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닉스가 케이크를 모두 먹은 후, 재차 탑에 도전했다.
47층 미션의 주제는 레이드.
지난 층과 마찬가지로 성좌들이 개입하면서 50인이 진행해야 할 미션을 홀로 진행하게 되었다.
“이 정도 페널티야 아무것도 아니지.”
지구 차원보다 평균 전투력이 높은 오크 50마리도 이겨 낸 몸이다.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46층보다 쉽단 말이다.
-후훗, 이번에도 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상황을 좀 봐야겠지만 괜찮을 걸.”
-후회할지도 모르느니라.
“여신님,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수상하게.”
-아무것도 아니니라. 다만 여의 손을 빌리려면 합당한 공물이 필요하다는 것만 말해 두마.
공물이라.
설마…….
“그 민트초코 케이크가 맛있던 건 아니지?”
-흐응, 기억해 두어야겠구나. 민트초코라, 지영이와 같이 먹으면 즐거워할 것이 분명하도다.
“왜 양치질 하면 느껴지는 맛을 굳이 돈 주고 먹겠다는 거야?”
-분명 신상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신상이기야 하지.”
아무렴.
난 줘도 안 먹겠지만.
닉스를 골탕 먹이려고 한 게 도리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린 것 같다.
끙. 지영아, 미안하다.
[얼음마녀 켄트라가 잠에서 깨어납니다.]
[켄트라를 쓰러트리십시오.]
[몇몇 성좌의 개입으로 켄트라의 진정한 힘 일부가 깨어납니다.]
시스템 알람과 함께 푸른 로브를 입은 여인이 지상에 나타났다.
저저저적-!
하얗게 물드는 벌판.
푸른 초목은 냉기에 닿자마자 제 색을 잃고 수분이 얼어붙어 버리면서 바스러졌다.
얼음마녀.
푸른 심장석을 벼려 낸 원주인이 47층 레이드 대상이다.
얄궂구먼.
당연한 이야기지만, 탑에 등장하는 얼음마녀는 원본이 아니다.
『시간을 멈춘 마녀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A급 성좌의 존재감.
메시지를 보낸 성좌가 누구인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곳은 혹한의 대지. 누구의 걸음도 허락되지 않았으니 돌아가라.”
“돌아가기 싫다면?”
“답은 정해져 있지 않겠나.”
얼음마녀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은은한 살기가 공기를 차갑게 만든다.
본래 50명이 도전하는 미션.
거기에, 얼음마녀가 은연중에 내뿜는 마력을 보니 심상치 않았다.
이야, 숫자 제한이야 그렇다 쳐도 얼음마녀까지 강화했네.
-대적이 강화되었는데 기분이 좋은 모양이구나.
“어떤 보상을 줄지 기대되잖아.”
-맥없이 당하지는 말거라. 여의 계약자라면 응당 어울리는 힘을 보여 줘야 할 터.
현신한 닉스는 팔짱을 낀 채 뒤로 물러났다.
이번 전투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하여라, 여의 계약자여.”
……민트 초코가 그렇게 맛있었나?
얼음마녀의 눈빛이 한층 가라앉았다.
“침입자, 제법 강단이 있구나.”
“강단이라기보다는 이쪽도 걸린 게 좀 있어서.”
“좋다. 그렇다면 내 땅을 밟을 자격이 되는지 시험해 볼까?”
얼음마녀의 로브 안에서 구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46층에서 획득한 보상.
푸른 심장석을 가공해서 만든 강력한 아티팩트다.
[콜 아이스 골렘]
[콜 아이스 드래곤]
저저저적!
얼음으로 된 5미터 크기의 골렘들.
그 뒤에는 20미터에 달하는 빙룡이 입을 크게 벌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리석은 도전자. 패기에 걸맞은 실력이기를 바라마.”
아이스 골렘 30기가 평원을 빼곡하게 뒤덮은 채, 육중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쿵! 쿵!
놈들이 발을 움직일 때마다 지축이 흔들린다.
뒤에 선 아이스 드래곤은 얼음마녀를 태우고는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전위를 맡은 아이스 골렘부터 산산조각 내야겠구나.”
“그럼 소모전이 될 뿐이야.”
얼음마녀는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보유했다.
푸른 심장석에서 나오는 엄청난 냉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서다.
“일격에 부수지 못하면 금방 재생하거든.”
얼음마녀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나를 제법 연구했구나. 그렇다 한들 혹한의 바람을 피해 가지는 못할 터.”
47층은 정석 공략법이 나오기까지 무수한 플레이어들을 좌절시킨 통곡의 벽이다.
아이스 골렘과 아이스 드래곤의 재생 능력은 트롤 이상.
팔, 혹은 다리를 부숴도 매개체인 멀쩡하면 1초 안에 재생이 가능하다.
핵의 위치도 무작위라서 아이스 골렘을 부수려면 5미터에 달하는 몸체를 한번에 날려 버려야 한다는 거지.
닉스가 아, 하는 표정과 함께 손바닥을 마주쳤다.
“쓰러트리라고 만든 게 아니로구나.”
“이해가 빠른걸. 정석은 저 골렘들의 발을 묶는 거야.”
47층 공략의 핵심은 탱킹이다.
아이스 골렘의 어그로 관리.
얼음마녀는 공격적인 성향이기에 아이스 드래곤 외의 병력을 앞으로 배치한다.
전진한 아이스 골렘들을 붙들어놓고 얼음마녀를 공략하는 것.
“꼭 정석을 따라갈 필요는 없지.”
[공허의 마주침을 사용합니다.]
그림자가 보라색으로 물들더니 쭉 늘어났다.
길게 번진 어둠에서 몸을 일으킨 렉시.
“앞에서 시간 좀 끌어 줘.”
“캬오오오!”
렉시가 믿음직스럽게 포효했다.
든든하구먼.
공허의 거울로 원시종의 정수를 구현하면 렉시를 불러낼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재배열되는 마나.
10초가량이 지난 후, 극한까지 압축된 이글거리는 구체가 손바닥 위에 아른거렸다.
완성된 솔라 익스플로전을 탐욕의 가호로 물들이고는, 아공간에서 [아르스 게티아]를 꺼냈다.
쩝.
더블, 혹은 멀티 스펠 관련 정수를 빨리 포식하든 해야지.
아무리 마력 재배열 속도를 빠르게 해도 다중연산에 비할 바는 아니란 말이야.
내 암흑 마나를 흠뻑 빨아들인 아르스 게티아가 음산한 빛을 흩뿌렸다.
“화염과 음차원의 마나. 동시에 전개했다가는 서로의 위력만 반감시킬 것이니라.”
팔짱을 낀 채 관전 중이던 닉스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내가 그 정도도 모를까.
“구경이나 하쇼.”
암흑 마나를 모두 흡수한 아르스 게티아가 재배열한 힘을 방출했다.
허공에 떠오른 암흑 마나의 철퇴.
바르바토스의 권능을 일부 흉내 낸 강력한 흑마법이다.
“캬오!”
렉시의 경고음 사이로 아이스 골렘 일부가 내 쪽으로 돌진했다.
스펙이야 렉시가 높지만 1 대 30이라는 숫자 차이 때문에 모두 커버하는 건 불가능했다.
주문이 완성될 때까지 버텨 준 게 대단하지.
나는 곧바로 렉시를 소환 해제.
두 기운을 충돌시켰다.
꽈르르르릉-! 화염과 암흑, 상극까지는 아니지만 대치를 이루는 힘이 충돌하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대로 충돌시키면 내 마력만 소진하는 꼴이지만.
“이건 어떨까.”
[이클립스를 사용합니다.]
극점에서 추출한 정수.
화염과 얼음처럼 상극을 이루는 속성은 아니지만.
자연 속성은 기본적으로 음차원의 마나와 상성이 안 좋았다.
대칭을 이루는 힘의 반발력을 극대화시키는 순간.
바르바토스의 철퇴와 솔라 익스플로전을 처음 충돌시켰을 때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굉음이 터져 나오면서 시야가 일순 하얘졌다.
두근- 두근-.
한발 늦게 찾아온 육감의 경고음.
어. 시바, 이거 왠지 잣 된 느낌인데?
* * *
하늘을 뒤덮은 매캐한 연기.
검은 연기의 진원지는 이클립스로 두 힘의 반발력을 극대화시킨 위치였다.
두 힘이 충돌한 곳을 중심으로 생긴 커다란 크레이터.
수십 미터 깊이의 흙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고, 두 마법의 반발력으로 생긴 열기에 간접적으로 노출된 땅은 새빨간 용암을 흘렸다.
아이스 골렘도 23기가 완전히 소멸.
남은 7기도 몸 절반 이상이 녹아버렸다.
“어째서 재생이 안 되는 거지?”
경악하는 얼음마녀.
본래는 금세 복원되어야 할 아이스 골렘이지만 충격의 여파가 원체 커서일까, 녹은 몸을 회복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더럽게 아프네.”
“그대여, 괜찮으냐?”
“안 괜찮아.”
솔라 익스플로전과 바르바토스의 철퇴의 반발력.
엄밀히 따지면 상극이 아니라서 파괴력이 어느 정도까지 증폭될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폭발 진원지에서 거리를 조금 두었는데도 육감이 울릴 정도의 충격.
온몸이 욱신거려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데모닉 파워로 마력을 찍었으면 정말 죽었겠네.”
내가 펼친 스킬의 후폭풍에 사망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닉스가 얼마나 비웃을지 쉽게 상상이 갔다.
회귀 전에도 종종 이클립스를 사용했지만, 반발력을 극대화시킬 경우에는 위력이 천차만별이라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길은 확실하게 열었다.”
아이스 골렘을 전멸시키진 못했지만, 얼음마녀를 공격하기에는 충분했다.
“가라. 저 침입자를 짓밟아 버려라!”
우두커니 서 있던 아이스 드래곤이 날개를 펼치면서 직선코스로 날아들었다.
“나와라, 렉시.”
“카오오오!”
렉시를 다시 불러내자 입을 크게 벌리고는 아이스 드래곤과 정면으로 붙었다.
괴수들끼리의 대결.
아이스 드래곤은 렉시를 떨쳐 내지 못하고 머리를 바동거렸다.
“방금 전의 마법으로 소멸한 것이 아니었나?!”
“그 전에 역소환했지.”
렉시의 꼬리를 타고 빠르게 올라갔다.
얼음마녀가 급히 보주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결정 형태로 응축된 냉기가 얼음마녀의 주위를 휘감으면서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단단한 방어막을 짜낸다.
[크리스탈 배리어]
견고한 방어막.
나는 배리어 위에 손을 얹었다.
층층이 스며들어서 배리어의 구조를 흔드는 내공.
“내 마법에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냥 부수는 건데요.”
발경의 묘리가 크리스탈 배리어를 산산조각 냈다.
그와 동시에 쭉 펼친 왼손으로 얼음마녀의 목을 찔렀다.
목덜미에 난 손가락 크기의 구멍.
얼음마녀는 목이 찔리는 순간에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얼음 복제자]
[앱솔루트 제로]
막 쓰러트린 얼음마녀의 사체가 얼어붙으면서 절대영도의 한기를 퍼뜨렸다.
얼음마녀의 발악 패턴.
뭐, 그 정도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축지를 사용합니다.]
공간 사이를 접어서 이동.
얼음과 육체를 교환한 위치로 쫓아가서 얼음마녀의 목덜미를 다시 한번 붙들었다.
“컥, 커컥. 어떻게.”
“즉사에 해당하는 공격을 한번 피해 가게 하는 마법. 모를 줄 알았나?”
“네놈……!”
얼음마녀가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탑이 만든 가짜 주제에 이런 눈빛을 보내는 건 사기 아니야?
우드득-.
망설이지 않고 얼음마녀의 숨통을 끊자, 평원을 물들였던 한기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 메인 미션 - 서리의 수호자를 통과했습니다.
성좌들의 개입으로 강화된 미션.
50명이 도전해야 할 걸 혼자서 클리어했으니, 어떤 보상을 줄지 기대해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