나선다.
쾅!
기둥이 무너지면서 엘드리치 드래곤의 몸뚱이가 살짝 기울었지만 중심을 잃거나 하진 않았다.
위풍당당한 모습.
엘드리치 드래곤은 제단을 산산조각 내면서 몸을 박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진 거리.
닉스가 일으킨 극야의 힘이 엘드리치 드래곤의 다리를 붙들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찢겨져 나갔다.
“분명히 약화되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육체 능력은 그래도 멀쩡할 걸.”
엘드리치 드래곤의 진정한 힘은 강력한 흑마법이다.
불멸을 꿈꾸었던 도시, 엘드락시르의 주민들의 영혼을 한데 엮어서 드래곤의 형태로 빚어낸 괴물.
모자라는 제물과 이클립스로 극대화시킨 솔라 익스플로전과 아발란체의 반발력에 휩쓸리면서 능력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어느 부분을 보고 확신하냐고?
“저놈의 비늘이 빛을 잃었으니까.”
엘드리치 드래곤이 만전의 상태라면 저 비늘이 황금처럼 빛나야 했다.
숨을 쉬기만 해도 소환 과정에서 제물로 바쳐진 하이 오크나 트롤을 언데드로 재생시켰을 것이고.
닉스는 과연, 이라는 감탄사와 함께 손바닥을 마주쳤다.
[공허의 마주침을 사용합니다.]
[원시종 - 티라노사우루스 렉시를 소환했습니다.]
그림자에서 솟구친 원시종.
렉시는 엘드리치 드래곤을 보자마자 크게 포효했다.
“여신님.”
“흐응, 모자란 계약자를 도울 수 있는 건 여뿐이로구나.”
데모닉 파워의 지속 시간은 아직 20초가량 남아 있다.
마력 스텟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바닥으로 떨어져 있는 상황.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기에, 닉스가 엘드리치 드래곤의 발목을 붙들어 줘야 했다.
렉시의 머리 위에 올라탄 닉스는 극야를 최대치로 방출했다.
인근 수십 미터를 검게 물들이는 심야의 어둠.
오리하르콘 100킬로그램를 추가로 흡수한 덕에 출력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대장장이가 벼려 낸 것처럼 날카로운 의념을 구현한 암흑 칼날들이 사방에서 쇄도했다.
칼끝에 아른거리는 푸른 기운.
암영추혼검의 묘리를 담아 낸 검기가 엘드리치 드래곤의 몸뚱이를 무자비하게 들쑤셨다.
푸아악!
피 대신 검은 영기(靈氣)가 흘러내린다.
암영추혼검을 동시에 펼치니 비늘을 뚫어 내는 데 성공했지만, 놈의 몸뚱이가 원체 크다 보니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크하핫, 그 정체 모를 어둠으로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릎을 조아려야 할 것이다!”
타기리온의 묘목은 광소를 터트렸다.
놈의 주력인 언령 저주가 극야에 막혀서 마음고생을 꽤 했나 보다.
“그 정도면 충분해.”
엘드리치 드래곤이 극야에 붙들려 있는 동안.
[아발란체를 사용합니다.]
[아발란체를 사용합니다.]
고속 연산 효과로 더 빨라진 마력 재배열 속도.
탐욕의 가호로 해방되려는 냉기를 붙들어 놓고 연달아 마법을 전개했다.
엘드리치 드래곤의 지척까지 도달한 냉기 구체를 접촉.
이클립스로 두 구체를 하나로 합쳤다.
1+1이 2가 된다?
마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강한 마력을 퍼부어서 마법 위력이 증대된다면, 굳이 1성에서 5성으로 나누어지지 않겠지.
사용자의 마력 양이 마법의 위력을 좌우하긴 해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재배열 과정에 따라 같은 마나를 소모해도 결과물이 다르단 말씀.
하나, 나에게는 [이클립스]가 있다.
서로의 반발력을 극대화시키거나 융화시키는 일식의 힘.
두 구체에 깃든 마력이 얽히면서 힘이 증대된다.
솔라 익스플로전과 충돌시켜서 반발력을 극대화하는 것보단 위력이 약하지만.
그 짓거리를 또 했다가는 나까지 충격에 휩쓸려서 죽을지도 모르거든.
저저저저적!
증폭된 한기가 엘드리치 드래곤의 몸뚱이를 휘감는다.
눈보라를 뜻하는 아발란체.
원래는 넓은 범위에 한기 폭풍을 일으켜서 다수의 적을 얼리는 공격이지만.
이클립스로 그 한기를 집중, 눈보라를 흩뿌리기보다 냉기 자체에 초점을 주었다.
“고작 냉기 따위로 엘드리치 드래곤을 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경험해 보면 알겠지?”
서리가 누런 비늘을 하얗게 물들인다.
막 극야를 찢어발기던 엘드리치 드래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이따위 마법, 용종의 힘 앞에서는…….”
“소환 과정이 완전했다면 이 정도가 전부였겠지.”
저저적!
이클립스로 한기를 극대화시킨 아발란체가 엘드리치 드래곤을 집어삼켰다.
강건한 육체 외에 대부분의 권능을 박탈당한 존재.
타기리온의 묘목은 뒤늦게 아발란체의 추위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곤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아, 암흑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는 마력조차 얼리는 공격. 어때?”
“이, 이!!!!”
강화한 아발란체는 엘드리치 드래곤의 몸뚱이를 옭아맸다.
조금 더 냉기가 강했다면 저 괴물을 용가X 치킨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데모닉 파워로 강화한 마법을 이클립스로 증폭시키기까지 했는데도, 엘드리치 드래곤을 완전히 얼리지는 못했다.
“호오, 그 강한 냉기로도 몸을 둔화시키는 게 전부로구나.”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데모닉 파워의 지속 시간이 모두 지났습니다.]
충만하게 차오르는 힘.
데모닉 파워가 없었다면 마법 저항력이 높은 엘드리치 드래곤을 상대로 이만큼이나 효과를 보진 못했을 것이다.
“2차전 시작이다, 개자식아.”
두둑.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몸을 풀고는 하얗게 변한 엘드리치 드래곤에게 내달렸다.
* * *
아발란체의 냉기를 뒤집어써서 느려진 엘드리치 드래곤.
평소의 1/3 정도의 속도밖에 내지 못하지만, 그래도 위협적인 건 여전했다.
약화시켰다곤 하나 육체 능력은 쇠하지 않았다.
엘드리치 드래곤은 육중한 몸이라는 장점을 살려서 꼬리를 크게 휘둘렀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세.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엘드리치 드래곤의 미간에 붙은 노괴도 저주의 음절을 차근차근 읊었다.
자장가처럼 감미로운 목소리.
닉스는 엘드리치 드래곤을 견제하느라 극야를 최대치로 방출했으니, 날 도울 수 없었다.
[어둠 지배를 사용합니다.]
근본적으로는 닉스의 어둠과 동일한 힘.
밤의 여신이 거래를 통해 넘겨준 어둠의 정수가 저주 섞인 목소리를 차단한다.
내 힘은 닉스의 격에 비해 모자랐다.
완전히 차단하진 못했지만 냉혈까지 발동시키면서 저주를 몰아냈다.
무기력에 빠졌던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기까지는 0.5초.
엘드리치 드래곤의 꼬리가 눈앞까지 다가왔다.
아발란체로 둔화시키지 않았으면 좀 위험했겠는걸.
바람길을 전개, 허공을 밟으면서 굵은 꼬리를 흘려내며 엘드리치 드래곤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다.
“여가 돕겠도다.”
닉스는 렉시를 몰고 꼬리를 막 휘두른 엘드리치 드래곤의 옆구리를 노렸다.
훤히 드러난 틈.
엘드리치 드래곤은 이미 휘두른 꼬리를 거두는 대신 날개를 크게 퍼덕였다.
허수 세계의 에너지. 음차원의 마나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간다.
재배열 과정이나 엘드리치 드래곤의 의념을 섞지 않은 단순한 마력 방출.
그럼에도.
마력 양이 원체 많다 보니 렉시의 전진을 막아섰다.
내 주특기가 마법이라고 생각해서 우선순위를 그렇게 한 듯한데.
“실수한 거야.”
[악귀의 분노를 사용합니다.]
근접전과 관련된 능력치를 200% 늘려 주는 기술.
용솟음치는 힘을 주먹에 집중.
여러 정수를 비활성화하면서 4성급으로 올라간 괴력에 암흑 투기를 운용하면서 엘드리치 드래곤의 발목을 후려쳤다.
휘청거리는 거체.
으깨진 비늘 사이로 검은 영기가 새어 나온다.
“저, 저 버러지 같은 것이!”
타기리온의 가지가 당황한 기색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극야를 두르고 미처 해소하지 못한 저주는 냉혈로 극복했다.
쳇.
온 힘을 쏟아부었는데도 놈을 쓰러트리기는커녕 중심을 잃게 한 게 전부라니.
“더럽게 단단하네.”
예상 못 한 것도 아니다.
괴력의 여파로 저릿거리는 오른손을 거둔 후, 오른 다리를 축 삼아 전신을 크게 돌렸다.
현무제암고.
내공을 온몸으로 퍼트려서 커다란 벽처럼 상대를 압박하는 무공이 엘드리치 드래곤의 발목을 다시 한번 압박했다.
이미 괴력에 실린 힘으로 휘청거린 엘드리치 드래곤.
현무제암고의 반탄력을 모두 해소하지 못하고는 연달아 뒷걸음질 쳤다.
쿵! 쿵!
그마저도 냉기의 여파로 둔화되어서 어기적거렸지만.
악귀의 분노는 재사용 시간이 1시간이나 된다.
원체 많은 정수를 포식한 터라 수중에 든 패가 더 있지만.
몰아붙일 수 있을 때 공세를 퍼붓는 게 좋겠지.
연달아 펼쳐지는 백수제왕무.
“고얀 놈! 감히 티끌만 한 놈이 날 능멸하려 드느냐!”
“넌 아까부터 주둥이로 싸우더라?”
언령이 주특기인 놈이니 틀린 말은 아니잖아.
타기리온의 묘목은 새빨개진 얼굴로 빠르게 저주의 말을 읊었다.
한데.
이번에는 그 대상이 내가 아니었다.
검은 글자가 하얀 서리로 뒤덮인 엘드리치 드래곤의 몸뚱이 위에 덧씌워진다.
화르르륵!
글자가 거세게 타오른다.
저주 대상을 심연의 불길로 태워 버리는 강력한 저주.
마력마저 동결시킨 아발란체의 냉기가 불길에 휩쓸리면서 조금씩 약해진다.
제 몸을 태우면서까지 운신의 자유를 얻을 생각인가.
극약 처방이지만 예상 범위 내다.
[백수제왕무 - 1초식]
[응룡황권을 사용합니다.]
쾅!
괴력으로 가격한 부위를 다시 한번 가격했다.
무공 중 가장 위력이 센 건 어둠의 육체 상태로 펼치는 암영추혼검이다.
하지만.
엘드리치 드래곤의 덩치가 원체 크기에 암영추혼검으로 치명상을 입히기는 불가능했다.
내가 선택한 건 놈의 전투력을 깎는 것이다.
연이은 공세에 엘드리치 드래곤의 발목이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그 순간.
두근- 두근-
육감의 경고가 울리면서 기다란 그림자가 인근을 뒤덮었다.
냉기를 어느 정도 떨쳐낸 엘드리치 드래곤이 중심을 잃은 것을 역으로 이용.
쏟아지는 육체를 내 쪽으로 향하면서 앞발을 힘껏 휘둘렀다.
[축지를 사용합니다.]
[강한 존재감이 공간을 장악했습니다. 공간 간섭에 실패합니다.]
엘드리치 드래곤이 날갯짓과 함께 방출한 음차원의 마나가 축지 발동에 악영향을 끼칠 줄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위기를 벗어나게 해 준 비책.
축지가 처음으로 무효화되었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회귀 전에는 익히지 못한 스킬.
축지의 공간 이동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이 순간에도 경고음을 울리는 육감.
절체절명의 상황이지만, 내 마음은 의외로 평온했다.
공허의 거울을 사용하면 부족한 스펙을 더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신의 분노]나 [우라즈 베르세르크]는 스킬 발동 원리가 흡사해서 중복 사용이 안 되지만 말이야.
이 순간, 엉뚱하게도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산군파랑조를 펼치면서 암흑 투기를 오른팔에 구현.
[이클립스를 사용합니다.]
[성질이 다른 두 파장을 융화시킵니다.]
내공을 암흑 투기와 섞었다.
전생에는 얻지 못한 데스 나이트의 정수.
회귀 전, 후를 통틀어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기예.
산군파랑조가 엘드리치 드래곤의 앞발과 정면으로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