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오크 플레이어의 숫자는 약 50.
초전에 솔라 익스플로전으로 즉사한 게 13마리.
전투 속행이 어려울 만큼 중상을 입은 오크가 12마리다.
언덕에 진입하기도 전에 반을 무력화시켰다.
“반밖에 못 줄이다니. 쓸데없이 육체만 튼튼한 근육 바보들답군.”
-저들이 들으면 억울하다고 항의할 것이다.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토룡출수.
토룡의 돌진 속도가 빠르다 보니 단순 동작 외에는 컨트롤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남은 오크 무리들은 회전 중인 토룡을 지나 안쪽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타이밍을 맞춰야 한다.”
“하나, 둘.”
셋을 외치며 사방에서 뛰어드는 오크들.
쿠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왔던 방향 그대로 튕겨 나 버렸다.
오크 놈들이 뛰는 순간에 맞춰 선기를 대량으로 투입.
토룡의 속도를 올려서 오크들의 연계를 무너트렸다.
-이러다가 1시간이 그대로 지나가겠구나.
“그러게. 시시하군.”
하암, 왕좌에 기대서 늘어지게 하품을 쏟아 냈다.
오크들의 민머리 위로 굵은 핏줄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왔다.
“비겁한 인간. 시간을 끌어서 이길 셈인가!”
오크 플레이어 중 유독 화려한 무장을 갖춘 녀석이 크게 외쳤다.
“꼭 실력 모자라는 애들이 비겁 운운하더라. 안 그래?”
-발언에 주의하여라. 저치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니.
“아, 그러네. 배려는 해 줘야지.”
-후후훗, 여의 계약자는 참으로 자비롭구나.
내 말에 쿵짝을 맞춰 주는 닉스.
점점 말투가 나를 닮아 가는 느낌인데.
도발 실력이 제법이야.
“쿠륵! 나, 대전사의 아들 칼몬의 명예를 걸고 네놈을 쓰러트리겠다!”
“대전사 본인도 아니면서 무슨 명예 운운 하냐?”
“쿠르르르륵!”
오크의 두피가 붉게 물들었다.
-저런. 얼마나 분노하였으면 피부색이 바뀌어 버렸구나.
“종족 고유 스킬인데?”
악마의 피. 오크의 먼 조상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신의 힘을 일깨우는 종족 스킬이다.
인간한테는 저런 고유 기술이 없으니, 바벨탑에서 얼마나 불리한 위치에 섰는지 체감이 되려나.
“쿠오오오!!!”
붉게 물든 오크가 크게 포효했다.
쩌렁쩌렁한 울음소리가 언덕 주위를 휘감으면서 메아리치고.
그에 맞춰 동료 오크들도 화답했다.
“대전사의 아들이라는 게 뻥카는 아니었군.”
-왜 그러느냐?
“악마의 피를 사용 안 한 오크들도 버프 효과를 보고 있잖아.”
오크 종족의 고유 기술은 전형적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형 스킬이다.
잠력을 끌어내서 신체 능력을 폭발적으로 증대시키는 대신 스태미나가 떨어지는 기술.
사용하면 육체에 영구적인 후유증도 남는다.
크로크 차원에서는 악마의 피를 사용할 때 온갖 주술과 약초 등을 먹어 두고 펼쳐서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게 보편적이란다.
-한데 왜 저치는 그런 준비를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구나.
“탑이잖아. 미션에서 벗어나면 후유증도 없으니까.”
오크 종족은 [악마의 피]를 페널티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필멸의 종족치고는 바벨탑에서 높은 등수를 유지했다.
“크아아아아!”
악마의 피로 능력치를 증대시킨 오크가 겁 없이 달려든다.
뒤를 따르는 여러 오크들.
쿵! 쿵쿵! 토룡이 연달아 오크들을 치고 지나갔지만, 놈들은 움츠러들지 않고 재차 돌진해서 돌로 된 몸뚱이에 들러붙었다.
선기를 더 투입해도 오크들의 완력에 무기력해진 토룡.
본래 정면으로 나아가는 성질을 [대지모신의 가호]로 컨트롤해서 회전하게 했으니, 위력이 줄어든 것이다.
그래도 오크들의 발을 추가로 묶어 놨으니 손해 볼 건 없군.
“크아아아아!!!”
악마의 피를 발동한 오크가 무리의 선두에 서서 살기를 흩뿌렸다.
동공 너머로 아른거리는 붉은 안광.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수백 번 찢어발길 것 같은 기세다.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흐응, 어찌하려고 그리 사악한 표정을 짓느냐.
“놈들의 자긍심을 꺾어 주려고.”
지구 차원은 오크에게 두려움을 품고 있다.
첫 다이아몬드 승급전의 충격은 그만큼 컸으니까.
플레이어들이 60층 너머로 쭉 나아가면서 이종족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씩 떨쳐 내긴 했지만.
현시점에서는 여전히 다이아몬드 승급전 때의 충격을 모두 떨쳐 내지 못했다.
“이번 미션을 편집해서 퍼트리면 그걸 좀 희석시킬 수 있을 거다.”
[공허의 거울을 사용합니다.]
우득, 우드득.
포식한 정수를 육체에 비추면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언덕 위를 뒤덮는 커다란 그림자.
“카오오오오오!!!”
원시종 – 티라노사우루스와 오크의 정수를 동시에 적용한 채, 입을 한껏 벌려서 크게 울부짖었다.
* * *
대전사의 35번째 아들, 칼몬.
위대한 혈통을 타고난 수많은 오크들 중에서도, 칼몬은 특별했다.
선천적으로 튼튼한 체구.
타고난 용력.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노장에 버금가는 전투 센스까지.
후계자 서열에서 꽤 아래에 있는데도 영광스러운 대전사의 이름을 이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칼몬이.
언덕 위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는 순간 돌진을 멈췄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두 다리를 붙든다.
잘게 떨리는 팔뚝.
‘두려워하고 있다? 대전사와 가장 닮았다고 하는 내가?!’
칼몬은 한발 늦게 마음을 집어삼킨 감정을 이해했다.
먼 옛날,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했던 티라노사우루스.
그리고 오크의 힘.
두 정수를 공허의 거울로 구현하니 오크와 존재감이 뒤섞이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칼몬은 그 원인까지 알 수 없었지만, 움직임을 붙든 감정이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쿠르르륵!
순수한 분노가 칼몬의 눈동자에 떠오른 안광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었다.
“난 대전사의 자손이다. 적에게 두려움을 느낄 리 없다!”
배에서 끌어올린 웅혼한 외침과 함께 잠시나마 몸을 붙들었던 두려움을 떨쳐 냈다.
오크 대전사의 아들.
칼몬에게는 두려움이 허락되지 않았다.
“인간, 아니 괴물. 네놈을 사냥해주마. 빨리 내려와라!”
“야, 왕좌에서 안 벗어난다고 말한 게 언제인데 벌써 잊어버렸냐? 하여간 오크 새끼들은 뇌까지 근육으로 되어 있어.”
“감히 진정한 전사를 모욕하다니!!”
칼몬은 진호의 도발조차도 분노로 돌리면서 잠력을 끌어올렸다.
[악마의 피]는 사용자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더 강한 힘과 마력을 부여한다.
[도약 공격]
[근원의 힘]
[주술 - 카리안의 부름]
[초 강화 - 데몬의 도끼]
수십 미터 위로 도약한 칼몬.
근원의 힘과 도약 공격, 두 체술을 동시에 펼쳤다.
그와 동시에 오크의 위대한 조상, 카리안의 힘을 신체에 부여해서 명중률을 100%로 고정시켰고.
[악마의 피] 발동 시 펼칠 수 있는 기술로 도끼의 위력을 증대시켰다.
붉은 기류에 휘감긴 도끼.
명중하면 왕좌가 있는 언덕, 그리고 인근 산자락을 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분쇄시킬 만한 위력이 실렸다.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떨어지는 칼몬의 모습은 혜성과도 같았다.
“쿠르륵. 역시 대전사의 후예다.”
“쿠륵, 악마의 피를 유지하면서 저 많은 기예를 사용하다니!”
“쿠르륵. 대전사의 후예를 따라 돌진!”
오크 플레이어들은 금세 사기를 회복했다.
악마의 피를 사용하면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복잡한 기술을 쓰기 힘들다는 페널티가 있다.
두 체술을 겹쳐서 사용하고 악마의 피를 최대치로 끌어올렸으니.
칼몬의 재능과 집념, 그리고 뛰어난 오성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쇄애애액!
붉은 혜성이 진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
“제 발로 와 주면 고맙지.”
한껏 입을 벌린 진호가 칼몬을 그대로 씹어 먹었다.
콰드드득!
뼈와 근육이 짓눌리면서 발생하는 섬뜩한 소리가 언덕 위를 요란하게 울렸다.
체술을 겹으로 사용해서 위력을 증대시키든.
악마의 피를 최대로 끌어올려서 공세에 실린 힘을 강화하든.
어떤 짓을 해도.
진호와 칼몬 사이에는 압도적인 스펙 차이가 존재했다.
붉은 도끼에 실린 파괴적인 힘은 티라노사우루스의 최대 무기, 날카로운 이빨을 뚫어 내지 못했고.
중심을 잃은 칼몬을 씹어 먹는 건 어렵지 않았다.
또한.
[암흑 투기]
[탐욕의 가호]
[메탈 반사 장갑]
갖가지 강화로 신체 능력을 극대화시킨 건 칼몬만이 아니었다.
오크 종족의 고유 기술, [악마의 피]보다 훨씬 뛰어난 공허의 거울을 사용했고.
공격 기술까지 반쯤 버프용으로 활용해서 칼몬을 씹었다.
오크 대전사의 재능을 거의 그대로 이었다는 자손.
크로크 차원에서 손꼽히는 유망주였던 칼몬은 제대로 된 반항 한번 못하고 진호의 입안에서 사망했다.
어이없는 칼몬의 전사에 오열하는 오크 플레이어들.
“쿠륵! 칼몬 님!!!!”
“쿠르륵. 칼몬 님의 복수를 해야 한다!!!”
남은 오크들은 소리치며 병장기를 휘둘렀다.
흉포함이 아닌,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
오크 무리의 공격은 예리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장 우페이와 엘렌, 그 외에도 많은 플레이어들에게 좌절감을 안긴 오크.
어느 전장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던 투쟁심이 무참하게 꺾어 버렸다.
진호는 이제야 만족한 듯 씩 웃었다.
* * *
절망 섞인 눈빛으로 몸을 던지는 오크들.
“이 정도면 인류도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겠지?”
-과하지 않느냐. 퍼포먼스치곤.
“여신님은 몰라서 그래. 저놈들이 얼마나 지독한지.”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이다.
오크 놈들은 두려워하는 걸 치욕으로 여기거든.
칼몬이라고 했던가?
저놈이 초전부터 [악마의 피]를 사용해 준 덕에 일이 쉽게 풀렸다.
미션을 통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언덕 위라는 지리적인 이점.
[데모닉 파워]로 모든 능력치를 마력으로 전환, 폭격만 했어도 금방 전별시킬 수 있었을 거다.
-굳이 돌아간 것은 그대의 종족을 위한 것이로구나.
“응. 위대하신 성좌들께서 판도 깔아 주셨잖아.”
『천상의 신이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오아시스의 주인은 당신에게 모래 바닥에서 말라 죽을 자라며 저주합니다.』
…….
봐 봐.
엄청나게 좋아하잖아.
나는 성좌들의 응원(?)에 힘입어서 오크 잔당을 짓밟았다.
공허의 거울을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는 적.
티라노사우루스와 오크의 정수를 합치니 훨씬 상대하기가 수월했다.
▶메인 미션 - 언덕의 왕을 통과했습니다.
▶홀로 얼음 왕좌를 지켜 냈습니다. 46층 최고 기록입니다. 강화된 보상이 주어집니다.
▶성좌들의 개입으로 보상이 강화됩니다.
최고 기록이라고 해도 중복이 되는 트로피.
원래는 큰 보상이 나오지 않는다.
근데 성좌들의 개입으로 난이도가 올라갔으니, 기대해 볼 만하지 않겠어?
▶보상으로 푸른 심장석이 주어집니다.
“오호라.”
내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