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쿠륵…….”
마지막 하이 오크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놈의 목을 꺾어 버린 엘렌은 사체를 홱, 던지고는 영수 형님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미스터 킴?”
“아, 예.”
당황한 기색으로 대꾸하는 영수 형님.
[인크레더블]을 유지 중인 엘렌은 엄청난 인상파(?)였으니 저럴 만도 했다.
급히 다가온 엘렌은.
“혹시라도 이적 생각이 있으면 골드 문을 생각해 주세요.”
하고는 명함을……. 야, 잠깐만.
“엘렌 상무, 그건 선을 좀 많이 넘는 것 같다?”
이 양반이 어디서 수작질을 부려!
엘렌은 호호, 하고 웃으면서 슬쩍 물러났다.
“형님, 저런 제안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합니다.”
“전 길드장님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제안 많이 들어올 테니 미리 연습한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영수 형님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길드원 중 유일하게 매스컴의 주목에서 벗어나 있는 플레이어.
낭중지추라고, 시간이 지날수록 영수 형님의 진가를 알아보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날 것이다.
“앞으로도 영수 형님에게 지휘를 맡기려고 하는데, 괜찮을까?”
“미스터 유가 왜 추천했는지 알 것 같아.”
엘렌은 그 뒤로도 ‘왜 지휘 능력을 무시했을까.’라든지 ‘마스터께 빨리 말씀드려야겠어.’라고 중얼거렸다.
[타기리온의 가지]의 사체를 포식했지만 고작 3%만 올랐다.
바벨탑 19층에서는 히든 보스로 분류되어서 한 놈만으로 정수를 100% 채울 수 있었는데.
-아쉽겠구나.
“뭘. 금방 채울 수 있을걸?”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비무장지대 탐색은 타기리온의 가지를 쓰러트린 후에도 계속되었다.
본 목적은 어디까지나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 해결.
수색대원한테 받은 지도 덕분에 타기리온의 가지와 몇 번이나 마주쳤다.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은 거짓이 되리라!”
“헛소리는 저승에서나 해라.”
이런. 힘이 과했나.
가슴팍에 주먹을 내질렀더니 상체가 펑- 하고는 산산이 부서졌다.
인근에 퍼져 나가는 피보라.
그 순간.
하체만 덩그러니 남은 [타기리온의 가지]의 몸뚱이가 음산한 검은 빛을 하늘 위로 쏘아 올렸다.
순식간에 하늘을 검게 물들이는 먹구름.
마력과 상반된 에너지, 음차원의 마나가 요동친다.
푸른 초목이 음차원의 마나에 물들어서 검게 물들고.
꺄아아아악! 귀곡성이 여기저기에서 메아리친다.
[암흑 마나에 노출되었습니다.]
[정신 집중 속도가 10% 감소합니다.]
[정신 공격에 취약해집니다.]
…….
[냉혈 스킬이 발동됩니다.]
정신에 간섭하는 스킬들은 냉혈을 뚫지 못했다.
여태 포식한 정수들이 정신 관련 디버프에 대한 저항력을 엄청나게 올려 준 터라 영향을 1도 받지 않았다.
팀원들은 미간을 찌푸리거나 두려운 기색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골든 서클과 옐로우 스톰 쪽 서포터들 덕에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도 목표를 찾았네.”
나는 태연하게 먹구름의 진원지를 가리켰다.
소용돌이치며 위로 상승하는 검은 기류.
일행은 천천히 검은 기류의 진원지를 향해 전진했다.
그 흔한 새의 지저귀는 소리, 바람 흩날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얼마 정도 걸었을까.
먹구름을 휘감은 커다란 제단이모습을 드러냈다.
지구라트와 흡사하게 생긴 모습.
핑 레이가 신음을 흘렸다.
“여긴…… 탑 19층이랑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검은 기류에 휘감긴 커다란 건물.
어슴푸레 보이는 윤곽은 데자뷰를 떠올리게 할 만큼 당시 봤던 구조물과 비슷한 형태다.
“헤에, 그놈들도 무슨 가지라고 했었는데.”
엘렌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미국 최고 팀답게 19층 히든 미션도 클리어한 경험이 있나 보다.
“클리포트의 종파니까. 소속은 조금 다르지만.”
탑 19층에서 제단을 세운 건 ‘가아그셰블라’ 종파.
이번에 상대해야 할 적은 타기리온 종파다.
“후배님, 그걸 구태여 언급하는 건 전략적인 이유가 있겠지?”
“가아그셰블라 종파는 냉기를 능숙하게 다루지만, 타기리온은 디버프와 소환 쪽이거든요.”
종파의 성질을 알면 대응책도 나온다.
신준석은 아, 라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검게 물든 제단 위에는 수십에 달하는 흑마법사들이.
그 아래로는 여태 쓰러트린 괴물들을 합한 것보다도 더 많은 하이 오크와 트롤이 집결해 있다.
일대의 괴물들을 모두 끌어들인 모양이군.
적의 숫자는 수천 단위.
반면에 우리 일행은 채 30명이 되지 않았다.
“어리석은 불신자들이여! 감히 흙발로 성스러운 땅을 짓밟다니!”
중후한 목소리가 제단 꼭대기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타기리온의 묘목]
‘가지’ 계급과 다르게 화려한 로브를 입은 노인은 이마에 달린 세 번째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나한테 저주를 내뱉었다.
시동어 없이 말만으로 저주를 사용하다니.
꽤 제법이지만.
[냉혈이 발동됩니다.]
정신 계열 저주는 냉혈의 벽을 넘지 못하고 모조리 파훼되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노렸으면 재미가 쏠쏠했을 텐데.
왼손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뭐라는 거야.”
“저, 저 불신자가 감히!!!”
흉흉한 살기를 드러내는 [타기리온의 묘목].
나는 콧방귀를 끼고는 영수 형님에게 시선을 옮겼다.
“형님만 믿습니다.”
“길드장님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최선을 다해야겠군요.”
영수 형님은 긴장감에 침을 다시 한번 삼켰다.
“걱정하지 마. 우리 팀은 미스터 킴의 지휘 능력을 믿으니까.”
“후배님 말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없지.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오.”
“지휘관님 마음대로 부려 주시죠.”
영수 형님의 지휘 능력을 맛본 랭커들도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뛰어난 지휘관이 이래서 중요한 거다.
“참, 여신님.”
-공물은 준비하였느냐?
“내가 뭔 말 할 줄 알고.”
-그대의 목소리만 들어도 뭘 말하려는지 알 것 같으니라.
제길.
이래서 눈치 빠른 여신님이란.
“저 녀석의 공격, 막아 줄 수 있어?”
나는 멀찍이 서 있는 [타기리온의 묘목]을 가리켰다.
* * *
클리포트의 종파는 모두 9개.
종파마다 추구하는 방향성은 다르지만, 내부 계급은 동일했다.
첫 번째로 허수 세계의 힘을 막 받아들인 ‘가지’.
가지 계급은 종파 구성원 중 9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영혼에 뿌리내린 허수 세계의 힘이 싹을 틔우면 비로소 ‘묘목’ 계급으로 인정받는다.
“흥, 고작해야 탑의 가호를 받는 버러지들 따위…….”
카베르그는 혀를 찼다.
묘목 계급부터는 세계의 규칙을 비틀 수 있는 강대한 권능을 얻는다.
타기리온 종파는 소환과 정신 간섭에 능숙한 곳.
허수 공간에서 게이트를 타고 지구로 넘어오느라 상당한 힘을 소모했지만.
카베르그는 여전히 강대했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차원의 대칭점인 허수 세계.
그 힘을 언령(言令)으로 구현, 진호 일행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대상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강력한 저주!
인사 차원으로 진호에게 건 저주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녔다.
뒤집어진 허수 세계의 섭리는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그 순간.
농밀한 어둠이 솟구치면서 진호 일행을 감쌌다.
밤의 여신 닉스의 근원.
극야의 힘이 얇게 펼쳐지더니 카베르그의 저주를 모조리 빨아들였다.
“같은 어둠으로 받아치겠다? 꽤 괜찮은 생각이다만.”
카베르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언령에 실린 힘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성유물로 펼친 해주(解籒)로도 카베르그의 저주를 완벽하게 지워내지는 못한다.
그게 설령 카베르그의 언령을 흡수한 정체불명의 어둠일지라도.
흑마법이든.
성좌의 가호를 받은 힘이든.
그 힘의 근원이 ‘어둠’이라면 카베르그를 앞설 수 없다.
『뒤집어져라.』
극야에 흡수된 저주의 기운이 마구 꿈틀거린다.
같은 어둠이라고 해도 더 상위의 개념 앞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카베르그는 허수 세계의 힘을 받아들인 존재.
악마 군주나 어둠 계열 성좌가 아니라면 ‘어둠’에 관해서 그를 이길 자가 없었다.
절대적인 상성 차이.
“뭐라고 떠드는 게냐. 외도를 걷는 자여.”
카베르그에게 불행이 있었다면.
그 ‘어둠’의 정점에 선 밤의 여신이 상대였다는 것이다.
닉스는 카베르그가 저주를 사용한 순간에 바로 현신, 극야의 힘으로 언령을 받아쳤다.
『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피하지 못할 것이니. 모든 것은 쇠하리라.』
『가시 박힌 면류관을 그 이마에 쓰라.』
노화와 고통을 담은 언령.
일행 중 진호를 제외한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저주이지만.
“그대가 여에게 부탁한 이유가 이것이로구나.”
닉스의 읊조림과 함께 솟구친 극야가 카베르그의 저주를 모조리 빨아들였다.
“건방진 것! 무슨 사술을 쓴 것이냐!”
“순리에서 벗어난 자여. 그대의 어둠 또한 밤에서 비롯된 것. 밤의 근원인 여에게는 통하지 않으니라.”
닉스의 친절한 설명을 들은 카베르그는 도리어 분노했다.
“감히 나를 능욕하려 해!”
게으름.
부패.
착란.
그 외에도 온갖 저주가 쏟아졌지만 닉스의 극야를 뚫진 못했다.
도리어 카베르그가 발이 묶인 동안, 제단 아래에 있는 괴물들에게 재난이 들이닥쳤다.
옐로우 스톰.
무극.
골든 서클.
그리고 진호를 포함한 역천 본대.
네 축은 김영수의 지휘를 받아 톱니바퀴처럼 회전하며 하이 오크와 트롤 군대를 갈아 버렸다.
허수 세계의 힘으로 강화된 괴물들이지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역천 길드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쿠륵!”
“구어억…….”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하이 오크와 트롤들.
[타기리온의 가지]들이 괴물들을 지원했지만 시기적절한 원거리 딜러들의 공격에 상쇄되었다.
카베르그가 그 사실을 알아챘을 때는 제단을 보호하던 병력 중 2/3이 쓰러진 뒤였다.
“이, 이대로는 사명을 다할 수 없다.”
타기리온 분파의 특기는 저주.
하지만.
닉스 앞에서는 어떤 저주도 통하지 않았다.
공격 마법도 전개할 수 있지만, 이미 괴물들을 다수 잃은 상태에서는 승산이 없다.
패배를 직감한 카베르그.
그는 몸을 지탱하고 있던 지팡이를 제단 위에 꽂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구나.”
제단 아래에서 항전 중이던 타기리온의 가지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묘, 묘목이시어!”
“그것만큼은 아니되옵니다!”
카베르그는 그 외침을 외면하고는 제단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희생의 제물]
구구구궁!
제단이 사이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