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아이고.”
“케흑, 아파 뒈지겠네.”
훈련장 바닥에 널브러진 길드원들.
지영이가 토룡출수를 모두 막아 내지 못해서 기절한 후.
나는 한 명씩 지목해서 대련을 진행했다.
지영이가 의식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릴 겸, 허접 소리가 다시는 나오지 않게 서열 정리도 해야지.
“길드장님, 저는 왜…….”
인형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진 영수 형님마저 억울함을 살짝 드러냈다.
판도 깔렸겠다, 모처럼 길드원들의 수준을 점검할 기회가 왔으니 좋잖아?
-그대는 참으로 짓궂구나.
혀를 차는 닉스.
왜, 뭐요.
지영이와 같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나를 밀어내는 데 모두 실패했다.
“사부, 그 선법은 또 언제 익히신 거요?”
“손오공이 알려 주더라.”
“아니, 그게……. 그 토룡이라는 선법, 성좌께서는 엄청 고난이도라고 하셨소!”
“내가 좀 잘났잖니.”
“큰 기술은 봉인하는 거 아니었소?”
“백수제왕무랑 극야의 힘만 안 쓴다고 했잖아.”
큭큭.
토룡출수까지 묶어 놨으면 좀 힘들었을 거다.
길드원 개개인의 수준이 날이 갈수록 올라오고 있군.
아주 좋아.
“으음…….”
지영이가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옆에 있던 카를라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응. 고마워, 카를라야.”
“언제 그런 기술을 익힌 거야? 나한테도 안 보여 주고.”
“헤헤헤, 이건 스승님한테 처음으로 보여 드리고 싶었거든.”
“다음에는 나랑 대련해 줘.”
어쩐지.
정성스럽게 부축해 준다 했더니 본 목적은 대련이었군.
카를라의 눈가 너머로 투지가 일렁였다.
“좋아. 카를라가 그렇게 나를 바라봐 주는 건 처음인걸?”
“그 기술. 상대해 보고 싶어.”
오로지 강해지는 것만 관심을 드러내는 카를라.
지영이의 능력하고는 상성에서 앞서기에, 제 입으로 대련을 신청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진동 결계]의 새로운 운용 방법에 충격을 받았다는 말.
“따로 이야기 좀 할까?”
“넵, 스승님.”
나는 지영이를 따로 불렀다.
* * *
“……독대인데 왜 닉스가 곁에 있는 건가요?”
-후훗, 여는 계약자와 일심동체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일심동체라니, 좀 그렇다?”
-흐응.
기묘한 신경전.
닉스의 코웃음에 지영이가 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무슨 기 싸움이니.
“닉스는 비밀을 엄수할 테니 편하게 이야기해.”
“그건 알지만요오…….”
“원하면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아. 지금부터 이야기할 건 네 능력에 관한 부분이니까.”
“아, 아니에요. 스승님이라면 뭐든지 말씀드릴 수 있죠!”
지영이는 화들짝 놀라며 크게 대꾸했다.
플레이어에게 스킬 활용 방법을 묻는 건 큰 결례인데.
그녀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해서 마음 편히 입술을 떼었다.
“쏜즈 미사일을 막았던 기예. 인과를 뒤집은 건가?”
“와, 대박.”
“정답인가 보네.”
“스승님이 가호를 활용하는 걸 따라 해 봤어요.”
“내 가호 활용법?”
“제가 섬기는 성좌, 아테나의 성유물 중에는 아이기스가 있으니까요.”
“결계를 방패 형태로 고정해서 성유물의 성질을 부여. 막는다는 결과를 부여했군.”
허 참, 인과를 역전시키는 결계라.
진동 결계의 약점인 사용자의 느린 반응 속도를 뒤엎는 기발한 발상이다.
“방패의 성질을 부여해서 반발력도 낮췄고.”
“와, 스승님, 혹시 이런 활용 방법을 이미 알고 계셨던 거예요?”
“네가 한 거 보고 유추한 거야.”
정확히는 회귀 전의 ‘통곡의 벽’을 많이 본 덕에 분석 가능했지만.
하이 랭커 이지영이 결계를 최대로 겹칠 수 있는 건 43장.
성좌의 가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덕에 수십 년 뒤에서 얻을 수 있는 능력의 절반가량을 벌써 손에 넣은 것이다.
뭐, 화력만 봤을 때 절반이지 응용력 면에서는 먼 미래의 그녀와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이지만.
아니지.
지영이가 발견한 새로운 가능성.
그건 통곡의 벽으로 불리며 수많은 적들을 좌절시킨 하이 랭커 이지영조차 가지 못했던 길이다.
내가 전생에서 얻지 못한 기연들을 독식하면서 새로운 힘을 체득했듯.
‘통곡의 벽’이 걷지 않은 길을 스스로의 힘으로 열어 낸 것이다.
정말이지…….
“대단해.”
“네?”
“지영아, 너 진짜 대단하다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아, 아니, 전 그냥 배운 대로 했는데요.”
“나는 이런 거 안 알려 줬거든? 이건 네가 대단한 거야!”
극찬이 연달아 나왔다.
새 가능성을 얻은 지영이라면 인류의 정점인 ‘군주’의 자리를 노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엄청난 성과였다.
“헤헤헤,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부끄럽네요.”
“진짜 최고야. 엘레강트하고 예술적이며 초월적……”
“스승님, 그건 좀 멀리 가셨어요.”
-그러하다. 여가 보기에도 추하구나.
“흠흠.”
난 흥분을 가라앉혔다.
사람이 좀 흥이 차서 그럴 수도 있지!
“날 믿어 주고 모든 걸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
“스승님이잖아요.”
지영이가 흔쾌히 답했다.
-과연. 스승과 제자는 닮아 간다고 하더니.
“뭘 닮아 가?”
-지영이 대련 중에 지은 미소는 그대와 판박이었느라.
“어머, 진짜야? 스승님의 못난 모습은 안 배워야 하는데.”
-포기하거라. 이미 못된 물이 들어 버렸도다.
“히잉.”
이보세요. 지금 날 두고 뭐라고 하는 거야?
“안 되겠다. 넌 특훈이다.”
“저기요, 스승님. 막 칭찬하셨잖아요!”
“새 능력에 익숙해지려면 대련만큼 좋은 게 없어.”
“아니거든요! 괜찮거든요!”
지영이가 비명을 지르면서 끌려 나갔다.
훈련장으로 돌아가면서 괜히 웃음을 삼켰다.
그녀가 보여 준 새로운 지평.
나 또한 그 모습을 보면서 힘을 얻었다.
* * *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하루 동안 푹 쉬었다.
눈 녹듯 사라진 여독.
“이제부터는 탑 등반에만 매진한다.”
-허접이여, 좀 더 분발하여라.
“이야, 여신님도 그렇게 부르기야?”
-후후훗, 플래티넘에도 오르지 못한 허접 아니더냐.
“솜사탕 3일 압수.”
-허어! 미국에서 머무는 동안 거의 맛보지도 못했거늘!
“그러니 처신을 잘하셨어야죠.”
부들부들 떠는 닉스를 뒤로한 채 바벨탑에 접속했다.
[바벨탑 - 46층]
[언덕의 왕]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에는 얼음 왕좌가 있습니다.
언덕의 왕이 될 수 있는 건 최대 5명뿐입니다. 경쟁자들과 협력, 혹은 제거해서 언덕왕이 되십시오.
*목표: 가장 높은 언덕에서 1시간 버티기.
46층은 경쟁 콘텐츠.
언덕 위에서 1시간 동안 버티면 승리한다.
간단한 룰과 달리 참가자들끼리 엄청난 눈치 싸움을 벌여야 하는 미션.
[성좌들이 계약에 따라 미션에 관여합니다.]
[언덕의 왕의 세부 사항이 변경됩니다.]
[경쟁자가 크로크 차원 소속 종족으로 교체됩니다.]
[미션 내용이 언덕의 왕 처치로 바뀝니다.]
[크로크 차원 플레이어들의 공세에서 언덕을 지켜 내십시오.]
나를 관음 중인 위대하신 성좌들께서는 눈치 싸움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사전에 합의했던 대로 미션에 개입했다.
크로크 차원.
오크 새끼들이 상대군.
“과거의 승급전을 의식한 건가.
인류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외계 종족.
각 나라의 정상급 플레이어들이 호기롭게 승급전에 도전했지만 모두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크로크 차원.
오크라는 종족은 인류에게 좌절을 안겨 준 이름이었다.
-오크가 그리도 강하더냐?
“뱀 새끼들보다 약하지.”
나가, 창조신 브라흐마를 섬기는 뱀 인간들.
저번 미션에서 줄다리기를 했던 놈들이 오크들보다 더 까다롭다.
-그대의 적수는 아니겠구나.
“성좌들의 하해와 같은 은혜 덕에 날로 먹는 거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의 악이 당신의 분투를 기대합니다.』
『화과산의 미후왕이 오크를 응원하며 당신에게 야유를 보냅니다.』
『천상의 신은 당신이 좌절하기를 고대합니다.』
『오아시스의 주인이 당신을 보며 분개합니다.』
…….
내가 고꾸라지기를 바라는 성좌들이 한가득했다.
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B급 이하 성좌들은 오죽할까.
근데 어쩌나.
너희가 원하는 영웅의 좌절담 같은 건 없을 텐데.
언덕 위에 놓인 커다란 옥좌.
미션의 핵심인 ‘언덕의 왕’을 상징하는 얼음 왕좌다.
느긋하게 왕좌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다리 한쪽을 꼰 채, 전투를 준비했다.
얼마 정도가 지났을까.
중무장을 갖춘 초록색 피부의 인간종이 언덕 위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햇볕을 반사시키는 민머리.
돼지하고 비슷하게 생긴 코와 초록색 피부가 인상적인 이종족, 오크였다.
“밸런스 망한 거 보소. 다 근접이네.”
-저치들은 모두 근접전에 익숙한 모양이구나.
“마법 같은 건 전사의 수치래서 잘 안 써. 주술이면 모를까.”
오크 주술사는 내 입장에서도 귀찮은데.
잘됐군.
“쿠륵, 위대한 성좌들께서 말씀하신 대적이다.”
“쿠르륵, 허약해 보인다고 얕보지 마라.”
얼씨구.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도 아니네.
언덕이라는 도드라진 위치.
얼음 왕좌 주위는 은, 엄폐할 구조물이 없는 개활지라서 내 위치가 한눈에 보였다.
반대로 말하면 오크들의 동선도 훤히 읽힌다는 말이지.
“선언하지. 나는 이 왕좌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쿠륵! 저 오만한 자의 목을 베어 위대하신 군신께 바치자!”
언덕을 감싼 오크들이 일제히 돌진했다.
전후좌우.
모든 길을 막아 놓은 완벽한 포위진이다.
그렇기에.
“노리기 쉽지.”
[솔라 익스플로전을 사용합니다.]
[탐욕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이글거리는 구체가 셋이나 하늘 위로 떠올랐다.
탐욕의 가호로 붙들어 놓은 폭발 구체.
-저 어리석은 자들의 명복을 빌어 주마.
닉스의 안쓰러운 목소리를 신호탄 삼아 솔라 익스플로전의 에너지를 일제히 해방했다.
쿠아아앙!
매캐한 연기가 하늘 위로 피어오른다.
솔라 익스플로전이 해방되면서 발생한 열기가 언덕 위에 쌓인 눈을 모두 녹여 버렸다.
때아닌 물줄기의 향연.
폭발의 진원지에서 멀지 않은 곳은 모두 녹아 버리면서 수증기를 빚어냈다.
“쿠르륵!”
“쿠륵, 비겁하다!”
“쿠르르르. 사술을 쓰다니!”
어휴, 자기들이 무인인 줄 아나 보네.
구룡방 플레이어들을 척살할 때 지겹도록 들은 단어가 다시 튀어나왔다.
솔라 익스플로전의 진원지에서 조금 떨어진 오크들은 그나마 멀쩡한 모습이었다.
체내의 마력으로 갑주와 피부를 강화.
어찌저찌 버틴 모양이다만.
툭툭.
오른발로 땅을 가볍게 두드리자.
[토둔 - 토룡출수를 사용합니다.]
커다란 토룡이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오크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 녀석도 무시할 수 있을까?”
솔라 익스플로전과 토룡출수.
이 공세를 뚫고 들어오면 나랑 주먹을 맞댈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 주마.
쉽지는 않겠지만.