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비무장지대 안쪽은 이미 기존과 달라진 생태계가 자리를 잡았다.
노루나 멧돼지 같은 덩치 큰 토착생물들이야, 게이트에서 나온 괴물들의 먹이가 된 지 오래.
다람쥐나 참새 같은 작은 동물들만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구어어어!!”
“트롤 새끼가 시끄럽게.”
응축시킨 내공을 해방하니 트롤의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일격에 부서진 심장.
재생 능력으로 유명한 트롤이라고 해도, 심장과 뇌는 복구할 수 없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괴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미스터 유, 또 그거야?”
“왜. 이번 작전에서는 내 지시를 따라 준다고 했잖아.”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트롤의 사체잖아.”
엘렌은 아쉬운 듯 쩝, 하고 입맛을 크게 다셨다.
트롤의 피.
중급 이상 회복 포션 제작에 반드시 들어가는 재료다.
바벨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재료 수급이 불가능해서 대량의 cp를 지불해야 겨우 구매가 가능했던 포션.
트롤의 피는 현 시점에서도 고가의 재료로 거래되었다.
“피를 빼면 내 능력이 발동되지 않아.”
사체에 깃든 정수.
내가 원하는 부위만 뚝 잘라 내고 포식하는 게 가능하다면, ‘황금을 똥으로 만드는 능력’이라고 안 불렸겠지.
“역천 길드, 특이한 고유 능력의 소유자들이 가득하네.”
글쎄요. 인크레더블도 사실상 엘렌 혼자 보유한 능력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말을 들으니 묘한 기분이 드는걸?
[스킬 - 초재생 능력이 추가됩니다.]
[초재생 능력]
등급: ★★★
분류: 액티브
마나를 소모해서 상처를 재생시킨다. 뇌나 심장을 제외한 부위는 모두 재생이 가능하다.
트롤의 재생 능력이 추가되었다.
이전까지는 [변이]를 초재생 능력 대용으로 사용했지.
부작용을 동반하는 기술이라 사용할 때마다 엉뚱하게 변이가 되지 않도록 기운을 눌렀어야 했다.
“조금 더 과격하게 움직여도 되겠어.”
-그러다가는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여신님이 좀 도와주면 괜찮겠지?”
-감히 여를 협박하려는 게냐?
“미천한 필멸자인 제가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나이까.”
-흐응, 두고 보겠다.
닉스의 동공에 아른거리는 붉은 빛이 한층 진해졌다.
그렇게 노려봐야 눈만 아플걸.
비무장지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괴물의 출몰 빈도가 늘어났다.
이 근방에 자리를 잡은 건 하이 오크와 트롤.
놈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거품을 물면서 달려들었다.
콰콰콰콰!
휘몰아치는 폭풍이 하이 오크와 트롤들을 찢어발긴다.
바람 사이에 흩날리는 초록색 핏방울.
홍윤수는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한 방울 땀을 훔쳤다.
“하이 오크와 트롤이 힘을 합치니 까다롭군요.”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야 별생각…….”
“오로지 앞만 보고 가는 친구입니다. 의견을 구해도 뭐.”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신준석이 홍윤수와 드잡이질을 하고 있을 때, 변신을 푼 엘렌이 다가왔다.
“그 의견에 동감. 다른 게이트 출신 괴물들은 협력이라는 걸 안 하거든.”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땅덩어리가 크다.
1차 대이변 직후 여기저기에 열린 게이트들.
영토의 넓이에 비해 인구가 적은 만큼, 모든 게이트를 폐쇄하지는 못했다.
임계에 다다른 게이트들이 연달아 브레이크 사태를 일으켜서 곤혹을 치렀기에 이런 상황에서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후배님, 어찌할 생각인가?”
“전진해야죠. 변수가 생겼다면 조사를 해 두는 게 좋으니.”
그래. 저 ‘변수’를 사전에 없애 버리려고 나선 건데,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잖아.
수색대원에게 받은 지도를 길잡이 삼아 나아가던 중.
하이 오크와 트롤 사이에 끼어 있는 흑마법사를 발견했다.
[타기리온의 가지]
흑마법사 머리 위에 떠 있는 붉은 글자.
-저치에게서 불쾌한 냄새가 나는구나.
닉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타기리온은 클리포트의 분파 중 하나야. 순리에 어긋난 자들이지.”
회귀 전, 우리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대규모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의 원흉을 이렇게 볼 줄이야.
더럽게 반갑다. 개자식들아.
내가 갑작스러운 비무장지대 행을 결정한 원인을 목전에 두니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미스터 유, 클리포트는 탑의 설정 아니었나?”
“조금 달라. 저놈들은 하이 오크나 트롤처럼 탑이 복제한 게 아니거든.”
“그 이야기는 처음인걸.”
“내가 성좌들의 사랑을 좀 많이 받잖아.”
클리포트, 정확히는 클리포트의 나무.
세계를 상징하는 ‘세피로트의 나무’를 뒤집은 개념이자 허수 공간 자체인 나무다.
각 차원의 그림자와 마찬가지인 허수 공간을 ‘세계’ 자체로 완성시켜서 온갖 개념을 엎고 그들만의 낙원을 만들려는 조직.
클리포트의 설립 이념이다.
홍윤수는 내 설명에 머리를 긁적였다.
“금시초문이군요.”
랭커들조차 들어 보지 못한 클리포트의 실체.
그럴 만도 하다.
클리포트는 성좌가 중심이 된 세력이 아니니까.
그들이 손을 잡은 건 탑에서 정해진 권한 외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고신족들이다.
빌어먹을 놈들.
속으로 욕을 삼켰다.
클리포트 분파가 게이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고신족과의 합의가 있어서다.
[타기리온의 가지]는 괴물들의 호위를 받은 채, 지팡이를 땅에 꽂아 놓고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읊조렸다.
사이한 기운이 지면에 퍼져 나간다.
실존하는 공간을 허수 세계로 바꾸는 주문.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난 지역은 몇 개월 정도면 원래대로 돌아오지만 저 주문은 최소 몇 년 이상 지맥을 어지럽힌다.
“소란을 피운 게 네놈들이냐?”
타기리온의 가지가 일행이 다가오는 것을 인지하자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위대한 클리포트의 행사를 방해하는 놈들을 살려 보낼 수는 없지.”
타기리온의 가지가 지팡이를 요란하게 휘둘렀다.
지팡이 끝에 달아 놓은 흑요성이 삿된 빛을 흩뿌렸다.
검붉은 기류가 하이 오크와 트롤의 전신을 휘감으면서 그들의 육체를 강화시켰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라.”
쿵! 쿵!
트롤과 하이 오크가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전진한다.
몇 시간 만에 드러낸 재앙의 꼬리.
미래의 비극을 막기 위한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 * *
트롤의 발이 평소보다 가볍다.
이번 비무장지대 행에 따라온 토마스 밀러가 괴물들의 상태를 빠르게 분석했다.
“저 검은 기류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트롤의 숫자는 20마리.
하이 오크는 100마리가 넘어간다.
타기리온의 가지가 건 광폭화 주문으로 강화된 괴물들.
얕볼 수 없는 전력이다.
“이제부터는 지휘 체계를 통일하겠습니다.”
“좋아. 미스터 킴이라고 했지? 듣던 대로의 실력이기를 바랄게.”
엘렌이 김영수를 흘겨보았다.
꿀꺽.
영수 형님의 목울대가 크게 요동친다.
비무장지대에 진입하기 전.
난 위급한 상황이 되었을 때 영수 형님에게 모든 지휘권을 이양할 거라고 미리 말해 두었다.
영수 형님의 능력을 겪어 본 무극과 옐로우 스톰은 큰 반발이 없었지만.
골든 서클 팀원들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늘 내 편의를 봐주던 엘렌도 이 부분만은 어쩔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으니.
2020년대에는 지휘 능력의 중요성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어쩔 수 없다.
“형님, 늘 하던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길드장님.”
영수 형님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지휘를 시작했다.
[군단 지휘의 효과로 투지가 상승합니다.]
[군단 지휘의 효과로 고통 내성이 적용됩니다.]
[백인장이 통솔 중입니다. 투지가 대폭 상승합니다.]
…….
지휘 능력이 활성화되자마자 쏟아지는 버프들.
서포터 계열 플레이어들의 효과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소모되는 마력도 없고 지속력도 있는 버프가 걸리는 건 언제나 환영이다.
“와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던 골든 서클 팀원들도 감탄사를 터트렸다.
「골든 서클 팀이 선두를 맡아 주십시오.」
서로 간의 거리를 뛰어넘어 들리는 영수 형님의 목소리.
골든 서클 팀원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지시대로 움직였다.
저들은 모르겠지만, 영수 형님의 지휘 체계 아래로 들어온 시점부터 반발심까지도 낮아진다.
[군단 지휘]가 왜 대단한지 이제 실감하게 될걸?
정면으로 돌진한 골든 서클 팀이 괴물들의 어그로를 끌 때.
우우웅!
절묘하게 펼쳐진 진동 결계가 하이 오크와 트롤 사이에 펼쳐졌다.
두 종족이 속도를 맞춰서 걷는다 해도 타고난 체형 때문에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군단 지휘로 하이 오크와 트롤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김영수가 시기적절하게 명령을 하달.
지영이의 결계가 적 무리를 둘로 나누었다.
「옐로우 스톰은 적의 후방을.」
「무극 팀은 골든 서클과 합류해주십시오.」
「본대는 괴물들의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저 흑마법사를 노려야 합니다.」
영수 형님이 말한 본대란, 내가 일일이 섭외하고 다닌 길드원들을 가리켰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길드원들 덕에 발이 묶인 괴물들.
[타기리온의 가지]에게 향하는 길이 활짝 열렸다.
[부정한 손아귀]
[비통에 가득 찬 비명 소리]
[고통 강화]
갖가지 저주가 본대에게 쏟아졌지만 무시했다.
[타기리온의 가지] 분파는 [가아그셰블라]처럼 전투에 능하지 않다.
저주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지만 그뿐.
영수 형님의 지휘에 들어와 있다 보니 정신 계열 디버프의 효과가 크게 반감되었다.
허수 공간에 속한 소환수들이 나왔지만 일행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건 불가능해!”
“응, 아니야.”
경악한 [타기리온의 가지]를 일격에 쓰러트리자, 하이 오크와 트롤 무리를 휘감은 새카만 기류도 사라졌다.
수십 년은 늙은 것처럼 기력이 쇠한 괴물들.
버프의 후유증을 겪는 괴물들을 쓰러트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스승님, 땅이 정화되고 있어요!”
지영이가 바닥을 가리켰다.
[타기리온의 가지]가 수작질을 부렸던 땅이 원래대로의 색을 되찾아간다.
하지만.
검은 자국을 몰아낸 땅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이 더 있나 보군.”
나는 회귀 전의 자료를 자연스럽게 풀었다.
비무장지대를 통째로 타락시키려는 클리포트의 계획.
그걸 송두리째 뽑아내려면 지금이 적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